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아이덴티티> 포스터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시작부터 여주인공 일라이저(케이트 베킨세일 분)가 '임상의학' 이라는 이름으로 수련의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대 교수는 히스테리 환자로 그녀를 소개하고, 그녀는 수련의들을 향해 "나는 미치지 않았다"며 "도와달라"고 절규한다. 그녀는 일종의 무대에서 청중 앞에 무방비로 내세워진다. 이것은 지난 세기 의학의 과오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장면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미 흔히 다뤄진 것이기도 하다. 바로 19세기 유럽의 유명한 신경학자인 장 마르탱 샤르코의 연구실을 모방한 장면이다. 그는 히스테리 연구자로, 청중을 모아놓고 히스테리 환자를 자주 시연했다. 프로이트도 와서 여러 달 연수를 하면서 이러한 장면을 목격했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정상과 비정상은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그 경계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 둘 사이를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광인들과 의사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의 두서없는 말 안에도 날카로운 논리와 진실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또 인간 무리에 끼어 살지만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작동하지 못하는 병든 마음으로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많다.

'광기'로 우리를 매혹하는 작품

<히든 아이덴티티>는 19세기 말 영국의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정상과 비정상, 온전한 정신과 광기, 권력과 지식 사이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온전한 정신과 광기의 '모호한' 경계를 탐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 스톤허스트 정신병원의 원장인 사일러스 램(벤 킹슬리 분)은 그래서 "우린 모두 미쳤어. 누군가는 그걸 인정할 정도로 미치지 않았을 뿐이지"라고 일갈한다. 

또 옥스퍼드를 졸업한 재능 있는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 에드워드 뉴게이트(존 스터게스 분)는 "전 항상 마음의 병에 매혹되었다"며 뭔가 비밀이 숨겨진 듯한 외딴 시골마을의 요양소로 찾아와 수련의를 자청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광기와 문명>에서 15세기에 이르러 광기가 문화를 '홀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광인이 가진 위험한 '통찰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광기와 비정상은 우리 문화에서 나름의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수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을 매혹해왔다. 이 영화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정신병원의 원래 원장인 벤자민 솔트(마이클 케인 분)에게선 권위를 가진 엄격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의학이 의사에게 덧씌운 이미지다. 그 아버지는 인자하지만 동시에 권위적인 존재다.

 영화 <히든 아이덴티티>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권력은 '비정상'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여주인공 일라이저도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녀는 정숙한 여인이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신경증에 걸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성에 대한 욕구가 너무 억눌리고 왜곡돼 있었다, 사람들은 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점잔을 떨었지만 이면엔 비뚤어진 쾌락이 숨어 있었다. 일라이저는 빅토리아 시대의 왜곡된 성 관념의 희생자이자, 시대가 만든 병을 앓은 셈이다. 이렇게 영화 속 캐릭터는 정확히 정신의학 혹은 광기의 역사에 대한 상징으로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푸코는 앞의 책에서 18세기 이래로 인문과학이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고, 이 규정들을 인간행동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른바 근대권력의 탄생이다. 15세기 경 한센병이 갑자기 유럽에서 물러나면서 환자를 수용했던 거대한 공간이 텅비게 됐고, 그 자리를 광인과 범죄자, (간질) 환자, 동성애자, 극빈자, 무직자 등이 채웠다. 이들은 '지식을 독점한 소수'가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정상이 아닌 이들도 감금의 대상이 됐음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가족에게 둘러싸여 치료를 받던 광인들도 처음으로 감금됐다. 푸코는 다시 한번 힘 있는 자들의 담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그들의 담론이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강조했다. 20세기 초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주장했던 '헤게모니(Hegemony)' 이론에 다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정상이라고 지목받은 이들의 생각과 행위는 중요치 않다. 그리고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 권력과 저항, 포섭과 배제,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됐다. 일단 그러한 관계가 수립되면, 전자가 후자를 상대로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이 영화가 보여주듯이 권력의 가장 적나라한 행사가 바로 '정신병동' 안에서 이뤄진다. 잔인한 억압과 강력한 저항 (혹은 비협조)이 영화 속 병원 내에 형성된다.

 영화 <히든 아이덴티티> 스틸 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환자는 의사가 제시한 기준을 완전히 내면화할 때까지 감시와 평가, 처벌을 받는다. 의사가 정한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처벌이 반복되는 식이다. 일체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용납되지 않으며, 환자는 독자성이 없는 익명의 정상적 인간이 되길 강요받는다. 이것은 오늘날 21세기의 정신병원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영화는 대립되는 두 인물(벤자민 솔트와 사일러스 램)의 대결을 통해 이러한 억압과 처벌, 저항의 메커니즘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앞서 밝혔듯 이 작품은 권력과 지식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의사가 환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가 점유한 지식 때문이다. 원장인 램이 외부 세계에서 갑자기 온 에드워드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 에드워드가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임에도 동시에 일라이저의 관심을 끌고 사랑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등은 그가 환자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권위를 가진 의사이기 때문이다. 

반전 거듭하며 흥미 자극하는 영화

이 영화의 톤 앤 매너(tone and manner)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그것이지만 지적인 관객을 만족시킬 만한 '통찰력' 있는 스릴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스릴러 장르의 특성상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관객의 예측에 맞는 반전도 있을 테고 어긋나는 반전도 준비돼 있다.

사일러스 램은 광인이지만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돼 있다. 캐릭터 자체가 다면적으로 구축돼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배우로서의 매력과 연기력도 한몫했다. 영화는 엔딩 직전 왜 그가 광인으로 취급받으며 정신병원에 감금돼 있는지 비로소 드러낸다. 그 이유는 솔트 원장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 또 엔딩에 이르러서야 주인공 에드워드 뉴게이트의 비밀도 완전히 드러나는데, 그의 비밀은 그간의 정신의학의 역사를 살짝 비틀고 배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부족하게나마 지난 400여 년에 이르는 감금의 역사와 정신의학사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라 할 만하다.

영화는 장면마다 풍부한 의미를 품고 있지만 어렵거나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할리우드 스릴러물의 전형적인 전개구조를 충실히 따르는 대중영화다. 쉽고 흥미로운 이야기 안에 깊고 풍부한 통찰을 담아낸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정신질환과 요양소라는 소재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재밌게 볼 수 있다.

존 스터게스 정신병원 요양소 광기 미셸 푸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