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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내게 '여성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곤 한다. 사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여성학 만큼이나 학문적 영토가 유동적이고 확장하는 힘이 큰 학제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인식론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정상'으로 간주되지만 사실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팽배한 사회를 당사자의 시선을 통해 해석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주요 과제이니 말이다. 그래서 여성학의 렌즈를 통해 분석하지 못할 분야는 없다. 이미 긴 시간 동안 정신분석학, 정치학, 경제학 등의 분야에서 관련한 활동이 수행되어 왔고 연구들이 축적되어 있다. 심지어 페미니즘과 정말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여성주의적 분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예술 쪽에서도 다르지 않아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적 비평을 하거나 혹은 여성주의에 기반한 작품 활동을 벌여왔다. 대표적인 분야로는 미술이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의 경우 1971년 린다 노클린 교수가 '왜 이제껏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었는가?'라는 글을 발표하며 여성주의 미술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 글을 통해 그녀는 여성이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제도의 장벽에 막혀 인상적인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지적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이들에 대한 발굴과 조명 작업이 나란히 수행되기도 했다. 여기에 70년대는 미국에서 처음 여성 미술인 단체가 속속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 사회에도 여성주의 미술이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던 때가 있었을까? 대부분의 국내 미술사를 연구한 문헌들은 86년 민족미술협의회 내부에 '여성미술분과'가 출범된 것을 시작점으로 짚곤 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당시 민미협이 몸을 담았던 민중미술계의 가부장성과 여성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 경각심을 느끼고 조직을 출범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88년도에는 미술을 통해 여성문제를 탐구한다는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예 이름을 '여성미술연구회'로 개칭하고 전시와 다른 집단과의 연대를 통해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을 개진시켜 나가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활동이 지나치게 민중미술의 형식에 얽매여 있었으며 그만큼 한계가 명확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여성주의 미술의 첫 물꼬를 텃다는 점은 대부분의 문헌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흐름을 이어 90년대에는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 미술 담론이 하나의 유행으로 부상 했으며, 여성주의 미술을 기치로 한 몇 건의 대형 전시회가 개최되는 성과를 남겼다.

사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알아 차렸을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여성주의 미술이 활발하던 시기는 모두 페미니즘 운동이 굵직한 도약을 이뤄내던 때와 겹친다. 가령 70년대의 미국은 여성주의 제 2의 물결이 등장한지 얼마되지 않은 곳이였으며 한국에선 80년대에 한국여성민우회와 같이 여성 운동을 기치로 내건 시민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2016년 노뉴워크 프로젝트의 전시 모습
 2016년 노뉴워크 프로젝트의 전시 모습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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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다시 페미니즘과 예술을 말하다

그렇다면 2017년인 지금은 어떨까. 2015년 메르스 갤러리에서의 미러링 발화와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로 페미니즘은 또 다시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로 급부상 했다. 또한 이후 '#OOO_내_성폭력_사건' 키워드 운동이 등장해 사회 각 분야의 젠더 폭력을 조명하기도 했다. 미술계도 이 바람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미술계_내_성폭력_사건이' 운동이 등장하기도 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성 전시기획자 모임인 'Gathering A'와 '여성예술인연대(AWA)'가 발족되기도 했다. 여기에 이 같은 문제 의식은 또한 개별 작가들의 작품 활동에서 나타나기도 했는데, 가령 여전히 되풀이 되는 여성에 관한 문제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을 목표로한 '노뉴워크 프로젝트'는 작년에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러한 움직임이 산발적이고 국지적인 수준에서 그치리라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80년대와 90년대, 선배 여성주의 미술가들이 그런 것처럼 모여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활동한다면 얼마든지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뜻깊은 행사 하나가 개최를 앞두고 있다. 바로 오는 7월 8일부터 8월 11일까지 열릴 <A Research on Feminist Art Now> 이야기다.

이 행사는 시각 예술 분야 내 페미니즘 미술에 관한 시선과 시점을 공유하는 리서치와 아카이브 프로젝트로서 동시대 활동 중인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혹은 그러한 성향을 가진 작업을 패널과 함께 소개하고,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미술계 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참여가 확정된 작가들만 무려 60여 명에 이를 정도의 대형 행사다.

<A Research on Feminist Art Now>의 행사 포스터
 <A Research on Feminist Art Now>의 행사 포스터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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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search on Feminist Art Now>가 지닌 의의

여성주의 미술을 주제로 한 대형 행사가 간만에 열리는 점도 고무적이지만 <A Research on Feminist Art Now>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단순히 모여서 서로의 작업을 소개하고 교류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행사에 참가한 작가들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 다시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의 그룹으로 나뉘어 페미니즘 해석에 있어 각 세대가 지닌 공통점과 차별점을 논의하는 것도 목표로 한다. 나는 여성주의 예술가로서 서로가 함께 발디딘 지점을 공유함과 동시에 그룹 내부의 차이 또한 확인 하는 행위는 연대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반영하듯 이번 행사는 현재의 페미니즘 미술이 어디까지 왔나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넘어서 구성원들 사이의 지속적인 채널 구축까지도 목표로 하고 있다.

<A Research on Feminist Art Now>는 1970~80년대 이후 등장한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맥락은 2017 년 현재 어디쯤 닿아있는지 확인하는 것 또한 행사의 목적으로 두고 있다. 또한 이후 구성될 네트워크를 통해 50대 이상의 페미니즘 예술가들과 연결 고리를 만들겠다는 행사의 포부를 보고 있으면, 이들이 단순히 세대간의 소통을 넘어서서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계보를 복원하고 그 속에 지금의 활동들을 연결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00년대에 공백기가 있었지만 80년대와 90년대 이후 다시 한번 여성주의의 기치 아래에 예술가들이 모인다. 시간과 공간, 세대를 가로질러 이들은 어떻게 다시 연결되고 어떤 흐름을 만들어 낼까. 벌써부터 기대하는 바가 크다.


태그:#페미니즘, #예술, #A RESEARCH ON FEMINIST, #여성주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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