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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新羅史)만이 아니라 전 조선의 반만년 역사를 통하여 가장 아름답게 살고 가장 아름답게 죽은 영웅이다.' -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34쪽 재인용

스물한 살의 순교자 이차돈(異次頓, 506~527). 이광수는 소설 <이차돈의 사>에서 이차돈을 위와 같이 평가했다.

"만약 불교가 자비롭고 옳은 종교라면 내 죽음에서 이적(異跡, 신의 힘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남)이 나타날 것"(<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29쪽)이라며 스스로 자신의 처형을 요구한 사람. 그의 목을 베자 붉은 피 대신 흰 젖이 솟아올랐다. 베어진 그의 머리는 금강산 산정까지 날아가 떨어졌고, 하늘은 어두워져 진동하는 땅 위로 꽃비가 떨어졌다(<삼국유사>). 그 죽음을 계기로 신라 23대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했다.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홍성식, 경북매일신문, 2017년)은 '이차돈의 순교'라는 1500년 전 사건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저자 홍성식은 경북매일신문 기획특집팀 기자. 자료 취재와 현장 답사, 인터뷰 등을 통해 그날의 사건에 다가갔다. 이차돈의 삶과 죽음, 당대 신라의 사회적 상황과 정치·경제학적 환경, 이데올로기로서 6세기 불교의 위상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극단적 방법을 통해 열어젖힌 '문 뒤의 세상'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표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표지
ⓒ 경북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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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스물한 살의 젊은 청년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닫힌 문'을 열려 했다는 사실은 '숭고함' 외의 키워드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차돈이 순교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열어젖힌 문 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198쪽

저자는 이차돈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던진다. 그는 왜 죽었을까, 그와 법흥왕의 관계는 어땠을까, 그의 목에서 솟았다는 '흰 젖'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신라인들은 그를 왜 그리워했을까, 그가 남긴 정신은 무엇일까. 저자가 그 수수께끼들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책 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그 여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료' 속으로 들어가는 역사의 여정. 저자는 이차돈의 순교가 기록된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의 문헌과 1935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이차돈의 사>, 그리고 여러 학자들의 논문을 뒤지며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또 다른 여정은 이차돈의 죽음과 관련된 실제 장소들을 답사한 현장의 여정이다. 저자는 이차돈의 베어진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 대숲,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숲인 천경림 안에 지어졌다는 흥륜사 절터, 이차돈의 제사를 올렸다는 소금강산 정상, 왕들의 능, 이차돈 순교비가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등을 직접 찾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렸다.

'법흥왕과 이차돈은 귀족과 나눠 가진 권력을 왕에게로 일원화해 신라의 통치 체제를 획기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를 뛰어넘어 정치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역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상부 구조'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불교였다.' -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201~203쪽

역사 연표 속 '한 줄'을 풍성한 이야기로 부활시킨 책

이 책을 이루고 있는 글들은 지금껏 많이 봐온 어떤 '정형'에 갇혀 있지 않다. 분명 '역사서'로 분류된 책이지만 역사적 탐구와 분석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답사기처럼 역사적 현장의 견문이나 감상이 두드러진 대목도 있지만 그것만 읽어서는 안 될 글이다. 크게 열 꼭지로 나눠지는 각각의 글들은 역사서의 서술도 아니고, 답사기의 서술도 아닌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됐다. 굳이 분류하자면 '역사 에세이' 정도 될까.

이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다. 독자들이 부담 없는 역사 이야기로 편하게 읽어준다면 '성공'이겠다. 특히 224쪽의 비교적 적은 분량에, '글 반 사진 반'인 특징까지 이 같은 장점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차돈의 순교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망라하는 깊이 있는 역사서, 또는 역사적인 지식 위에 여정과 감상이 강조된 답사기를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어느 한 쪽으로는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드디어 한국 사회도 이차돈의 순교라는 민족사의 절대적 순간에 입장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를 갖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17쪽

문학평론가 이경재 숭실대 교수가 쓴 '추천의 글' 마지막 문장이다.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은 역사 연표 속 "이차돈의 순교 - 법흥왕 불교 공인"이라는 한 줄로만 남아 있는 사건을 풍성한 이야기로 부활시킨 책이다. 이경재 교수의 말처럼 "하나의 열쇠"가 될 만한 자격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민족사의 절대적 순간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열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점 또한 분명히 느끼게 한다. 이 하나의 열쇠가 하나의 문을 열고, 또 우리 앞에 등장할 새로운 문을 향한 걸음에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 이차돈 순교와 불교 왕국의 태동

홍성식 지음, 경북매일신문(2017)


태그:#서라벌꽃비내리던날, #이차돈, #법흥왕, #홍성식,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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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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