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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이프론 공동체 건물
▲ 텐이프론 공동체 건물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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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에 쉼표가 필요했다. 여행 8개월 차, 여기저기 일주일 만에 옮겨 다니며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지쳤다. 푸른 풀밭에서 양 떼가 뛰놀고, 사과나무가 가득한 영국의 농촌에서 우핑을 하며 한군데 오래 있었다. 우핑은 농장, 공동체 등에서 무료 숙식을 하는 대가로 일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영국 우핑 홈페이지를 검색하다 찾은 웨일스 지역의 텐이프론 공동체에 체류신청을 했고, 3주를 있었다. 텐이프론 공동체는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2~3시간 떨어지면 나오는 월시풀이라는 작은 도시 근처에 있다. 공동체는 2010년에 세워졌고, 7천 평 규모의 부지에 4인 가구 두 가족과 70대 노인 한 명이 같이 살고 있다. 70대 노인은 연금 생활자이고, 성인 남성 2명은 원목 가구 제작자와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성인 여성 2명은 집안일에 집중했다. 아이들은 대학생으로, 방학을 맞아 공동체에 돌아왔다.  

텐이프론 공동체는 영국식 슬로우 라이프를 경험하며 긴 여행 중 쉬어가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하루 근무 시간은 4시간이고, 작업 속도가 느렸다. 공동체 농장은 7천 평 부지가 무색하게 파, 토마토, 상추, 허브를 화단에 키우는 규모였다. 바로 길 건너편에는 수만 평 규모의 양 목장이 있지만, 텐이프론에서는 닭 11마리만 키웠다. 닭 11마리 중 5마리만 다 자란 산란계였고, 그 정도 양계장 규모로는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지 못했다. 시내 대형슈퍼마켓에서 대부분 식료품을 샀다. 대신 사과나무 6그루, 배나무 3그루가 있고 공동체 부지에 야생 자두, 야생 라즈베리 덤불이 많아서 과일은 자급했다.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주로 과일 수확, 잡초 제거를 했다. 공동체에 도착한 셋째 날, 사과 수확을 했다.우중충하기로 유명한 영국 날씨답지 않게, 푸른 하늘에 해가 반짝이는 기분 좋은 초가을 날씨였다.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를 옆에 끼고, 얼굴이 타지게 모자를 눌러 쓰고 사과밭에 갔다. 높은 곳에 있는 사과를 따려 팔을 쭉 뻗고, 까치발을 세우는 내 모습을 보고 공동체 회원 루스 할머니는 거듭 말했다.

"빨리 따려고 욕심 부리지 않아도 돼. 천천히 해. 높은 곳에 열린 사과 딸 때는 꼭 사다리 쓰고, 못할 것 같으면 안 따도 돼. 안 다치고 천천히 일하는 게 제일 중요해."

 공동체 회원 로스와 함께
 공동체 회원 로스와 함께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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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같이 체류한 독일에서 온 자원봉사자 페이는 일주일 동안 오후 내내 수확한 사과로 사과 주스 만드는 일을 했다. 잘 닦은 빨간 사과를 조각내 압착기에 넣고 누르면 옅은 분홍빛의 사과즙이 나왔다. 끓는 물에 소독한 말간 유리병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사과즙만 담아 지하 저장실에 보관해놓고 마셨다.

7천 평의 공동체 부지에 사과나무는 6그루뿐 이었지만, 그 정도 규모면 1년 내내 공동체 식구들이 사과를 통째로 먹고, 갈아서 주스로 먹고, 잘라서 사과 파이를 해 먹는다고 했다. 판매 목적이 아니니 벌레 먹은 사과, 멍든 사과까지 쉽게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다 먹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생산, 수확, 가공까지 내 눈으로 확인한 식품을 매일 먹고 마시며 텐이프론 공동체에서 긴 여행으로 지친 몸을 달랬다.

휴식 시간만 5번 이상... '여유'가 목표인 사람들

해가 뜨면 시작되는 보통 농촌 일과와 달리 텐이프론 공동체에서는 오전 10시에 일을 시작했고, 오후 4시 전에 일을 끝냈다.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영국식 슬로우 라이프의 핵심은 차 마시는 시간이었다. 2시간 일하고, 2시간 쉬었다. 차 마시는 시간은 하루에 5번 이상이었다. 아침 식사 후, 점심 먹기 전, 오후 노동 1시간 후, 오후 노동을 모두 마친 후, 저녁 식사 후에 차를 마셨다.

미국 뉴욕주에서 체류한 공동체에서는 노동시간이 하루 8시간 이상이었고, 중간 쉬는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 경험 때문에 텐이프론의 잦은 휴식시간, 짧은 업무시간이 낯설었다. 일이 끝나면 딱히 할 일도 없고, 누가 차로 데려다 주지 않으면 시내에 나갈 방법도 없었기에, 가끔 자원해서 1-2시간 정도 초과노동을 했다. 잡초 뽑고, 화단 정리하는 가벼운 노동이었다. 71살의 로스 할머니는 초과 노동까지 하는 내게 "넌 정말 에너지가 많구나. 근데 그렇게 열심히 일 안 해도 괜찮아. 우리도 하루에 5시간씩만 일하는데, 그 이상 일 시킬 생각 없어. 천천히, 차 마셔 가며 여유 있게 일해"라고 했다. 

텐이프론 공동체에서 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아름답고 소박한 유럽 농촌 마을에서 쉬고 가자고 계획했다. 막상 슬로우 라이프를 사니 초반에는 답답하고 지루했다. 나는 OCED 가입 국가 중 가장 길게 일하는 대한민국 출신이 아닌가. 한국에는 매일 저녁 수다 떨 시간도 없었고, 그럴 사람도 없었다. 때로는 술자리에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지만, 몸이 피곤하고 할 일이 많으면 모임이 시간 낭비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고객 전화 응답이 우선이었다.

텐이프론에서 일주일이 지나자 뜨거운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공동체 거실에 나와 사람들과 저녁마다 1-2시간씩 수다를 떠는 게 익숙해졌다. 차 마시는 시간에 빨간 장미꽃 무늬 머그잔 가득 잉글리쉬블랙퍼스트 티백을 우린 물과 유기농 두유를 섞은 담백하고 고소한 차를 마시며 공동체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공동체 마당에서 차를 마시는 로스
 공동체 마당에서 차를 마시는 로스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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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에도 쫓기지 않았고,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저녁 있는 삶'이었다. 공동체 설립 회원 웨인은 말했다.

"우린 거실에서 모여서 쉬는 시간이 중요해. 너도 보다시피, 사실 우리 공동체는 건물 페인트칠이며 지붕 마감부터 다시 해야 해. 텃밭 규모도 작아. 그렇지만 우린 천천히 능력만큼만 일할 거야. 빨리 일하고, 오래 일하면 우리가 왜 여기 사는지 잊어버리게 돼. 우린 빨리 일해서 부자가 되려고 여기 사는 게 아니라, 자연 가까이서 소박하게 살려고 모인 거야."

날이 좋으면 점심을 배불리 먹고 공동체 앞마당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따뜻한 초가을의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잡초 밭에 난생처음 보는 모양의 벌레가 있으면 아이처럼 쭈그려 앉아 한참 벌레를 관찰했다. 여유 있게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고,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남은 여행은 어떻게 하나 싶어 불안해 질 때마다, 뜨거운 물을 팔팔 끓여 잉글리쉬블랙퍼스트 차 한 잔을 마시며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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