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뽀글뽀글 파마 머리해 가지고 우리 딸 손잡고 나가면 다들 예쁘다고 했지. 엄마 안 닮고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쁘냐고 말이야. 다들 예쁘다고 했어. 미스 코리아 시키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 못 나갔어. 아까웠다니까."

우리 엄마 레퍼토리 중 하나인 '엄마 안 닮아 예쁜 딸' 이야기다. 예쁜 딸이면 그냥 예쁜 딸이지 왜 엄마를 안 닮아 예쁜 딸일까? 아빠를 많이 닮긴 했지만 특출난 미인형이 아닌 내가 예뻐 보인 건 우리 엄마가 고슴도치 엄마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자신을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자격지심이 담겨있다. 엄마는 '내가 못 생겨서'를 입에 달고 살았다. 늘 자신을 못 생겼다고 표현했던 엄마는 내가 아빠를 닮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하루는 집에 친척들이 모였다. 누군가 생일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내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내가 "엄마는 못 생겼어요"라고 답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엄마가 평소 자주 하던 말이라 들은 대로 답한 거 뿐인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엄마가 속상해 하는 게 느껴졌고 외삼촌에게 버르장머리 없다고 혼났다.

어린 나는 엄마를 예쁘거나 못 생겼다는 기준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직 내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을 생김새에 따라 의미 부여할 나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엄마지 않은가. 엄마는 엄마라는 말로 완전하다. 거기에 다른 수식어는 필요없다. 스스로를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엄마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친척들 앞에서 내뱉은 말은 엄마로부터 받은 반복 학습에 의한 결과였다. 우리 엄마는 왜 예쁜 엄마이길 바랐을까? 왜 엄마 역할에 외모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후 자라면서 여자는 외모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엄마 마음이 어떤 거였는지 이해했다.

이제 우리 엄마의 레퍼토리는 외손자로 이어진다. 하얀 얼굴에 눈웃음이 매력적인 동글이는(필자의 아들) 장동건 외모는 아니지만 아이답게 귀엽다. 동글이를 보고 사람들이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하면 우리 엄마는 예의 못생김에 관한 레퍼토리를 꺼낸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보고 왜 못생긴 날 닮았다고 해."

이렇게 말하면서도 엄마의 얼굴엔 함박꽃이 피어있다. 이제 예쁜 엄마에서 예쁜 할머니가 되길 바라는 우리 엄마와 그림책 <종이봉지 공주>을 함께 읽고 싶다.

<종이봉지 공주>
 <종이봉지 공주>
ⓒ 비룡소

관련사진보기

이 책은 보통의 옛 이야기가 위험에 처한 공주를 왕자가 구하러 가는 것과 달리 용이 데려간 왕자를 공주가 구하러 간다. 용이 왕자를 데려갈 때 성을 통째로 태워서 입고 있는 옷까지 타 버렸기 때문에 공주는 종이봉지를 쓴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왕자가 갇혀 있는 성에 도착한 공주는 꾀를 내어 용이 스스로 쓰러지게 만든다. 용을 물리치고 왕자를 만난 공주. 그러나 왕자는 머리는 헝클어진 채 불 구덩이에 그을려 숯검댕이가 된 종이봉지를 쓰고 있는 공주를 반기지 않는다. 가서 공주처럼 꾸미고 다시 오라고 한다. 이에 화가 난 공주는 왕자를 버리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떠난다.

이 그림책에서 공주는 남성처럼 힘이 세져서 용을 물리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용을 쓰러트린다. 용으로부터 자신을 구한 공주를 외모로만 평가하는 왕자를 그녀는 미련 없이 버린다. 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오직 외모인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종이봉지 공주> 이야기는 유쾌하고 통쾌하다.

다만, 이런 상황이 그림책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안타깝다. 현실에서는 우리 친정 엄마처럼 왕자가 다시 옷 입고 오라고 하면 그래야 되는 줄 아는, 외모 평가에 자유롭지 못한 공주들이 여전히 많다. 종이봉지 공주에게 다시 옷 입고 오라고 헛소리 하는 왕자 같은 사람은 더 많다.

지난 12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중로 의원은 강경화 외교부장관에게 백발이 아름답다고 했다. "시간이 없다"고 강 장관에게 빨리 단상에 오르기를 재촉한 뒤 김 의원은 "하얀머리 멋있습니다", "뭐 여자분들이 지금 백색 염색약이 다 떨어졌답니다", "그렇게 인기가 좋습니다. 저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중로 국민의당 의원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에 대한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강경화 외교부장관에게 흰 머리를 거론하며 “여자 분들이 백색 염색약이 다 떨어졌다. 그렇게 인기가 좋다. 저도 좋아한다”고 발언하고 있다.
▲ 김중로, 강경화 외교부장관 흰 머리 거론하며 "저도 좋아한다" 김중로 국민의당 의원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에 대한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강경화 외교부장관에게 흰 머리를 거론하며 “여자 분들이 백색 염색약이 다 떨어졌다. 그렇게 인기가 좋다. 저도 좋아한다”고 발언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에 대한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의원들의 질의하는 강경화 장관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에 대한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곧바로 다른 의원들이 사과하라고 항의해도 김 의원은 무시하고 시간이 없다며 질문을 마무리했다. 북한의 6차 핵실험과 사드 추가 배치에 따른 국가 안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은 상황에서 외교부 장관에게 국회의원이 한 이야기가 '백발이 아름답다'라니. 이 나라에서 여성은 외교부장관으로서 업무능력과 자질이 아닌 외모로 평가받아야 하는가보다.

여성 비하 발언을 사과하라는 이야기에 사태 파악하지 못하는 김중로 의원. 국가 안보 위기 속에서 어떠한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아닌, 하얀 머리가 멋있다고 외모에 대한 평가를 내린 김중로 의원을 우린 종이봉지 공주처럼 미련없이 버려야 한다.

남성은 자신의 분야에서 자질과 능력으로 평가되는데, 여성은 성별 요소로 분류되고 외모로 평가된다. 여류 소설가, 여류 시인, 여성 감독, 여성 운전자와 같은 단어들이 성차별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의 성별 요소만 부각되고 자질과 함량은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이 자아실현을 이루고 사회 가치를 실현하기는 힘들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에 초대 내각 여성 장관 30% 비율을 시작으로 임기 내 50%까지 채우겠다고 공약하며 여성 등용을 강조했다. 현재 이 공약은 잘 지켜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여성 장관 등용 후 여성을 여성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다.
첨부파일
1505405067625.jpg


종이 봉지 공주

로버트 먼치 지음, 김태희 옮김, 마이클 마첸코 그림, 비룡소(1998)


태그:#여성, #외모, #김중로, #강경화, #종이봉지공주
댓글1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