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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성소수자의 존재가 낯선 2017년 대한민국. '우리 회사에 성소수자가 다닌다(퀴어인컴퍼니)'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성소수자의 일상, 성소수자들의 평범하고도 다채로운 삶과 생각을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일반 독자들에게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성소수자 당사자에게는 여러 직업군에 종사하는 '우리'를 보여줍니다. '우리 회사에 성소수자가 다닌다'는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기획입니다. [편집자말]
한희가 사용 중인 컴퓨터. 퀴어, 페미니스트 관련 스티커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한희가 사용 중인 컴퓨터. 퀴어, 페미니스트 관련 스티커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 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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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공대에 입학했다. 남자의 모습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이번에도 남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점점 남자로 '연기'하며 살기 힘들었다. 변호사 박한희씨 이야기다.

"남자 정장을 입고 회사생활을 2년 하니까 생활하는 거 자체가 힘들기도 했고, 둘째로는 내가 혹시라도 회사에서 아우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을 본인 동의 없이 밝히는 것)을 당해서 어떤 불이익을 겪어도 사기업에선 잘리면 그만이니까 전문 자격증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왕 전문직 공부할 거면 저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찾아보자 싶었고 정신과 의사랑 변호사 두 가지를 생각하다가 의대는 위계도 심하고 변호사가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아서 로스쿨을 택했죠. 성소수자들 중에 저 같은 이유로 로스쿨에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인터뷰 당시 한희는 변호사시험 합격 결과를 기다리는 로스쿨 졸업생 신분이었다. 지금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의 일자리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생각해보라. 크로스드레서(사회적으로 다른 성별이 입는 옷을 착용하는 행위)가 아닌 남성이 매일 치마를 입고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출근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부치(Butch, 복장·말투·몸짓 등에서 소위 남성적인 방식으로 성별 표현을 하고 이를 편안하게 느끼는 레즈비언)가 아닌 여성이 짧은 머리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야 한다면? 게다가 볼일을 볼 때마다 남자 화장실로 가야 한다면 그의 심정이 어떨까. 한희는 트랜스젠더들이 회사 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화장실 이용과 복장 규정이라고 했다.

또한 트랜스젠더들은 구직 과정에서부터 차별을 겪는다. 트랜지션(성전환 시술이나 수술을 받는 것)을 한다고 해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바뀌지 않는 한 채용과정에서 '왜 주민등록번호와 생김새가 다르냐'며 차별받고, 결국 탈락한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신분증이 필요 없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요. 트랜스여성 중에 유흥업 종사자가 많은 이유도 여성으로 대우받으며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에요. 아니면 입사할 때부터 커밍아웃하고 입사하거나, 속이고 입사해서 호르몬을 맞기 시작하는 거죠. 주중엔 회사원으로 살고 주말엔 커뮤니티에 놀러 다니고요. 나이 있으신 분 중엔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내가 사장이니까 눈치를 안 봐도 되는 게 큰 장점이죠."

지금 이 순간에도 트랜스젠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채용 과정에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2014)에 따르면 한 트랜스젠더는 구직 활동 중 자기소개서에 트랜스젠더임을 밝혔는데 면접을 보러 갔더니 면접관이 "트랜스젠더가 뭔지 궁금해서 불러봤다"라고 말하고 떨어뜨린 경우도 있다. 또 업계가 좁은 경우엔 아우팅을 시켜 이직하지 못하게 막는 경우도 있다.

"자기 성별의 화장실을 못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다른 직원들이 불편해하니까 우리 층, 우리 건물의 화장실은 쓰지 말라고 대놓고 말하는 회사가 많아요. 1박 2일 사내워크숍을 갈 때도 그래요. 남자 방, 여자 방으로 나누는데 트랜스여성을 남자 방에 넣는다거나 하는 식이죠."

커밍아웃을 앞둔 트랜스젠더의 딜레마

"저 같은 경우 처음 커밍아웃하려고 할 때 고민한 게 있어요. 보통 트랜스젠더들은 어릴 때 성별을 정정하고 커밍아웃하면 성별정정 전의 경력은 다 지워버려요. 수술과 성별 정정을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죠. 처음부터 시스젠더(신체적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 여자였던 것처럼 혹은 남자였던 것처럼요.

저는 28살 때까지 회사에 다니다가 29살에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제가 그렇게 하면 30살에 경력 없는 여자가 되는 거예요. 그건 굶어 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니까 결국 그렇게는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하게 됐죠."

트랜스젠더 대부분은 20대 때 첫 커밍아웃을 한다. 트랜지션을 위한 비용을 모으는 데 평균적으로 2~3년이 필요하다. 트랜지션 이후 과거를 지우는 삶을 택한다면 경력단절을 겪고, 과거를 지우지 않고 트랜스젠더임을 밝히면 차별이 돌아온다.

게다가 트랜스여성은 트랜스남성보다 외모 기준이 더 크게 작용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쉽게, 자주 성적 대상화되기 때문이다. 한희는 "트랜스 여성의 외모가 예쁠 경우 '진짜 여자 같다' '여자보다 더 예쁘다'라는 말을 듣는다"며 "심지어 트랜지션 후의 외모가 예쁘지 않다면 '어떻게 저러면서 여자라고 할 수 있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4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3.8여성의 날 기념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답게 쭉쭉간다'에서 발언하고 있는 한희의 모습.
 지난 3월 4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3.8여성의 날 기념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답게 쭉쭉간다'에서 발언하고 있는 한희의 모습.
ⓒ 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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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볼 때 쟤는 트랜스여성이니까 남자 좋아하겠지, 쟤는 트랜스남성이니까 여자 좋아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거꾸로 '동성애를 하니까 트랜지션 한 거 아냐?'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성이든 남성이든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성적 지향(Sexeul Orientation)'이고, 자신의 성별이 여성, 남성인지 혹은 젠더퀴어(여성도 남성도 아닌 다른 성별 정체성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인지 생각하는 건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에요. 이 두 개가 일치할 필요는 없죠."

국내에서 트랜스젠더의 의미는 보통 의학적 용어인 MTF(Male To Female), FTM(Female To Male)으로 쓰인다. 하지만 넓게 보면 성별정정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트랜스여성과 남성, 젠더퀴어(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성 정체성)까지 트랜스젠더에 포함된다. 한희는 "외국에선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젠더퀴어까지 포함하는 큰 의미로 쓰이는 게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또 모든 트랜스젠더가 성별 정정 수술을 받는 것도 아니다. 트랜스여성을 예로 들자면 방송인 하리수씨처럼 성별 정정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고 수술은 하지 않고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만 투여받는 경우도 있다. 또 호르몬 등 의학적 조치를 전혀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국내 트랜스여성 사례 중에는 성별 정정을 다 해서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까지 1에서 2로 바꿨는데 직장동료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경우도 있다. 남자일 때와 같이 짧은 머리에, 입던 옷 그대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 한희에게 조심스럽게 트랜지션을 앞둔 트랜스젠더들에게 조언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한희는 "트랜지션을 앞둔 사람에겐 그게 전부다. 지금 당장 트랜지션을 하지 않으면 화장실 갈 때마다 죽을 것 같고, 내 몸을 보는 게 싫어서 불을 끈 상태로 샤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제가 감히 조언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너, 트랜지션 이후의 일도 생각해'라는 건 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어요. 내가 트랜지션을 앞둔 사람에게 조언하기보다는 그냥 트랜지션을 하고 잘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계속 드러내고 얘기하면 10대들도 '아 나도 저렇게 살 수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트랜스젠더 욕구조사 질문 중에 내 기대수명을 묻는 게 있었어요. 한 20대 응답자가 자신의 기대 수명을 40세 미만으로 적었더라고요. 그를 그렇게 만든 건 40대, 50대 트랜스젠더 롤모델이 없기 때문이니까, 내가 오래오래,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한희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국내 최초 트랜스젠더 변호사' 타이틀로 언론 인터뷰를 하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다. 하지만 한희는 '국내 최초' 트랜스젠더라는 수식이 불편하다고 했다. 자신이 국내 최초로 '알려진' 트랜스젠더 변호사이지,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활동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변호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희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돋보이기보다는 '퀴어인컴퍼니'라는 취지에 맞게 지금 이 순간에도 직장 내 차별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트랜스젠더 직장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17년 3월 15일 박한희님과의 대면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퀴어인컴퍼니’ 인터뷰 연재의 두번째 편입니다. 이 글은 저자의 블로그(https://brunch.co.kr/@seedinearth)에도 중복 게재됐습니다.



태그:#트랜스젠더, #성소수자, #퀴어, #인권변호사, #퀴어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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