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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정도에 '낙태충'이라는 말을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 온갖 것들이 우수수 지나갔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때 보았던 '드라마 M'에서 임신중단하려는 여자를 미워해서 여자들을 공격하고 다니던 초록색 눈, 2005년까지만 해도 지하철 광고판에 공익광고라는 이름을 달고 떡하니 붙어있던 남자와 여자가 결혼반지 낀 손으로 임신한 배를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는 사진 옆에 "태아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라는 글씨, 갑자기 무서운 얘기를 해 준다며 내 눈을 빤하게 보면서 "네 뒤에 어린애 영혼이 붙어있어" 같은 몹쓸 장난을 치던 대학교 선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접해왔던 임신중단에 대한 수없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총력을 다 하고 있었다. 소중한 태아의 생명을 '떨어뜨리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고, 이것은 많은 경우 젊은 여성의 성생활을 비난하는 보수주의와 결합해 있었다. "몸 함부로 굴리고서 그 결과로 생긴 생명은 책임지지 않는다".

'몸 함부로 굴렸으면' 책임을 져야한다?

'낙태죄 폐지' 를 촉구하는 70여개 시민사회단체 및 여성들이 지난달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형법상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보건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시술 (낙태수술)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 입법예고안을 철회하고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낙태죄 폐지' 를 촉구하는 70여개 시민사회단체 및 여성들이 지난달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형법상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보건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시술 (낙태수술)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 입법예고안을 철회하고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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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함부로 굴린다'고 말할 거라면 우선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으면' 임신실수가 반드시 피할 수 있는 일인지를 물어야 한다. 물론 지극히 엄격하게 기준을 적용해서 1대 1의 결혼 관계를 전제로 임신 계획이 없으면 결코 섹스를 하지 않는 여성을 일반으로 상정한다면 '몸 함부로 굴린다'는 말이 성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낙태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정도까지 극단적인 사고가 전제되어 있지는 않다.

'몸 함부로 굴린다'는 것은 결혼관계를 전제하지 않은 성적 관계를 풍성하게 맺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말이다. (남성들에게는 물론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차원에서 '몸을 함부로 굴리면' 반드시 임신을 하게 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임신 실수는 '여성의 성경험이 얼마나 다양한 양상으로 여러 남자들과 진행되는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섹스를 하다 콘돔이 터진다거나, 서툴러서 콘돔을 제대로 끼우지 못했다거나, 깜빡하고 먹던 피임약을 하루 까먹었다거나, 루프를 사용해서 완벽하게 피임을 했다고 믿었는데 자궁 외 임신이 되는 온갖 종류의 '불운'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낙태충', '살인마'라고 비난당하는 여성들은 누구인가. 중학교 때 학교에서 소위 놀던 여자애를 향해 다른 여자애들끼리 "쟤 낙태했대"라고 소곤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임신중단을 하지 않았을까? 담임선생님의 어머니는 또 어땠을까? 셋째 아이를 임신한 기혼여성들, 48세가 넘어서 임신한 기혼여성들을 주위 사람들이 질시하고 비난하진 않는다.

'낙태충'이라는 단어 속에 아이를 더 낳을 만한 상황이 되지 않는 기혼 여성의 임신중단은 좀처럼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충분히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출산 기계로서의 의무를' 이행했기 때문이다. 임신중단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가장 큰 몫은 소속되지 않은, 의무를 다하지 않은 여성의 신체로 향한다.

그러나 선택해서 섹스를 하고 임신을 했으면 생명을 '책임지라'는 주장 앞에서 임신중단이 여성이 자신과 아이를 둘러싼 환경을 충분히 고려해서 '책임있게' 행동한 결과라는 사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게 된다.

태아의 생명권은 소중하다?

지난해 10월 보신각에서 있었던 2차 검은시위 사진이다.
 지난해 10월 보신각에서 있었던 2차 검은시위 사진이다.
ⓒ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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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가 태아라는 특수한 위치라는 걸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한 인간의 '선택권'과 다른 인간의 '생명권'이 길항한다면 보통의 경우 생명권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고갱이도 여기에 있다. 비단 임신중단을 선택하는 여성을 살인마로 명명하지 않더라도, 가능한 제한을 두어 태아의 생명권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생명권을 잃어버린 인간은 애초에 선택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사람의 생명권을 보장하고 그 위에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여성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태아의 삶까지 고민하게 된다. 막 태어난 인간은 다른 동물과 조금 다른 특징을 갖는다. 막 태어난 인간의 신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완성되어 있지 않고,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아이를 혼자 생존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킬 때까지 모체는 끊임없이 그 아이를 보살펴야만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지를 감안할 수 있는 것은 모체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의 생존 이상으로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가 '행복'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태어난 아이의 행복은 많은 경우 여성이 처해있는, 혹은 처할 것으로 추정되는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아유기나 영아살해가 많은 경우 '낙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화장실에서 출산을 하고 변기물을 내려버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모텔방에서 출산을 하고 질식시켜 죽이기도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 아이를 '죽이고 싶어서' 낳는 사람은 없다. 태아의 죽음과 영아의 죽음, 사회는 그 무게를 어떻게 재어야하는가.

태아는 인간이다?

태아의 신체가 어떻게 구성되고, 몇 주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생기고, 심장이 뛰고 뇌가 생기며 집게를 피해 도망 다닌다는 이야기들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들어야만 했던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정보값은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태아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미 인간인 태아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법률적으로 영아살해의 죗값과 낙태의 죗값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디서부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합의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임신 초기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인 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미 인간이라고 하는 의견을 가장 많이 접한다. 그러나 이 의견을 앞에 두고서는 태어난 이후에 뇌를 상실한 경우 인간성을 말살당한 것인지 묻게 된다. 뇌가 없이 태어나서 얼마 살지 못한 영아의 삶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었다고 치부해야 하는가? 낙태는 살인이라는 주장을 전제한다면 태아에게 뇌가 없다는 것을 임신 중 확인하게 된다면 임신을 중단해도 살인이 아닌가? 문제가 되는 것은 '뇌'라는 한 가지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뇌가 있는 태아가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이라고 할 것이라면, 살고 싶은 욕망은 인간 외의 모든 생명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체기관이 다 갖추어지는 순간을 인간이라고 규정한다면, 신체기관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인간을 인간이라고 칭해야 할지가 난망해진다.

법에서도 태아를 인간이라고 분명하게 규정짓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신체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직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몸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자아가 있을까. 자아는 필연적으로 그 자아를 담을 신체를 필요로 한다.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조차 자신의 신체가 어떤 성별로 타인에게 비치는지, 수술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정체감을 갖는다. 그리고 임신은 미생물이나 세균보다 훨씬 더 크고, 심지어 같은 종인 생명을 자기 내부에서 성장시키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임신을 한 여성들은 '임신을 한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찾아나가는 열 달을 겪게 된다.

임신을 한 여성은 자신의 신체 안에서 움직이는 태아를 느끼고, 그 태아가 성장해 나감에 따라 골반이 벌어지고 자궁이 늘어난다. 가슴이 부어오르고 변비가 생기고, 손발이 떨리기도 한다. 몸 안에서 태동을 느끼며, 손발이 부어올라서 온몸이 무거워진다. 그저 여성의 임신이 이토록 힘들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임신한 '신체'로 새로운 '신체'를 가지게 된다. 여성의 신체가 변하는 이유는 명백히 여성의 신체의 일부로 태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겐 누구나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 그러나 그런 권리 이전에 모체와 태아는 임신상태가 시작되면서부터 운명공동체가 된다. 모체에게 가해지는 위협은 태아에게 가해지는 위협이기도 하다. 모체가 숨을 거두면 필연적으로 태아도 숨을 거둔다. 나의 '손'은 내 소유가 아니라 나의 신체다. 나의 발, 나의 위, 나의 뇌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태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문재인 정부가 필요로 한다는 '광범위한 사회적 의견'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청원'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청원'
ⓒ 청와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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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대선 기간부터 낙태문제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당시 문재인 대선후보의 대답은 여성들을 갑갑하게 했다. 여성의 신체에 대해 여성의 의견을 배제한 채 '광범위한 의견'을 모으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여성들이 겪어온 것이다.

2016년 12월에 있었던 '가임기 여성지도' 사건이 보여주듯 지금까지도 신체 외적 존재들, 이를테면 경제발전이나 노동력 공급같은 필요에 의해 여성의 신체는 끊임없이 출산을 기준으로 소비되고 분류되며 라벨링되어 왔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여성들 자신에게 죄책감을 부추기는 것이다. 여성들은 죄책감과 도덕적 비난 속에서 분열하고 서로를 질시하고 고통에 빠지기도 하며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신과 아이의 삶을 위해' 임신을 중단하고 싶어 필사적으로 애를 쓴다.

일각에서 '위원회' 정부라고 놀리는 경우도 있지만, 문재인 정부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풍부하게 받아들여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보 시절 문재인 캠프는 의견을 받아들여야 할 한 축으로 종교계를 꼽았다. 이렇게 보면 마치 '종교계'라는 거대한 집단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사회적 사건에 아주 큰 당사자인 것처럼 보인다. 지난 10월에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서 진행한 '낙태 합법화' 청원은 청와대의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참여 인원인 20만 명을 돌파해, 약 23만 5천 명이 참여했다. '20만'이라는 숫자에 마음이 복잡했다. 의료계에서는 한 해 낙태가 20만 건 이상 실행된다고 말한다. 청와대는 이 숫자 앞에 이제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

'낙태충'이라는 말은 임신중단이 범죄라는 인지에 기초해 있다. 임신중단은 범죄인가? 임신을 중단할 때 가장 상처를 입는 존재는 누구인가? 혹은 중단하지 못했을 때 가장 피해를 보는 존재는 누구인가? '종교계'인가, 비난하는 사람들인가, 충분한 노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기업들인가, 경제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해야 하는 정부인가. 물론 이 대답은 청원 게시판에 수없이 달린 '동의합니다'라는 23만 개 댓글 속에 다 들어 있다.


태그:#낙태죄
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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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을 씁니다.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혹은 그 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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