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엔 유독 반가운 한국 영화들이 안방극장을 찾았다. 추석인 4일 <변호인>이 JTBC를 통해 방송됐고, 5일과 6일엔 JTBC와 케이블인 OCN이 연달아 <밀정>을 편성했다.

오랜만에 <밀정>을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무엇보다 <밀정>을 보면서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에 대한 아쉬움이 더했다.

역사 논란 위험을 감수한 <밀정> 

 추석 연휴 안방극장을 찾아간 <밀정>

추석 연휴 안방극장을 찾아간 <밀정>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그 이유는 이렇다. <밀정>은 일제 강점기 조선 의열단을 불러낸다. 김우진(공유)을 주축으로 하는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을 꾸미고, 이를 위해 중국에서 폭탄을 들여오려 한다. 조선총독부는 의열단의 움직임을 감지하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을 의열단에 잠입시킨다.

<밀정>의 모티브는 1920년 경기도 경찰부에 특채돼 밀정 역할을 했다고 추측되는 황옥 경부다. 황옥은 밀정으로 의열단에 잠입했다 의열단으로부터 역제안을 받는다. 의열단은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등을 대상으로 거사를 준비했다. 이때 의열단의 김시현은 황옥에게 폭탄이 일본 경찰에게 적발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황옥은 일본 경찰이 사용하던 비표를 의열단에 건넸고, 폭탄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거사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일제가 심어 놓은 또 다른 밀정 권상호의 밀고로 발각됐기 때문이다.

김지운 감독은 개봉 당시 연출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누가 밀정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나 밀정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질곡을 담으려 했다."

이 같은 접근은 일정 수준 위험이 따랐다. 일제는 조선인 협력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했다. 여기엔 조선인을 분열시켜 식민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책략이 숨어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 누구도 밀정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김 감독의 접근방식은 자칫 상황 논리로 흘러 친일세력의 반민족 행위를 정당화시킬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다행히 김 감독은 이 같은 위험을 잘 비껴갔다. 영화 초반 이정출이 김우진에게 먼저 접근하고, 이어 김우진이 이정출을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에게로 데려가는 대목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내 자신들의 사명을 재인식한다. 정채산은 이정출을 설득하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언제나 이름을 새길 때가 옵니다. 어느 역사에 이름을 새기겠습니까?"

정채산의 설득 끝에 이정출과 김우진은 힘을 합쳐 조선총독부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돌진해 나간다. 특히 선과 악의 위태로운 경계를 넘나들어야 하는 이정출로 분한 송강호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수식어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아픈 역사 불렀지만 역사 왜곡 논란 휘말린 <군함도>

 <군함도>는 <밀정>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를 불러냈지만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렸다.

<군함도>는 <밀정>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를 불러냈지만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렸다. ⓒ CJ엔터테인먼트


류승완 감독 역시 <군함도>를 통해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이라는 아픈 역사를 불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역사를 소재로 했어도, 스크린에 옮기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연출자의 상상이 개입할 수 있다. 문제는 연출자가 얼마만큼 사실에 충실했느냐, 그리고 자신이 다루는 주제에 얼마만큼 깊이 있는 이해를 보였느냐다.

앞서 적었지만 <밀정>은 일정 수준 첩보영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선과 악의 희미한 경계에서 일제와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고뇌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다.

반면 <군함도>의 경우, 먼저 강제징용 조선 노동자의 슬픔은 대규모 탈주극으로 소비된다. 그런데 이 탈주극은 사실이 아니다. 군함도에서 실제 3년 10개월 동안 사실상의 포로 생활을 했던 최장섭 할아버지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 징용자들이 탈출을 감행하는 대목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한편 연출자인 류승완 감독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 권력의 가해성 보다 조선인끼리의 분열, 그리고 부역 조선인들의 존재에 무게중심을 둔다. 류 감독은 지난 8월 <노컷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연출 의도를 밝혔는데, 그중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

"나는 분명히 친일부역자들의 역사를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본다. 이걸 덮으려고 하는 이들이 있으니 더 이야기해야 하는 거다."

"실제로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직접 때리지도 않았다. 많은 인구가 통제가 안 되니까 부역자들을 만들어 놓았던 거다."

강제 징용 조선인들끼리라도 분열이 있었고 이를 일제가 조장했다는 점을 끄집어낸 건 분명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그러나 군함도에 근무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일제의 조선 병합과 조선인 강제징용에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이들 역시 일본 식민체제라는 거대한 권력 구조의 일부였고, 그래서 이들에겐 응당 책임을 물어야 한다.

거대 권력은 간과하고 개별 인간의 온정적인 태도에만 주목한다면, 유대인 수용소에서 단지 실무책임만 맡았던 아돌프 아이히만도 법정에 세워선 안 되었다. 더구나 현 일본 아베 내각이 군함도를 일본 근대화의 상징으로 선전하고, 강제 징용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는 작금의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보다 사실에 충실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군함도>는 역사에 접근하는 태도와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밀정>에 미치지 못했다. 만약 류 감독이 <군함도> 연출에 앞서 <밀정>을 보고, 김지운 감독과 의견교환을 했다면 어땠을까? 류 감독이 김 감독을 만났는지 아닌지는 파악하기 곤란하지만, <밀정>을 참고로 삼았다면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리지는 않았으리라는 판단이다.

영화 <밀정> 마지막 장면은 다시 봐도 새롭다. 이정출은 경성 구락부에서 열리는 '재조선검도인의밤' 행사에 맞춰 거사를 계획한다. 이정출의 거사와 동시에 정채산은 의열단의 존재를 밀고한 또 다른 밀정에게 복수극을 벌인다. 이 장면에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가 흐른다.

이 곡 '볼레로'는 초반부터 계속 단조로운 가락을 반복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극 중 검도 구락부 폭파 장면과 복수극 장면 역시 신이 거듭될수록 긴장감이 절정에 이른다. 곡 분위기와 장면이 주는 긴장감이 잘 어우러진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연출자 김지운 감독과 음악 감독을 맡은 모그의 센스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류 감독이 이런 세련미를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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