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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간 근로계약서 2장은 그대로 빈칸만 남긴 채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가져간 근로계약서 2장은 그대로 빈칸만 남긴 채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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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아가씨, 술 한잔 살게" 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사장님, 우리 근로계약서 써야 하지 않을까요?"
사장 : "왜? 나 그런 거 써본 적 없는데…. 지금까지 그냥 다 했어도 큰 문제 없었어."
: (흠…. 안 돼. 한 번 더 밀어붙여보자. 숨 한 번 크게 쉬고) "그래도 써놓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사장 : "그냥, 서로 믿고 하는 거지. 그런 거 안 써도 괜찮아."
: "아…. 네!"

결국 가져간 근로계약서 두 장은 빈칸만 남긴 채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그냥 한 번 가봐야지' 해서 찾아간 호프집. 냉큼 내일부터 일하자는 이야기에 그 자리에서 급여는 시간당 얼마인지, 휴무는 어떻게 되는지 서로 이야기 나누긴 했다. 그래도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 게 좋겠다 싶어 근로계약서를 출력해서 갔더랬다.

그런데 막상 가방 속에 있는 근로계약서를 꺼내는 건 쉽지 않았다. 열 번 정도 가방 속에 손을 넣었다 뺐다…. 그러다 용기를 내 내민 근로계약서. "그냥 서로 믿고 하면 되는 거지 "라는 사장님의 말에 결국 근로계약서 작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동안 난 주장이 확실한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활동하는 여성단체 회의 시간이나 다른 기관과의 회의에서도 의견을 제시하는 데 거침 없었고, 서로 의견이 다른 경우에는 그와 관련해 논쟁하는 것에도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사장님 앞에서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런 내가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다.

'야…. 그렇게 당당하던 미리내는 어디 간 거야? 그냥 당당하게 너의 권리에 대해 주장해야지. 그 주장 안 받아들여지면 다른 곳 찾으면 되잖아. 그것도 못하면서 무슨 여성단체 활동가라고. 부끄럽다, 부끄러워.'

청년유니온의 약속문
 청년유니온의 약속문
ⓒ 청년유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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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왜 말 못했는지..." 나와 닮은 그들

이런 온갖 실망감과 부끄러움에 시달리던 찰나, 그런 내 모습이 왠지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때, 왜 싫다고 말하지 못했는지 제 스스로가 너무 미웠어요. 그때 싫다고, 이건 성희롱이라고 당당하게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아마도 이렇게 오래도록 시달리진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직장 내 성희롱으로 몇 달 혹은 몇 년간을 시달리다 겨우 용기를 내 상담소를 찾은 그녀들의 한결같았던 말들….

"그냥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몰랐네. 그럼 그때 이야기하지 그랬어."

가해자들의 대답은 또 이렇게나 한결같았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그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까지 해결해야 할 업무를 생각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한 그녀.

"어, 어제 입은 옷이랑 똑같네. 어제 어디서 잔거야? 좀 피곤해 보이는 걸 보니 어젯밤 남자친구랑 뜨거운 밤이었나 보네?"

동료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과장이 큰소리로 그녀를 향해 이야기한다. 함께 있던 남자 동료들은 키득키득 대고, 다른 여자 동료들은 '저 진상 또 저러네' 하는 표정이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불쾌하고 수치심이 밀려오지만 막상 그 자리에서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말을 꺼내기엔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직속상관. 그 자리에서 문제제기를 해봤자 '농담한 걸 가지고 왜 그리 예민하게 굴어. 그래서 사회생활 하겠어? 사회생활하려면 그런 말도 다 웃으며 넘겨야 하는 거야'라고 말할 께 뻔하다. 결국 그녀는 '예민하고 까칠하며 사회생활 잘 못하는 사람'으로 몰릴 게 뻔하다.

그녀는 평화로운 부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 그게 다른 동료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냥 꾸욱 참고 만다.

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길 여러 차례, 꾸욱 참고 참는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은 퇴사할 각오를 한 그녀가 문제제기를 하니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때' 바로 문제제기 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잘 참다가 왜 이제 와서…."

왜일까? 왜 그녀들은 지금까지 잘 참아왔으니 그냥 참으면 될 일이지 이제 와서야 문제제기를 하는 걸까.

"모든 권력은 모세혈관처럼 미시적으로 뻗어있다." - 미셸 푸코

'직장'은 입사하는 순간 '나'란 존재는 이미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판'에 놓인다. 가로줄과 세로줄로 촘촘하게 엮여 있는 권력 관계의 격자 모양 판. 그녀가 사회 초년생 20대 초반이라면 '나이'라는 가로줄에서는 아래쪽. 그녀가 여성이라면 '성별'이라는 세로줄에선 아래쪽. 그녀가 졸업한 대학이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이라면 '학력'이라는 가로줄에서도 아래쪽. 그녀가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라면 '계급'이라는 세로줄에서도 맨 아래쪽.

그렇게 권력관계의 '판'에 그녀의 존재는 저 맨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 '판' 속 위치는 아마도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를 향해 문제 제기한다는 것은 수십 번의 고심과 용기를 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위계는 촘촘하고, 교묘하게 짜여 있는 것이니….

왜일까? 왜 그녀들은 지금까지 잘 참아왔으니 그냥 참으면 될 일이지 이제 와서야 문제제기를 하는 걸까.
 왜일까? 왜 그녀들은 지금까지 잘 참아왔으니 그냥 참으면 될 일이지 이제 와서야 문제제기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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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변화가 촘촘한 권력의 판을 깬다

흔히 성희롱 사건이 직장 내에서 발생하면 사람들은 피해자·가해자를 나누고 그 사건을 단순히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 징계위원회를 열어 사건을 파악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하면 그 사건은 끝난다(물론 가해자 징계가 제대로 이뤄지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는 남고, 결국은 피해자는 떠난다'는 게 정설처럼 돼버렸으니).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조직의 문화를 검토하고 바꿔가는 일이다. 조직 내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문화는 없는지, 그 조직의 구성원들이 함께 이야기 나누고 문화를 바꾸기 위해 작은 실천을 하는 것 말이다.

서로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인사가 "오늘은 왜 화장 안 했어? 아파 보이는데?"와 같이 외모에 대한 말이었다고 하면, 다른 인사말을 함께 고민해보거나 농담처럼 오가던 성차별적인 말들에 대해 바로 문제제기할 수 있게 약속을 함께 정해보는 거다(어떤 단체의 경우 구성원들이 평등 약속문을 함께 토론해서 만들고 모든 회의나 모임 전에 그 약속문을 구성원들이 함께 낭독한다).

이런 소소한 변화들이 쌓이고 쌓일 때 그 직장의 문화가 변할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이미 늦다.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이미 늦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제도로 강제하고,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우리 단체의 회의에서, 다른 단체들과의 외부 회의에서 거침없이 나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나란 존재가 나이나 직급·성별로 위치 매겨지지 않는다는 걸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나의 의견은 온전히 '미리내'라는 존재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가 닿을 거라는 믿음!

에고, 그건 그렇고, 이제 나는 우리 사장님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야 할지가 큰 숙제로 남았다. 스멀스멀 이 공간에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갈 계획을 좀 짜봐야겠다. 그리고 기필코, 근로계약서 쓰고 말리라. 흠, 흠….


태그:#페미니스트, #아르바이트 , #근로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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