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 임우정 위원장의 모습.

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 임우정 위원장의 모습. ⓒ 이선필


[기사 수정: 18일 오후 3시 34분]

 "(  )는 한국영화
 진흥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  )는 한국영화 진흥사업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한다."

괄호 안에 들어갈 적절한 단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아래 영진위 노조)이다. 국가 예산의 지원을 받는 조직에서 일하는 노조원들의 규약치고 상당히 적극적이며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흔히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으로 알고 있는 영진위는 정책적인 전문성과 독립성을 보장받는 '분권 자율기구'다. 여러 사람이 지난 10년간 잊고 있거나 애써 무시했던 사실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발동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응한 곳이 영진위였으며, 그 때문에 22회 부산영화제 행사장 주변에서 일부 영화인들이 서병수 부산시장을 겨냥한 팻말에 '박근혜 기획을 후속 조치한 영진위'라는 조롱섞인 지적까지 등장했다.

이와 중에 지난해 8월 민주노총에 재가입한 영진위 노동조합(아래 노조) 소식은 많은 영화인에게 기대감을 주기 충분했다. 부산영화제 예산 삭감을 비롯해 보수 정권의 영화계 길들이기에 사실상 동참한 과오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간 총 세 차례의 성명서를 통해 영진위 노조는 비위 등을 일삼은 사무국장과 영화계 정치적 탄압에 일조해 온 영진위원장의 퇴진을 끌어냈다. 제22회 부산영화제가 한창인 16일 오후 임우정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부역자들
 
 영진위 노조원들이 지난 촛불 정국 때 거리에 나가 시민들과 연대하던 당시 모습.

영진위 노조원들이 지난 촛불 정국 때 거리에 나가 시민들과 연대하던 당시 모습. ⓒ 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


영진위의 주요 의사 결정 기구인 9인 위원회 위원들은 모두 임기가 만료된 상태. 지난해 12월에 5명, 올해 8월에 3명의 임기가 끝났고 그사이 김세훈 위원장도 사퇴하면서 제대로 책임지는 결정자가 현재까지 없는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 일방적 임명이 아닌 영화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을 뽑는다는 취지가 있지만, 예상보다 선임이 늦어지며 영진위 개혁 드라이브가 제대로 걸리지 않고 있다는 게 노조의 해석이었다.
 
- 민주노총 재가입 후 맞는 두 번째 부산영화제다. 그 10개월 동안 노조가 세 번의 성명을 내며 일련의 성과도 얻었다.
"박환문 사무국장과 김세훈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고, 최근에 낸 성명은 영진위 스스로의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였다. (위원장에 동조해 온) 책임질 위치에 있는 본부장급 등의 보직 사퇴를 내부적으로 요구해왔다. 지금 영화계가 반대하는 김종국 부위원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 스스로 먼저 책임을 지는 게 개혁의 동력이 될 텐데 그걸 안 하더라. 첫 번째(2016년 12월), 두 번째(2017년 3월) 성명을 내고 사실 위원장의 사과를 기대했다. 그걸 안 하더라.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다수가 요구하는 상황에서 '내가 정말 잘못한 게 있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였지.

(간부들의) 보직 사퇴라는 것도 지금 위원장과 사무국장이 없는 상태에서 조직개편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사실 상징적인 거다. 자기 잘못들을 인정하자는 거잖나. 사표를 수리할 사람도 없다. 다만 새 위원들과 새 위원장이 왔을 때 제로베이스에서 영진위가 시작한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데 결국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거지."

- 부산영화제에서 노조원들끼리 행사도 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다. 내부 분위기는 어떤지.
"영진위 직원으로서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대외적으로 위축된 건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위원장과 사무국장이 나가고 분위기가 좋아진 건 사실이다. 그간 못했던 얘기도 할 수 있으니까. 직원들이 가장 지쳤을 때 이들이 해임되거나 사퇴했다. 영진위가 뭔가 변화할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직원들이 좋아했지."

- 정권이 바뀐 지 5개월이 넘었고, 문체부 수장도 바뀌었지만, 영진위의 변화는 느려 보이는 게 사실이다. 영진위원으로 하마평에 오른 분들에 대한 소문만 무성한데 사실은 무엇인지.
"우리 역시 소문으로만 듣는 중이다. 위원들이 다 구성은 됐는데 인사검증 중이라는 말도 있더라.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잘 모르겠다. 지난 연말과 3월에 임기가 끝난 위원들 5명은 대선이 끝나고라도 바로 새로 뽑았어야 했다. 도종환 장관이 새로 오면서 나머지 위원들을 추가로 해야 했고. 김세훈 위원장이 좀 더 빨리 사퇴했더라면 가능했을 것 같은데 지나고 나니 아쉽더라. 이 과정에서 중간 관리자들이 버티고 있고…."

- 위원들이 구성돼야 영진위원장을 선출할 수 있는 구조인데.
"위원장 선임이 연말을 넘길 수도 있다는 무서운 말도 나오더라. 위원이라도 빨리 선임되면 호선을 통해 부위원장을 뽑을 수 있는데 말이다. 비정상적으로 조직이 지금까지 돌아가고 있다. 영화계에서 여러 오피니언 리더들이 의견도 내고 토론회도 하지 않았나. 영진위가 정부 기관인 만큼 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고 안건을 의결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새 위원회가 구성되지 않는 이상 그런 걸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영화계의 의견이 전달돼 드라이브 걸기를 기대할 수가 없지. 그걸 할 사람도 없고."

정상화의 길
 
 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 임우정 위원장의 모습.

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 임우정 위원장의 모습. ⓒ 이선필


- 영화제 기간 중 영화인들 릴레이 시위 문구에 '박근혜의 명령에 문체부가 수행했고, 영진위가 후속 조치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런 영화계 시각에 대한 영진위 구성원들은 어떤 생각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우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내부적으론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맞다 생각하고 있다. 욕 먹어야 마땅하다. 사과하고 변해야 후배들이 부끄럽지 않게 일하지. 영화계의 그런 시각에 하다못해 서운하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다. 젊은 직원 중엔 단순히 직장을 구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를 좋아해서 들어오는 이들이 많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땐 '나도 영화인이다'라는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무력감에 젖더라."

- 문체부와의 호흡이나 협업은 어떤가? 변화를 실감하는지.
"수장만 바뀌었지 아직 그대로다. 이번 성명(10월 11일)에서 문체부도 엄청 비판했는데 지난 10년간 영진위와 문체부 관계가 긍정적이진 않았다. 우리의 모든 자료가 점검대상이 됐다. 위원장 결정전에 다 가져가 확인받아야 했다. 습관이 참 무서운 게 장관이 바뀌었는데도 우리가 알아서 그러고 있더라. 영진위가 독립기관이 아닌 게 된 거지. 영진위 자체도 위력이 떨어져서 (정책 결정의) 대화상대로 포함되지 않기도 한다."

- 2010년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노조 파괴와 재구성 과정도 겪었다. 내부적으로 분명 다양한 입장과 이견이 있어 보이는데 이런 걸 어떻게 아우르고 있는지(영진위 노조창립일은 1996년 7월 19일이다-기자 주).

"노조가 없어지진 않았고, 민주노총에 재가입한 거다. 들어가기 힘들었다. 한 번 집 나간 자식이라고(웃음). 민주노총 재가입에 대한 조합원들의 찬성률 자체는 엄청 높았다. 지난 정권 덕인 것 같다. 사실 노조의 힘이 약해진 건 2013년 추진된 영진위 부산 이전 때문이다. 서울에서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지방에 간다는 건 다른 문제다. 노조의 동력이 떨어지지. 서울과 부산 집 2개를 유지해야 했고, 서울 출장도 자주 다니며 삶 자체가 팍팍해지면서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 힘들어진 거다. 이런 와중에 블랙리스트 사건, 최순실 게이트 등이 터졌다. 그리고 불법적인 성과연봉제 확대안 날치기 통과까지. 그러면서 노조의 중요성에 대해 다들 확실히 인식하게 됐다."

- 2018년도 사업계획은 이미 확정이 된 것 아닌가. 영진위 변화에 대해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의식이 있는지.
"그렇다. 이미 정해졌지. 특히 김세훈 위원장 때 추진한 렌더팜(주로 3D 영화 제작에 사용되는 그래픽 생성용 컴퓨터 묶음) 사업 폐지가 큰 타격(예산만 130억 원에 이른 사업으로 활성화 설문 조사 이전에 사업계획을 세워 논란이 됐다-기자 주)이었다. 폐지된 건 매우 다행이지만 동시에 영진위는 전례가 남은 거다. 예전엔 영진위가 뭘 하고 싶어도 수십억, 100억 원대 사업이 전혀 승인이 안 됐었다. 김세훈 위원장을 뛰어넘는 뭔가 다른 힘이 작용했겠지만, 내부적으론 아쉬워한다. 다음부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 할 때 더 힘들어진 셈이다.

이참에 좀 수상한 사업도 정리해야 하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다 보니까 영화계에서 요구하는 것만 해보려는 수준 같다. 한국영화를 위해 뭐가 중요한지를 지금 하는 사업과 비교, 평가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본다. 외부에서 욕을 안 한다고 그대로 하는 게 아니라 예산을 어떻게 나눠서 집중할 건지 정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영진위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의 역할이 뭔지 큰 틀에서 보고 결정할 위원회가 필요하다. 그래야 영화계와 영진위도 신이 나지 않을까. 내부적으로 박 터지게 토론도 하고 말이다."

- 벌써 임기가 1년이 다 돼간다. 3분의 1지점으로 가는 셈이다. 출마 당시 영화계와의 신뢰회복을 목표로 삼았는데 어느 정도 이뤘다고 보는지. 또 이후 청사진이 있다면.

"이제 시작이다. 영진위가 정상화 된다는 의미가 뭐냐면 일단 밝힐 걸 밝히고 사실관계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거다. 누굴 내쫓고 쳐내는 게 아니라 사실관계를 밝혀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때 져야 한다. 누굴 벌주자는 게 아니다. 우리 노조 규약이 좀 특별하다. 한국영화 진흥사업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고, 진흥에 이바지한다는 건 우리 목소리를 내고 제대로 감시하라는 의미다. 영진위 사업이 제대로 가는지 감시하면서 바깥 조직과도 연대해야 한다. 새로운 영진위 이사회가 구성되면 앞으로 더 잘 할 거라고 본다. 그 전에 (내부적인) 적폐는 청산돼야 한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영화진흥위원회 박근혜 이명박 적폐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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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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