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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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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너처럼 공익 되고 싶다. 누구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현역병으로 입대했던 친구가 백일 휴가를 맞아 고향에 내려와 던진 한마디. 모처럼 고교 동창들과 한 자리에 어울렸다. 시내 카페에서 시끌벅적 수다를 늘어놨다. 청춘 남성들은 자연스레 화제를 옮겨 군대 생활을 둘러싼 방담을 나눴다.

한 친구가 "너는 어찌 지냈느냐"고 물었다. 느낀 바를 가감 없이 답했다. "학교에서 아이들 수업 보조하는 일이 이리 힘들 줄 몰랐다"고 툴툴거렸다. 이야기를 듣던 맞은편 친구가 볼멘소리를 뱉었다.

"그깟 일이 뭐 그리 힘들다고. 제대로 꿀 빠는 거구만. 너 기초군사훈련 빼고 총은 제대로 들어보기나 했냐?"

씨익 웃어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억하심정이 드는 건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신체조건이 따라 주지 않는 탓에 현역 판정을 못 받은 것뿐인데, 나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사회복무요원도 현역병과 마찬가지로 '국방의 의무'를 짊어지는데.

칠판에 던진 연필깎이, 간담이 서늘했다

그래, 나는 사회복무요원 출신이다. 장애인 특수학교에서 2년 동안 근무했다. 네댓 살 먹은 아이부터 청소년, 스물다섯 살 성인까지 한데 어울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논밭뿐인 학교였다. 도심으로부터 10㎞ 넘게 떨어져 있었다. 명색이 광역시였으나 공립 특수학교는 고작 두 곳에 불과했다.

중증 장애 학생들의 교육권은 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손발을 자유로이 쓸 수 없는 데다, 지적장애까지 동반한 이들이 열 명 가운데 서너 명쯤은 됐다. 휠체어 신세를 진 고등학생의 용변 처리를 도운 적이 있다. 학생을 휠체어에서 들어 올려 좌변기에 앉히려니 요령이 없어 힘깨나 들였다. 물휴지로 뒤처리를 해주는 것도 익숙지 않았다.

외부의 자극을 둘러싸고 민감한 반응을 보이거나 극도로 거부감을 드러내는 장애학생 일부는 돌연 공격적 행동을 드러냈다. 고등부의 한 여학생은 수업 시간 교사가 질문하는 순간 고성을 질렀다. "싫어!" 왼손에 쥐고 있던 은빛 기차 모양의 '샤파' 연필깎이를 칠판으로 내던졌다. 산산이 조각났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제 책상마저도 바닥에 내리쳐 나무판이 두 동강 났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전공과 교실에서 우리와 비슷한 보조인력 격인 특수교육실무원의 코뼈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어느 학생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그리됐단다. 소식을 접하곤 깜짝 놀랐다. 오만 가지 잡념이 뒤엉켰다.

수업 싫어 바닥 눕던 아이... 어르고 달래던 한 달  

복무기간 2년 가운데 1년 반을 '초등부 붙박이'로 지냈다. 극히 미미하지만, 장애학생들 가운데서도 다른 이들을 상대로 꼬집거나 때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 곁에 콕 붙어 있었다. 그들의 학교생활을 보조하는 건 사회복무요원의 몫이었다.

유독 한 어린이 A군이 내게 걱정을 안겼다. 손을 꼭 잡고 걸어가다가도 손톱을 세워 내 손등을 할퀴기 일쑤였다. 갑작스레 내 허벅지를 꼬집는 일도 생겼다. 살결엔 생채기 한 가득이었다.

새 학기 한 달 동안 바른 공부 습관을 형성하도록 돕는 과정은 만만하지 않았다. 놀이터 가고 싶다며 수업 시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앉으란 말을 건네며 그 아이를 자리에 앉히는 일이 반복됐다. 바닥에 드러누울 것 같으면 가만히 눈을 응시하면서 "학생은 수업 시간에 책상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업, 식사, 양치질, 청소, 놀이 등 일상의 면면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단서를 던졌다. 아이 스스로 답을 찾아 행동할 수 있게끔 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정말 아이가 다소 차분해지는 게 아닌가. 책을 찢는 행동도 줄었고, 교과서 속 급식실 사진이나 놀이 그림을 뚫어져라 살피기도 했다. 학기 초 전전긍긍했다. 일 년 내내 이대로면 어떡하나. 걱정은 기우였다.

그해 5월 A군이 팔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이틀 정도 병원에 간병하러 갔다. A군의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선생님, 우리 A 잘 돌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지난 3월 초에 비하면 A는 정말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도 잘할 겁니다. 충분히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입니다."
"제가 그래도 여기 학교에 공익선생님들 중에 믿을만한 분은 선생님밖에 없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간 고단한 기억들과 원망스러운 감정들이 눈 녹듯 풀리는 순간이었다. 마냥 힘들다고 치부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겐 더없이 소중한 성장의 계기였던 것이다.

소집해제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던 지난 2016년 5월 기자가 사회복무요원으로서 배치돼 있던 특수학교 초등부 학급 어린이들이 만든 감사 편지. 장애학생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시간과, 그에 얽힌 따뜻한 기억이 잊히지 않아 자택 침실 벽 한편에 붙여놨다.
 소집해제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던 지난 2016년 5월 기자가 사회복무요원으로서 배치돼 있던 특수학교 초등부 학급 어린이들이 만든 감사 편지. 장애학생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시간과, 그에 얽힌 따뜻한 기억이 잊히지 않아 자택 침실 벽 한편에 붙여놨다.
ⓒ 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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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서 고생해도 '꿀 빤다'... 격려가 필요하다

현역병으로서 자랑스럽게 제대했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사진을 올리고, 대화의 소재를 들춰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군대 에피소드뿐인 사람들이 있다. 지독한 '군부심(군생활에 대한 자부심)'을 부리는 일부 대한민국 남성들 얘기다.

사회복무요원을 향한 그들의 인식은 박하기 그지없다. '사회복무요원은 병역 의무의 순수성을 해치는 존재, 현역과 다르므로 배제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걸까. 독일 언론인 카롤린 엠케가 쓴 저서 <혐오사회>에는 유사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묘사하는 '우리'가 드러난다. 그것은 "동질적이고, 본원적이고, 순수한 공동체"다. 그들이 말하는 국방은 오로지 총포를 손에 쥐고 적과 대치하는 임무만 뜻하는 걸까.

5만 명 넘는 청년들이 전국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대체 복무를 수행한다. 노인, 청소년, 장애인 등 각계각층의 늘어나는 복지 수요를 맞추는 역할이다. 복지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곳엔 어김없이 사회복무요원이 배치된다. 나라의 손길이 가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메우고 공동체 구성원의 통합과 공존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는 셈이니, 이 또한 '국방'의 또 다른 거울상이다.

그런데도 상당수 사회복무요원들이 평가와 인정의 영역에서는 투명인간으로 전락하는 광경을 접하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사회복무요원이었다는 사실조차 밖에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기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일선 현장에서 고생에 시달리는 사회복무요원들이 수두룩하다. 한번쯤은 시민들이 먼저 그들의 손을 어루만지고, 격려 한 마디 건넬 수 있기를 바란다.


태그:#공익근무요원, #사회복무요원, #사회복지, #특수학교,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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