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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소설 <한 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이 되는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위안부 피해자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배경 설정만으로도 이 소설은 강한 흡인력과 설득력을 발휘한다. 피해자가 한 명만 남은 그 긴 시간 동안 결국 심판과 처벌, 사죄와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들은 존재 자체가 역사의 진실이자 잔혹한 범죄의 살아있는 증거다. 그녀들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진실의 매장, 단죄 가능성의 소멸을 뜻한다. 따라서 '한 명'은 한 개인이 아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전체가 된다.

이 소설은 읽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 정말로 한 명만 남기 전에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고발하는 그 어떤 텍스트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피맺힌 절규 "나도 피해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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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명> 표지 .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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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소녀들은 만주에서 생지옥을 만난다. 소설은 고통스러운 기억 저편에 봉인되어 있던 참혹하고 끔찍했던 그때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활자 하나 하나에 피가 맺혀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가슴을 뜯는 것처럼 아프다가 급기야 구역질이 올라와 입을 틀어막았다. 여러 번 책장을 덮었다.

"새 고무신도 주고, 흰 쌀밥도 배불리 먹여준다고 해서 따라간 데가 지옥일 줄 소녀들은 까맣게 몰랐다. 지옥에서는 쇠꾸대라고 부르던 쇠 손잡이가 달린 채찍으로, 시뻘겋게 달구어진 불쏘시개로, 쇠꼬챙이로, 칼로, 막 발로 소녀들을 때렸다. 벌겋게 달군 쇠막대를 소녀들의 질에 넣기도 했다. 질을 후빈 쇠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라붙어 있었다." (60쪽)

"군인들은 금방 버글버글 몰려와 위안소 마당에 노랗게 깔렸다. 마당에서부터 발목에 감는 각반을 풀고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렸다. 소녀들의 몸에는 보통 하루에 15명 정도가 다녀갔다. 일요일에는 50명도 넘게 다녀갔다...(중략)...군인들이 다녀갈 때마다 그녀는 식칼로 아래를 포 뜨는 것 같았다.

군인들이 열 명쯤 다녀가고 나면 포를 하도 떠서 아래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래는 무시로 바늘 들어갈 구멍도 없이 훌떡 뒤집어졌다. 소녀들은 자신들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 명수로 일요일인지 알았다. 그곳에는 달력도 없어서 소녀들은 날짜도, 요일도 몰랐다. 모든 날들은, 모르는 날들이었다. 모르는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들은 폭삭 늙었다." (87~88쪽)

소녀들은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매일 굶주리는 식구들의 입 하나를 덜고자 덜컥 만주행 열차를 탔다. 빨래터에서 납치되거나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억지로 끌려온 이들도 있었다.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열 두살 어린아이부터 열예닐곱살까지, 만주에 온 소녀들은 일본군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과 학대속에서 죽어간다.

소설 속 그녀는 열 세살의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7년을 만주 위안소에서 보냈다. 7년 동안 그녀의 몸을 거쳐간 군인이 무려 3만명이라고 한다. 아흔 세살의 백발 노인이 될 때까지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그녀.

어느날 텔레비전 뉴스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건강 상태가 위독하다는 뉴스를 보고 그 '한 명'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한 명'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생명을 부지하면서도 절대로 죽을 수 없다며 사력을 다해 버티는 중이다. "내가 죽으면 말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죽을 수 없다"는 '한 명'의 뉴스는 그녀의 기억을 호출한다.

머리로는 잊으려고 했으나 몸에 각인된 기억들. 그녀는 깨닫는다. "여전히 무섭다는 걸. 열 세살의 자신이 아직도 만주 막사에 있다는 걸".(258쪽) 지금껏 꾹 삼켜왔지만 그녀는 "나도 피해자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모든 걸 다 말하고, 그리고 나서 죽고 싶다"(152쪽)고 생각하면서.

소설을 뛰어넘는 참혹함, 이것이 진실이다

<녹색평론> 통권 156호 '위안부 제도로 본 국가, 전쟁, 남성주의'를 쓴 일본의 역사학자 다나카 노시유키는 위안부 제도는 인류사상 가장 대규모의 조직적인 그리고 폭력적인 여성 인신매매제도라고 규정한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다른 나라의 군 관리 매춘이나 성노예 제도에 비해 다섯 가지 점에서 특수성을 보인다고 했다.

① 지리적 광범위성
② 성척 착취를 당한 여성의 절대수가 많다는 사실
③ 성적 착취를 당한 여성의 다민족성
④ 여성에 대한 성폭력 정도가 심하고 장기간에 걸친 점
⑤ 군 지도부와 정부에 의한 통제 (육군성 및 외무성의 직접 관여)

위안부 제도는 강간과 성노예화가 극단적이고 강도높게 조직화되고 제도화됐다는 점, 군 최고 간부가 계획을 입안하고 국가 정부가 공모해 실시했다는 점, 장기간에 걸쳐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악한 학대를 자행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범죄행각이다. 다나카는 일본군이 그와 같은 대규모 성적 착취 체제를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것을 가능케 한 일본의 사회정치구조 및 사회가치체계의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 명>의 서사는 실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픽션이지만 논픽션이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여성을 상대로 저지른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폭력 범죄행각에 대한 피맺힌 고발이다. 끌려간 소녀들이 무려 20만명이다. 그 중 2만명만이 살아 돌아왔다고 추산한다.

소녀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던 야만의 시간, 그 야만의 시간보다 더 길었던 기만과 외면과 무기력의 시간들. 최근에 또 한 분의 위안부 피해자인 고 하상숙 할머니가 아무런 사과와 배상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제 36분만이 남았다. 정말 피해자가 단 한명만 남는 시간도 곧 올 것이다. 기만적인 위안부 합의를 폐기하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기필코 받아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덧붙이는 글 | <한 명>(김숨 지음 / 현대문학 펴냄 / 2016.8 / 13,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 명

김숨 지음, 현대문학(2016)


태그:#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제국주의,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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