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근시와 약시 때문에 두꺼운 안경을 쓴 채로 경기에 임하는 정현의 모습

고도 근시와 약시 때문에 두꺼운 안경을 쓴 채로 경기에 임하는 정현의 모습 ⓒ 정현 인스타그램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테니스계에 새 희망이 등장한 건 지난 2013년 7월이었다.

큰 키에 테니스 선수로는 드물게 안경까지 착용한 정현(21)이 닉 키르기오스(호주)와 보르나 초리치(크로아티아) 등 당시 주니어 최강자로 군림하던 선수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 대회 결승 무대에 진출했다.

2011년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주니어 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실력을 키워가던 정현이었지만, 세계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주니어 대회에서 그것도 '테니스 불모지' 한국 선수의 활약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현은 결승에서 지안루이치 퀸지(이탈리아)에게 2-0(5-7, 6-7)으로 패했지만,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한국 테니스 팬들은 물론이고, 세계 테니스계에 정현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승승장구' 정현, 역사를 쓰다

 정현의 모습

정현의 모습 ⓒ 정현 인스타그램


2013년이 정현의 이름을 알린 해였다면, 2014년은 그의 잠재력을 본격적으로 입증하기 시작한 해였다.

정현은 시니어 대회인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세 차례 우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8월엔 한국 테니스 선수 사상 최연소인 만 18세 3개월의 나이에 ATP 챌린저 투어 대회(방콕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9월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복식에선 자신보다 5살 많은 임용규와 함께 환상의 버디 플레이를 펼치며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겹경사까지 맛봤다.

ATP 랭킹 772위(2013년 기준)에 불과했던 정현의 랭킹은 2014년 12월, 무려 599계단이나 뛰어오른 173위. 그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준 기록이었다.

정현의 기세는 2015년에도 꺾이지 않았다. 특히 그해 3월 거둔 짜릿한 승리는 잊을 수 없다. 당시 마이애미 오픈 남자 단식 본선 1회전에서 세계 랭킹 50위였던 마르셀 그라노예르스(스페인)와 맞대결을 펼친 정현은 전 세계 테니스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2-1(6-0, 4-6, 6-4)로 승리를 거두는 기쁨을 맛봤다.

외신들은 "불과 10대 불과한 어린 선수가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그것도 정상급 선수을 물리쳤다"며 정현의 잠재력에 극찬을 보냈다. 

4월 미국 챌린저 대회에서 우승컵까지 들어 올린 정현은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두 번째로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진입(88위)하는 역사까지 썼다.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사상 최연소 나이인 만 18세 11개월의 나이에 이룬 대기록이었다.

슬럼프에 빠진 정현, 다시 일어서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17 ATP 넥스트 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정현의 모습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17 ATP 넥스트 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정현의 모습 ⓒ 정현 인스타그램


100위권에 당당히 진입한 정현은 세계최고 귄위의 US오픈 대회 본선 자동 출전기회도 얻었다.

US오픈 128강전(1회전)에서 제임스 덕워스에게 3-0(6-3, 6-1, 6-2) 완승을 거뒀고, 64강전(2회전)에선 '세계최강'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스위스)를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고 멋진 승부를 펼치며 테니스 팬들을 놀라게 했다. 

정현은 당시 바브란카와의 맞대결에서 세트스코어 3-0으로 패했지만, 1세트부터 3세트까지 모든 세트를 타이 브레이크까지 가는 접전(6-7, 6-7, 6-7)으로 이끌며 바브란카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10대의 나이에 세계 최고 선수와의 경쟁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테니스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정현. 하지만 늘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정현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2016년 호주와 프랑스 오픈에서 연이어 1회전 탈락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고, 복부 부상까지 겹치며 좀체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물론 랭킹은 100위권 밖으로 추락했고, 그를 둘러싼 여론의 목소리도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정현은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슬럼프 기간 동안 근력을 키워나갔고, 안정적인 서브 자세를 연마해 서비스 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물론 그 결과 정현의 서비스 평균 속도(182km→188km)와 서브 득점률(64%→70%) 그리고 리턴 게임 획득률(19%→32%)이 1년 사이에 크게 향상됐다.

정현은 지난 4월 열린 바르셀로나 오픈에서 '탑 랭커' 필리프 콜슈라이버(독일)와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를 무너뜨렸고, 5월 BMW오픈과 10월 상하이오픈에선 10위권 선수인 가엘 몽피스(프랑스), 바우티스타 아굿(스페인)을 나란히 제압했다.

2017년 톱랭커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자신감을 회복한 정현은 11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막을 내린 넥스트 제너레이션 ATP 파이널스 결승에서 안드레이 32위 루블레프(러시아)를 3-1로 제압하고 ATP투어 우승컵까지 들어올렸다.

한국 선수가 ATP 투어에서 우승한 건 지난 2003년 1월 이형택(41)이 아디다스 인터내셔널에서 정상에 오른 이후 무려 14년 10개월 만이다. 21세 이하 톱 랭커들이 겨룬 세계 권위의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정현은 우승 상금으로 39만 달러(약 4억3000만 원)를 거머쥐었다.

그는 경기종료 후 ATP와 가진 공식 인터뷰에서 "경기 중 많이 긴장되고,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화도 났지만, 경기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것이 승리에 도움이 됐다"며 우승 소감을 전했다. <로이터 통신>은 보도 기사에 정현을 "아이스맨(ice man)"으로 칭하기도 했다.  

자신의 올 시즌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정현.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도 전했다.

"시즌 마무리를 멋진 트로피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새벽부터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2018년도에는 조금 더 멋진 선수로 돌아오겠습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정현 테니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