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을 향한 집념'... 김연경 선수의 포효

'도쿄 올림픽을 향한 집념'... 김연경 선수의 포효 ⓒ 아시아배구연맹


가장 중요한 대회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24일 끝난 세계선수권 아시아 예선전에서 4전 전승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3가지 큰 소득을 챙겼다. 첫째는 내년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 대회 본선(2018.9.29~10.20) 출전권을 획득했다.

둘째는 2020년 도쿄 올림픽 세계예선전과 국제예선전 출전 자격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도쿄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까지 포함해 올림픽 본선 출전권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3번이나 갖게 된 것이다.

셋째는 태국에게 멋지게 설욕했다. 한국은 지난 8월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태국에게 0-3으로 완패를 당했다. 이번에는 3-0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태국전 승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도쿄 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따내는 데 최대 경쟁 상대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올림픽 세계예선전과 국제예선전에서 본선 티켓을 따지 못할 경우, 마지막 단계인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에서 본선 티켓 1장을 놓고 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칠 가능성이 높다.

세계랭킹 16위인 태국은 이미 세계 강호 대열에 들어선 팀이다. 도쿄 올림픽을 겨냥해 공격진의 세대교체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7월 월드그랑프리 대회 1그룹에서 아차라폰(23세·178cm), 핌피차야(20세·178cm), 찻추온(19세·178cm) 등 어린 선수들이 주 공격수로 맹활약하며 세계 강호인 브라질, 이탈리아, 터키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기량과 조직력이 무르익을 3년 뒤에는 그 위력이 배가될 수 있다.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목표 의식과 실력' 증명한 승리

가시적인 결과물보다 더 중요한 성과는 따로 있다. 한국 여자배구가 국제 무대에서 여전히 경쟁력과 희망이 있다는 걸 선수들 스스로가 증명해 보였다는 점이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선수들은 올해 많은 국제대회 중에서 어느 대회가 가장 중요한 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점 또한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사실 배구협회와 프로 구단들은 그동안 세계선수권 대회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본선에 가도 상위권 성적을 거두기 어렵고, 대표팀 선수 차출로 국내 V리그 준비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대회의 일정이 겹치기라도 하면, 아시안게임에 집중하기 위해 세계선수권 경기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선수이자 해외 리그에서 많은 활동을 한 김연경(30세·192cm)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세계선수권에 출전해서 세계 강호들과 직접 겨뤄야만, 한국 배구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세계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연경은 그동안 언론과 인터뷰에서 세계선수권 예선전의 중요성을 줄기차게 강조해 왔다.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올해 대표팀에 처음 소집됐을 때부터 누누이 이번 세계선수권 아시아 예선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해 왔다"며 "다른 대회와 달리 '무조건'이라는 말이 들어갈 만큼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면서 진천선수촌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됐다. 대표팀의 모든 선수가 세계선수권의 중요성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의지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원동력이 되었음은 불문가지다.

김연경은 태국전에서 1세트 초반 크게 앞서다 9-9 동점으로 역전 위기에 몰리자 연속 득점을 폭발하며 다시 치고 나갔다. 만약, 역전을 당했다면 초반 흐름과 분위기가 넘어가면서 또다시 패배할 수도 있었다.

김연경은 공격을 성공할 때마다 더욱 강하게 선수들을 독려했다. 3세트 초반 승리를 예감하는 블로킹 성공 직후에는 고공 점프를 하며 강렬하게 포효했다. 다소 부진했던 김희진도 공격력이 크게 살아 났다. 선수 전원이 이번 대회에 임하는 목표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장신 유망주들과 인기 상승... 미래도 밝다

 '세계선수권 티켓'... 이번 대회에서 한국 1위, 태국 2위로 2018 세계선수권 본선 출전권을 획득했다.

'세계선수권 티켓'... 이번 대회에서 한국 1위, 태국 2위로 2018 세계선수권 본선 출전권을 획득했다. ⓒ 아시아배구연맹


여자배구는 아래로 내려가도 희망적인 요소가 많다. 현재 고교 1~2학년에 재학 중인 장신 유망주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기 때문이다. 여자배구 프로 구단과 고교 감독들이 이구동성으로 "지금이 여자배구 제7구단 창단의 최적기"라고 말할 정도다.

IBK기업은행 이정철 감독도 "내가 볼 때도 내년 드래프트에 나올 고교 선수들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좋고 유망주들이 많다"며 "내후년에 정호영(190cm)까지 합류한다면, 7년 전 IBK기업은행 창단 멤버들보다 훨씬 구성이 좋다"고 말했다.

여자배구를 둘러싼 여건도 최고조다. '김연경 효과'가 큰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최근 여자배구 인기는 1970~80년대 르네상스 시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월드그랑프리 대회의 구름 관중, 높은 TV 시청률, 포털 사이트와 SNS 등 온라인에서도 여자배구 관련 이슈가 프로야구 못지않는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대회가 열린 태국에서도 여자배구의 인기는 엄청났다. 특히, 한국-태국전에는 최다 관중인 7000명이 몰렸다. 만원 관중을 넘어 통로까지 꽉 찬 것이다.

김연경도 폭발한 '대한민국 배구협회'

여자배구가 거둔 성과가 빛나는 이유는 배구협회의 '무능·무책임'까지 뛰어넘은 결과였다는 점이다.

배구협회와 대표팀 감독도 이번 세계선수권 예선전이 가장 중요한 대회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대표팀 선수 구성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오히려 세터 실험을 하겠다는 부분이 더 도드라졌다.

코트의 야전사령관 격인 세터진을 올해 주 공격수들과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는 선수들로 선발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3일만 연습하고 출전했다. 조송화(25세·177cm)는 이번이 올해 첫 대표팀 경기였다. 백업 세터인 이고은(23세·170cm)도 김연경과 경기를 같이 해본 적이 없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조송화가 선발 주전 세터로 출전했지만, 공격수들과 토스 연결이 느리고 불안한 못한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대부분 경기에서 백업 세터인 이고은으로 교체됐다. 천만다행으로 이고은이 발 빠르고 다부진 경기 운영을 펼치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고은마저 부담감으로 흔들렸다면 가장 중요한 대회를 망칠 뻔했다. 조송화 입장에서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 다른 세터들과 비교해 너무도 짧은 준비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세터 시험을 하려면 다른 세계 강팀들처럼 일정이 주 단위로 펼쳐지는 월드그랑프리나 아시아선수권에서 집중적으로 했어야 했다. 이번 세계선수권 예선전은 한국 여자배구가 최상의 전력으로 국제대회에 임했을 때, 어느 정도의 조직력과 경기력이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어야 한다.

김연경도 26일 귀국 직후 인천국제공항에서 가진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그런 부분을 강하게 지적했다. 그는 "매 대회마다 새로운 세터와 경기를 했다"며 "공격수들이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조직력을 갖추기도 어려웠다. 이런 점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세계선수권 예선전에서 좋은 성적을 냈지만, 내용적으로 봤을 때는 아직까지 부족한 부분들이 많다"며 "내년에 중요한 국제대회를 대비해 더 준비하고 보완해야 한다"고 총평했다.

'선배'들이 일년 내내 대형사고... 배구 미래 '악영향'

한 방송사 배구 해설위원은 지난 8월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배구협회가 올해 초부터 국가대표팀의 1년 일정을 면밀히 분석하고, 중요한 대회와 비중이 떨어지는 대회를 구분해서 대표팀 선발을 이원화하는 등 구체적인 전략을 세웠어야 했다"라며 "그랬다면 주전 선수 혹사 논란과 유망주 발굴·육성을 외면한다는 비난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배구협회는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6월 말까지 무려 6개월 동안 집행부 해임과 파벌 싸움 등으로 허송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전 집행부 해임을 주도했던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대의원들이 남녀 국가대표 감독 선임 등을 주도했다. 배구협회 수장의 공백이 장기화되면서 국가대표팀 운영에 대한 주도면밀한 전략과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배구협회가 대표팀을 도와주기는커녕 발목을 붙잡는 사고들을 연발했다. 대표팀 엔트리를 다른 나라보다 적은 수로 선발한 것은 다반사였다. 여자배구 대표팀에게만 절반은 비즈니스석, 절반은 이코노미석을 타고 가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비난을 자초했다. 그 와중에 오한남 신임 회장은 강남 고급 호텔에서 취임식을 열어 기름을 부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 남녀 배구가 세계 흐름과 정반대로 가버렸다는 점이다. 올해 세계 강팀은 물론 아시아 강호들까지 도쿄 올림픽 출전권과 메달 획득을 목표로 철저하게 주전 선수 휴식과 유망주 발굴·육성에 초점을 맞춰 대표팀을 구성하고 운영했다.

그러나 한국 여자배구는 리우 올림픽 주전 멤버를 거의 그대로 풀가동했다. 올림픽을 3년 앞둔 올해가 유망주 발굴·육성에 가장 좋은 시기였음에도, 남녀 모두 나이 어린 장신 유망주를 국가대표팀에 발탁해 키워보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김연경이 언론 기자들 앞에서 배구협회를 신랄하게 공개 비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배구팬들은 물론 일반 네티즌까지 온라인 곳곳에서 '배구협회가 인물과 조직 등 모든 면에서 근원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배구협회 집행부와 대의원 등 지도부 인사들도 대부분 배구 선수 출신의 선배들이다. 그러나 올해 한국 배구의 '최대 골칫거리'는 대한민국 배구협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늦은 개선책 마련... 말보다 '실천'이 우선

배구협회와 프로배구를 관장하는 한국배구연맹(KOVO)은 최근 국가대표팀 지원과 운영 방안을 함께 마련해 보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KOVO  고위관계자는 27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 고교·대학 유망주 국가대표 상비군 발탁과 겨울철 특별훈련 시스템 도입은 그 필요성에 적극 동감한다"며 "배구협회에서 국가대표팀 지원과 운영에 관한 세부적인 대안을 보내오면, 조만간 만나서 논의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오한남 배구협회 회장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사실 이 같은 방안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얘기가 나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말만 무성하고 실천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고교·대학 유망주의 국가대표팀 발탁과 겨울철 특별훈련은 이미 지난 2016년 1월에 '사상 최초로' 시행까지 했던 방안이다. 당시 배구협회 지도부(회장 박승수) 인사들은 "한국 배구가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스피드 배구와 장신화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이를 주도했다.

그 결과 남자배구의 임동혁, 차지환, 한성정, 여자배구의 정호영 등 장신 유망주들이 성인 국가대표팀 훈련과 국제대회 출전 등을 거치면서 주목받는 차세대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배구협회가 지난 십여 년 동안 거의 유일하게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시작한 지 1년도 안돼 집행부 해임 등 혼란한 사태를 거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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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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