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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들투어> 중 한 장면
 <뭔들투어> 중 한 장면
ⓒ U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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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도 되죠? 안 되죠?"
(경리가 강남의 성대모사를 하자)

"죽도록 패라 그러면 팰 수 있어요"
(제작진이 '러브 라인' 생길 수 있냐고 묻자)

"내가 언젠가 한국에서 때린다... 언젠가 한국에서 때린다"
(경리가 강남의 전화번호를 저장 안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너 이런 걸로 맞아봤어?
(경리가 "오빠 나 좋아하지"라고 묻자 돌아온 대답)

강남은 경리를 4번이나 '때릴 수 있다'고 말했다.

네이버TV에 올라온 웹 예능 프로그램 <글로벌 워킹 데이-뭔들 투어(총 10회)>에 출연한 강남의 발언이 논란이다. 함께 출연한 나인뮤지스 경리에게 '팬다', '때린다'는 말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강남의 '때린다'식 발언들은 화기애애하고 장난스럽게 대화가 진행되던 중에 나왔다. 어쩌면 "너 죽는다"와 같은 친구들끼리의 농담처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강남 발언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무리 장난이라도 '남성이 갖는 신체적 우위'를 계속해서 드러낸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동등한 입장에서의 장난이지만, '때린다'는 건 물리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실제로 경리에게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 강남이 농담으로라도 위와 같이 말하는 것은 명백한 협박이자, 자신의 젠더권력을 재확인하는 작업이다.

'때릴 수도 있다'는 말에 대해 경리가 반발하자 강남은 "남동생이에요"라고 말한다. 과연 강남이 제 또래의 남자 연예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경리는 강남에게 "죽도록 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성이 자신보다 어린 여성에게만 할 수 있는 '농담'이라면, 그건 자신이 가진 힘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는 '폭력'에 더 가까운 말이다.

'데이트 폭력'에 경각심 없는 예능

<뭔들투어>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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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들투어>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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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들투어>는 경리와 강남의 '썸'이나 '러브 라인'을 강조한다. 둘은 손도 살짝 잡고, '여보'라는 애칭을 쓰거나, 결혼하자는 말까지 나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여행을 간다는 설정에서 이런 콘셉트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가상 연인'끼리 만나는데, '때린다' '팬다'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런데 제작진은 그 상황을편집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막에 'ㅋㅋㅋ'와 웃음소리가 나는 배경음을 넣는다. 심지어 강남이 경리를 남자처럼 대하고 있다며 '브로맨스'라는 식으로 포장한다.

"오빠 여자 때리는 남자였어?"라는 경리의 말에 "요즘은 여자랑 남자랑 차별하면 안돼"라고 답한 강남의 말은 제작진의 안일함과 궤를 같이 한다. 실제 존재하는 성차나 젠더간의 권력관계는 무시하고, 여성과 남성을 인위적으로 똑같은 링 위에 올려놓으면서 폭력적인 발언을 정당화시키는 행태다.

강남의 언행과 그걸 바라보는 제작진의 시선은, 숱하게 일어나는 데이트폭력과 데이트폭력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도 비슷하다. 형사정책연구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성인 남성의 약 80%가 1번 이상은 데이트폭력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중 심리·정서적 폭력을 저지른 남성도 36.6%에 달했다. <뭔들투어>에서 강남이 때릴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은 심리적 폭력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런걸 '농담' 혹은 '사랑해서 그런다'며 웃으면 넘어간다. 경각심이 높지 않은 것이다.

'경리가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남이 왜 폭력이라고 규정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데이트관계는 둘이 관계를 통해 형성된 사적인 영역이라 볼 수 있지만 이 관계 내에 폭력이 개입되었을 때도 '사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가"(한국여성의전화 데이트/관계/폭력 포럼 발제문 중)라며 폭력은 사적인 영역에서 다루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폭력은 개인이 전적으로 그것이 폭력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언론에서는 여성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극소수의 데이트폭력 사례만 보도된다. 그러나 데이트폭력은 "짧은 치마 입지 마" 식의 통제 행동까지 포함하며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 <뭔들투어>가 강남의 행동을 비추는 방식은 이런 일상적 데이트폭력을 '농담'이나 '웃음코드'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강남이 경리의 외모를 깎아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감정폭력(가스라이팅)의 초기 형태에 해당한다.

강남 : "한국 사람들은 널 보고 예쁘다고 말하잖아. 기사 많이 나오고 그러잖아."
경리 : "내가 여기 있음 오징어라고?"
강남 : "여기 사람들은 널 어떻게 볼까. 물어보고 싶다."

강남은 길가던 한 이탈리아 여성을 잡고, "네 눈엔 경리가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본다. 예쁘다고 대답하니 강남은 "나는 경리보다 네가 더 예쁘다, 남자 친구 있느냐"고 묻는다. 이런 행동에 경리는 당황한다.

<뭔들투어> 중 한 장면
 <뭔들투어>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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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장면. 경리와 강남이 일하던 카페에서 한 남자 노인이 경리에게 호감을 표시하자 강남은 "벨라?(예쁘냐)"라고 묻고, 남자 노인이 "원더풀, 낫 벨라, 베리베리"라며 극찬을 한다. 그러자 강남은 "얘 그정도는 아니에요. 할아버지"라고 대꾸한다. 한편에서는 '연애'나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속칭 '외모 후려치기'를 하고 있다. 전형적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지배하에 놓으려는 '데이트 내 감정 폭력'의 일부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방송이 '데이트'를 묘사하는 방법

대중 매체의 파급력은 크다. 강남의 언어폭력이 '장난'이나 '농담'으로, 데이트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사회에 수용되면, 그걸 보는 남성들은 유머랍시고 '때린다'와 같은 언어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더구나 강남이 출연한 프로그램이 리얼리티 예능이라는 점을 감안하다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데이트폭력을 '연애'의 일부분으로 여기도록 정당화시키는 데 일조할 가능성이 높다.

흔히 보는 드라마 속에서도 계속 데이트폭력이 발생한다. 강제로 키스하거나, 동의없이 현관문을 열고, 멋대로 집 안의 물건을 집어 던진다. 폭력적인 남자들은 '상남자'처럼 그려지며, 강제력을 써서 관계를 이끌어나가는 장면은 로맨틱하게 그려진다.

SBS <우리 갑순이> 속 한 장면
 SBS <우리 갑순이> 속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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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성평등위원회 오픈세미나 연사 이상씨는 이와 같은 대중매체 속 데이트폭력에 대해 "남성 중심의 지배 담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데이트 폭력신을) 로맨스화하는 대중매체는 연애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를 공적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이 정도면 범죄... 드라마 속 최악의 데이트 폭력 네 장면)

경기지방경찰청은 40일간 데이트폭력 피해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해 109명을 입건했는데, 이 중 104명이 남자였다고 한다. 실제 남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데이트폭력의 가해자인 상황이다. 오늘도 또 어떤 여성들은 가장 친근한 사람에게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러브 라인'을 만든 여성 출연자에게 남성 출연자가 '때린다'는 말을 한 게, 어떻게 '데이트 폭력'을 보여준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연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데이트폭력과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예민하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여성 출연자를 두고 '팬다', '때린다'고 말하는 장면을 두 번 다시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보고 싶지 않다.


태그:#데이트폭력, #강남, #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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