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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문인의 장점이 안정감이라면, 신인의 강점은 새로움이다. 그 새로움이 굳이 파격적일 필요는 없다. 한 삶을 처음 만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롭고 설레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 <섬이 된 사랑>은 저자 박희균 시인이 낸 첫 시집이다. 그녀는 나이 오십에 들어선 늦깎이 신인이다. 성기조 교수가 쓴 부록 해설을 보면, 그녀는 "일상의 생업에 충실하면서 1인 2역으로 시를 쓰"고 있다. 말하자면 본업인 생업이 따로 있고, 시 쓰기는 부업인 셈이다.

시가 '부업'인 덕일까. 그녀의 시에선 전공자들의 기교가 보이지 않는다. 거대 담론이나 형이상적인 깨달음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 자리에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가, 그녀가 살면서 터득한 소소하지만 와닿는 고백이 담겨있다.

그래서 시집 한 권을 채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나 보다. 인생의 경험이 하나씩 축적돼 익을 때를 기다려 비로소 쓸 수 있는 시들을 담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그녀의 인생이 담긴 이 시집을 말 그대로 '인생 시집'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기다림은 미덕일까

박희균 시집 <섬이 된 사랑>
 박희균 시집 <섬이 된 사랑>
ⓒ 문예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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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픈 말이 많아서 시인은 시를 쓴다. 그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시를 쓰기 시작했을까. 아니,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시인에게 언어는 시다. 첫 장에 수록된 시를 보자.

기다리며
사는 것이
나의 삶이 되었다.
- 시 '섬 하나' 전문, 12p


정말 짧다. 이렇듯 단출한 글마디로 말을 추리는 것이 시의 힘이다. 이 짧은 글마디에서 뜻을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시인이 말한 "기다리며 사는 것"은 무엇일까.

본질적으로 기다림은 미덕이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성숙하다. 인내하는 풀만이 꽃을 피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다림은 앞날에 대한 두근거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더군다나 시인처럼 중년의 기혼 여성에게는 기다림이란 강요되는 것이기 쉽다. 니체에 따르면, 미덕이라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진정한 미덕이 아니다. 미덕이란 이름 아래 자신을 희생하고, 기존 체제와 억압에 종사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기다림이 있는 반면, 우리 사회에는 아내라서, 엄마라서, 또 며느리라서 양보해야 하는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의 양면이다. 시인이 고백한 기다림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생이불유

이쁘게만 보이던
딸이 가슴앓이를 한다


풋풋한 사랑
삐끄덕거리는 소리에
밤새도록 눈물 흘린다


새벽에 잠든
딸을 안아주며
여름 날 소나기처럼
지나가기를 기도한다.
- 시 '딸' 전문, 47p


딸의 병명은 '사랑의 열병'인 것 같다. 사랑을 일러 강렬하다고 한다. 사랑이 주는 기쁨은 강렬하지만, 그만큼 아픔도 강렬하다. 딸이 이제 막 풋풋한 사랑을 시작했나보다. 딸이 밤새도록 눈물 흘린다. 그런 딸을 그녀는 가만히 지켜본다.

이른 새벽 딸이 울다 잠들 때까지 그녀는 깨어있다. 아마 딸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잠든 딸을 조용히 안아준다. 울다 잠든 딸과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이 자연히 그려진다.

노자에 '생이불유(生而不有)'란 경구가 있다. 낳되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자가 발견한 자연의 섭리이자, 사람들에게 권하는 해법이다. 이는 자녀 관계에도 적용 가능하다. 부모와 자녀 간 갈등은 대개 서로를 소유하려는 데에서 기인한다.

소유하려는 마음은 상대에게 자기 삶의 방식을 강요하게 한다. 이는 교육이나 조언이란 형식을 띤다. 그러나 그러한 조언은 상대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감을 일으키기 쉽다. 밤새워 우는 딸에게 당장의 백 마디 조언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딸을 조용히 지켜보고 안아주는 것. 그리고 "여름 날 소나기처럼 지나가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 이렇듯 든든한 지지자로, 버팀목으로 곁을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노자가 말한 '생이불유'의 한 실천이 아닐까 싶다.  

두 시만을 가려 읽어보았다. 이외에도 시집 <섬이 된 사랑>에 담긴 시들 대부분이 간결한 시어만을 사용해 일상의 삶을 노래한다. 그래서 시를 해석고자 애써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눈 가는대로, 편한 마음으로 읽으면 된다.

그녀는 말하길, 시는 "따스한 커피 한 잔"(시 '시 여섯' 중)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커피와 시는 지친 일상에 여유를 제공한다. 오늘 하루, 그녀가 우려낸 따스한 시 한 잔 마시는 것은 어떨까.


섬이 된 사랑

박희균 지음, 문예운동사(2016)


태그:#박희균 시인, #섬이 된 사랑, #문예운동사, #성기조 교수, #생이불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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