메뉴 건너뛰기

close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정문 표지판과 표지석.(2017. 10. 27. 촬영). 이곳 NARA는 한국 현대사 및 세계 현대사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정문 표지판과 표지석.(2017. 10. 27. 촬영). 이곳 NARA는 한국 현대사 및 세계 현대사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NARA 서고의 문서 상자들로 전세계정보의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NARA 서고의 문서 상자들로 전세계정보의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김구팀' 팀장으로부터의 초대

제4차 방미 이튿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로 출근해 노트북을 켜는데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보낸 이는 이선옥씨로 지난날 김구팀(Kim Koo Team, 백범김구 암살배후 조사팀) 팀장이었다.

"박도 선생님…. 목요일 저희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미 박유종 선생님과도 이야기했고요. 그날 NARA에서 일을 마치시고, 곧장 오세요. 간소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고 싶어요. 주태상(남편)씨도 선생님 뵙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선옥 드림"

나는 그 메일을 읽자 만감이 교차했다. 그들 부부와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2004년 2월 2일 아침, 메릴랜드 한 숙소로 재미동포 주태상씨가 찾아왔다. 그는 <한겨레신문>에서 권중희 선생과 나의 방미 기사를 보고 자원봉사를 자청한 재미동포였다.

그는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숙소의 문을 두드린 열혈 청년이었다. 마치 지난날 상하이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윤봉길 의사와 같은….

마침 그는 컴퓨터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하기에 나는 연결이 안 된 노트북을 그에게 맡겼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컴맹이어서 노트북조차 없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의 노트북을 빌려온 처지였다. 그는 숙소에서 1시간여 땀을 흘리면서 연결을 시도했으나 끝내 연결시키지 못했는데, 숙소에 인터넷선이 깔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지금보다 값싼 숙소로, 인터넷이 깔린 곳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나와 권중희 선생은 NARA에서 가까운 곳에 방 두 개인 숙소에 묵고 있었는데 하루 숙박비가 100달러로 부담이 컸다. 이는 그때 자원봉사 유학생 김만식씨가 장기간 두 사람이 한 방에서 기거하면 불편하다고 방 두 개(투 룸)짜리 숙소를 구해준 것이었다. 일리 있는 배려였지만 겨레의 성금을 낭비한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나의 간곡한 부탁에 알아보겠다고 대답하고는 그날 우리 두 사람을 곧장 NARA로 안내했다. NARA에 이르자 고 권중희 선생은 당신 평생 소원이 이뤄지는 것처럼 매우 감격했다.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NARA 2층 자료실에 마련된 KIM KOO TEAM 리서처(조사자) 좌석.
 NARA 2층 자료실에 마련된 KIM KOO TEAM 리서처(조사자) 좌석.
ⓒ 박도

관련사진보기


'Kim Koo Team'

그날 오후에는 유학생 이선옥씨가 우리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바쁜 유학생활이지만 백범 선생 암살배후 진상을 규명 일에 힘을 보태겠다고 자원봉사 의사를 밝혔다. 나는 그 열정과 진지한 자세에 감동을 받아 우리와 함께 일하는 걸 승낙했다. 

그때 김구팀(Kim Koo Team)은 모두 여덟 분의 재미동포와 유학생들로 구성됐는데, 이들 외에도 이도영, 박유종, 이재수, 김만식, 정희수, 권헌열씨 등이 우리 일을 도와줬다. 그분들 가운데 주태상씨는 NARA에서 리서치(Research, 검색)뿐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을 자기 승용차로 출퇴근시켜 주는 일, 값싼 숙소를 구해주고 이삿짐 나르는 일, 컴퓨터 설치 및 스캐너 빌려주는 일 등 한국의 두 노인의 손발 역할을 도맡았다.

권중희 선생과 필자의 귀국에 배웅 나온 김구 팀 자원봉사 조사자들(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권헌열 아드님,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팀원 중 이도영, 김만식 등은 빠졌음.)
 권중희 선생과 필자의 귀국에 배웅 나온 김구 팀 자원봉사 조사자들(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권헌열 아드님,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팀원 중 이도영, 김만식 등은 빠졌음.)
ⓒ 박도

관련사진보기


이선옥씨는 자원봉사 중 유일한 여성으로, 대단히 열정적이고 학구적이며, 아주 야무지게 일을 잘했다. 내가 그를 팀장으로 정하자 모두들 동의해줬다. 그러자 그는 문서 찾는 일들을 조직적으로, 한 치 차질 없게 추진했다. 그때 우리 김구팀은 40여 일 눈에 핏발을 세우고 암살 배후가 될 만한 문서를 찾았다.

특히 NARA의 문서 자료에서 김구, 이승만, 안두희 등의 이름만 나오면 무조건 복사했다. 그런 다음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면서 읽은 뒤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하지만 그 문서들은 백범 암살 언저리만 맴돌았을 뿐이었다. 정곡을 꼭 찌르는 결정적인 문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당시 김구팀이 찾았던 문서 몇 장을 소개한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 불리한 문서는 대부분 파기했다"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1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1
ⓒ NARA

관련사진보기


위 문서는 주한 무초(John. J. Muccio) 미국대사와 김규식 박사 간의 대화(1949년 6월 28일)로, 김구 선생의 죽음에 관련한 루머(rumor, 뜬소문), 김구 선생 장례 절차에 대한 논란(국장, 국민장으로 할 것인가 등), 한독당의 미래, 한독당 내에서 김규식 박사의 지도력(Leadership)과 함께, 김규식 박사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문서를 요약하면, 김규식 박사는 김구 선생과는 달리 지방의 조직도 갖지 않았고, 정치적인 야망도 크게 없었고, 정치적인 캠페인(Campain, 운동)도 이전에 해보지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독당 내에서 소임을 다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이야기다.

그밖에도 김규식 박사와 김구 선생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 간의 협력 시도, 한국 내에서 정당간, 국민간의 화합과 연대의 문제점, 공산주의와 한국인들, 중국인들 이야기, 공산주의자로 분류되는 국회의원들의 체포에 대한 김규식 박사의 우려 등도 기록돼 있다.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2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2
ⓒ NARA

관련사진보기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3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3
ⓒ NARA

관련사진보기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4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4
ⓒ NARA

관련사진보기


위의 세 문서에는 김구의 출생부터 활동 및 업적에 대해 열거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12시 20분께 한국 군인의 미제 소총 4발로 사망했다는 소식, 김구 선생의 죽음으로 인한 한국인들의 충격, 이승만 정부의 성공적 야당 지도자이자 유일한 비공산주의자였던 김구 선생에 대한 애도, 김구 선생의 암살자로 서울 경찰의 안두희 지목 관련 내용, 정부 관료들의 공식적 입장 등이 실려 있다.

하지만 아무리 NARA 서고의 문서를 뒤져봐도 김구 선생 암살 배후에 관해 정곡을 찌르는, 딱 부러지는 문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어느 암살 지령자가 멍청하게 딱 부러지는 말이나 문서를 남기겠는가? 그 지령 단계는 대체로 점조직이기 마련이고, 그 지령은 이심전심의 비법을 쓰기 마련이다. 암살 지령자는 그것마저도 믿을 수 없어 암살 하수인을 다른 하수인을 시켜 죽여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비정한 암살 세계 아니겠나(관련 기사 :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누구를 가장 두려워했을까?).

게다가 NARA의 한 아키비스트(Achivist, 문서관리자)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국무성이나 CIA에서 미국에 불리한 문서 97~98%를 파기(Destroyed)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런 점을 몰랐던 우리 아마추어 김구팀은 핵심 문서를 찾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힐 '알맹이'는 없었다

NARA의 한 아키비스트가 조사자들에게 중요문서 97~98%는 파기(DESTROYED)됐다고 전하는 메모지로 NARA 검열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NARA의 한 아키비스트가 조사자들에게 중요문서 97~98%는 파기(DESTROYED)됐다고 전하는 메모지로 NARA 검열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NARA에서 발굴한 문서5
 NARA에서 발굴한 문서5
ⓒ NARA

관련사진보기


NARA에서 발굴한 문서6
 NARA에서 발굴한 문서6
ⓒ NARA

관련사진보기


NARA에서 발굴한 문서7
 NARA에서 발굴한 문서7
ⓒ NARA

관련사진보기


위의 문서5는 CIA 이전 CIC, OSS 측 도서관에서 만든 1948년~1950년 한국 정치인들에 대한 인덱스(Index, 색인)카드다. 이 인덱스카드를 보고 다시 그 문서를 찾아가 보니 해당 문건 (#432089)의 실제문서 대신 문서6와 문서7이 존재했다.

이 노란색 종이(문서7)가 바로 문서 수거에 대한 정보다. 즉, 미 CIA에서 이 문서를 일단 비밀해제 했지만, 다시 이 문서를 스크린(screen, 정밀조사)한 뒤, 한국과 미국간 혹은 김구 관련 민감한 내용이 있어 CIA가 1978년 10월 16일 이 문서를 수거한 것(문서6)을 1979년 2월 22일에 이를 확인한 것(문서7)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CIA의 한국 정치인 이름 인덱스카드 상에서 관심 있는 문서 #432089를 찾아봤더니 이 문서 대신 CIA측에서 이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아직도 이를 가지고 있다는, 이 문서에 대한 '접근 제한' 노티스(Notice, 주의사항, 또는 알림)로 1979년 2월 22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볼 때, 미국의 국익에 위배되는 문서나, 반미(反美) 감정을 유발하거나, 한국현대사에 아주 예민한 정보가 담긴 문서는 아직도 NARA 비밀서고에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다.

조사자가 이를 미국의 정보공개요구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요구를 해도 미국 측에서 응하지 않을 뿐더러, 마지 못해 응한다 해도 해당부분은 새카만 색깔로 덧칠해 나오기 때문에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미국의 명분은 국가 안보와 사생활 보호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No' 하면 뾰족한 대처 방법이 없다고 한다. 더 이상의 요구는 미국 국법에 위배되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미국 내정을 간섭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중요 기밀문서의 공개는 미국의 국익과 사생활 보호를 빌미로 '엿장사 마음대로'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아마추어 조사자들이 해결하는 데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한계점이었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우리 김구팀은 분루(憤淚, 분하여 흘리는 눈물)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NARA에서 발굴한 서류철. 이 서류철은 고 권중희 선생이 보관했다. 얼마 전에 사모님을 만나 이 서류철의 행방을 문의하자 권 선생 사후 이삿짐 센터에 보관했는데 아마도 폐기처분했을 거라는 답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것이 아마도 백범 진상 규명의 현주소가 아닐까? 이 서류철은 팀장 이선옥 씨 작품이었다.
 NARA에서 발굴한 서류철. 이 서류철은 고 권중희 선생이 보관했다. 얼마 전에 사모님을 만나 이 서류철의 행방을 문의하자 권 선생 사후 이삿짐 센터에 보관했는데 아마도 폐기처분했을 거라는 답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것이 아마도 백범 진상 규명의 현주소가 아닐까? 이 서류철은 팀장 이선옥 씨 작품이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조사자들의 점심시간으로 토의장이기도 했다(장소는 NARA 1층 구내식당으로 오른쪽부터 권중희, 이도영, 박유종, 정희수, 이선옥, 주태상, 그리고 취재 중인 EBS 김봉렬 PD.)
 조사자들의 점심시간으로 토의장이기도 했다(장소는 NARA 1층 구내식당으로 오른쪽부터 권중희, 이도영, 박유종, 정희수, 이선옥, 주태상, 그리고 취재 중인 EBS 김봉렬 PD.)
ⓒ 박도

관련사진보기


한국전쟁 사진을 보다

이런 사실을 미국 NARA 현지에서 뒤늦게 알게 된 우리 김구팀은 계속 리서치 작업을 하느냐 마느냐 문제로 한동안 갑론을박했다. 이곳을 오랫동안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했던 고 이도영 박사는 "핵심 문서는 비공개됐지만, 유탄의 파편은 그래도 남아 있을 것"이라면서 "조사자들은 그것을 찾아 퍼즐게임처럼 윤곽을 맞춰 가면 실체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씀을 했다.

그때 우리의 결론은 다수결로, 기왕 여기까지 누리꾼들의 성금으로 왔으니까 북데기 속에서 알곡을 찾는, 농사꾼의 심정으로 애초 계획한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로 했다.

"우리가 이 무모해 보이는 이 일을 시작하면 후세에 누군가 사명감을 가지고 백범 암살 배후의 실체를 밝힐 것이다. 우리는 그 씨앗을 뿌리는 농사꾼 심정으로 이 일을 계속하자."

나의 말에 재미 자원봉사자들은 화답했다.

"설령, 두 분 선생님은 빈손으로 귀국하시더라도 남아있는 저희들이 계속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일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때 영어에 매우 어두운 나는 마침 NARA 5층 자료실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발견하고 밥값을 할 수 있다고 무릎을 쳤다. 그 사진들은 이전에 내가 보지 못한 것들로 거기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똥처럼 마구 쏟아붓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란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유엔군들이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평양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란민들,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란민들이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 역에서 남행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란민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가져다가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은 허용된다고 해, 주태상씨의 스캐너를 빌려 박유종 선생의 도움으로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40여 일간 수만 매의 사진자료를 들춰 그 가운데 480여 매를 엄선했다. 이는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의 연재로 알려졌다.

귀국 후 연재가 끝난 즉시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여러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독자들의 성원도 컸다. 나는 분외의 성원에 NARA에서 미처 들춰보지 못한 사진들이 눈에 아른거려, 다시 지난 2005년 11월에 2차로, 이어 2007년 2월에 제3차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하여 NARA뿐 아니라 버지니아 남단 노퍽의 맥아더기념관까지 두 차례 방문해 한국전쟁 관련 기록물 1800여 점을 입수해 왔다. 

마치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왔던 고사처럼 한국전쟁 자료를 복사해왔는데, 자원봉사자 박유종, 주태상씨 등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스캔하는 필자. 스캐너는 주태상 씨, 노트북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의 것이었다.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스캔하는 필자. 스캐너는 주태상 씨, 노트북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의 것이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안두희는 과연 단독범이었을까

안두희의 주장대로 그는 단독범일까. 아니면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에 거대한 조직과 막강한 권력이 숨어있는 걸까.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한 권중희 선생과 수개월 동안 침식을 함께하고, 안두희 저승사자였던 박기서 의사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필자는 아직도 백범 암살범 배후는 오리무중이다.

그 진상은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한 개인으로서, 더욱이 영어가 먹통인 필자와 같은 아마추어 조사자에게는 거대한 벽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은 정부가 혹은 정부기관의 수사 전문가가 나서서 찾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 평생 조국 독립에 몸 바치신 백범 선생에 대한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그때 김구 팀이 NARA에서 발굴한 백범장례 행렬 사진을 모두 싣는다.

1949년 7월 5일 고 백범김구 선생 영결식이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른 뒤 효창동으로 운구하고자 상여가 서울운동장을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다. 여기 사진들은 모두 '김구 팀'에서 발굴했다. 여기 사진들은 미 육군정보팀에서 촬영하여 본국에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1949년 7월 5일 고 백범김구 선생 영결식이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른 뒤 효창동으로 운구하고자 상여가 서울운동장을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다. 여기 사진들은 모두 '김구 팀'에서 발굴했다. 여기 사진들은 미 육군정보팀에서 촬영하여 본국에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 NARA

관련사진보기


"친애하는 자매 형제여, 우리의 살길은 자주 독립의 한 길 뿐이다. 이 길이 아무리 험악하다 하여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가지는 못하는 길이다. 주저하지도 말고 유혹 받지도 말고 앞만 향하여 매진하자. 내가 비록 불초할지라도 이 길을 개척하고 나가는 데는 앞에서 나갈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부월(斧鉞, 형구로 쓰는 도끼))이 당전(當前, 바로 눈 앞에))할지라도(곧, 중형을 받고 죽게 될지라도) 도피하지는 아니하겠다." - 부월이 당전해도 단정 반대. 1948년 3·1절 기념사 -
 "친애하는 자매 형제여, 우리의 살길은 자주 독립의 한 길 뿐이다. 이 길이 아무리 험악하다 하여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가지는 못하는 길이다. 주저하지도 말고 유혹 받지도 말고 앞만 향하여 매진하자. 내가 비록 불초할지라도 이 길을 개척하고 나가는 데는 앞에서 나갈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부월(斧鉞, 형구로 쓰는 도끼))이 당전(當前, 바로 눈 앞에))할지라도(곧, 중형을 받고 죽게 될지라도) 도피하지는 아니하겠다." - 부월이 당전해도 단정 반대. 1948년 3·1절 기념사 -
ⓒ NARA

관련사진보기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 뿐이랴. 대중의 기아(飢餓)가 있고, 가정의 이산(離散)이 있고, 동족의 상잔(相殘)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백범 어록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 뿐이랴. 대중의 기아(飢餓)가 있고, 가정의 이산(離散)이 있고, 동족의 상잔(相殘)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백범 어록
ⓒ NARA

관련사진보기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격성(激成)할 뿐일 것이다." - '통일 독립 달성을 위한 7거두 성명' 중에서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격성(激成)할 뿐일 것이다." - '통일 독립 달성을 위한 7거두 성명' 중에서
ⓒ NARA

관련사진보기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 <나의 소원>중에서 -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 <나의 소원>중에서 -
ⓒ NARA

관련사진보기


"통일이 없이는 독립이 있을 수 없고, 독립이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민족단결 뿐이다. 그러나 현시에 우리 조국이 미·소 양국의 분단점령을 당하고 있는 이상 국제협조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제협조에 노력하였고, 앞으로 이 노력을 계속할 결심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의하여 국제협조의 노력도 공고한 민족단결이 있은 뒤에야 주효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였다." - 통일 독립기구 강화. 1948. 6. 7 -
 "통일이 없이는 독립이 있을 수 없고, 독립이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민족단결 뿐이다. 그러나 현시에 우리 조국이 미·소 양국의 분단점령을 당하고 있는 이상 국제협조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제협조에 노력하였고, 앞으로 이 노력을 계속할 결심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의하여 국제협조의 노력도 공고한 민족단결이 있은 뒤에야 주효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였다." - 통일 독립기구 강화. 1948. 6. 7 -
ⓒ NARA

관련사진보기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 <나의 소원> 중에서 -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 <나의 소원> 중에서 -
ⓒ NARA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 작성에 김구 팀장 이선옥씨의 자료 해설과 자료 이미지 변환에 눈빛출판사 편집부 성윤미씨의 도움이 컸음을 밝힙니다.



태그:#김구, #NARA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