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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그래 살아보자! 그래, 다시 일어서자!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인생에 지친 이웃에게 용기를 나눠준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등불을 켠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공동체를 가꾼다. 가난하고 슬픈 이웃들을 위로하며 사랑을 베푼다. 이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은 월 1회 연재한다. [편집자말]
비가비 명창 임진택.
 비가비 명창 임진택.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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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고등학교에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이면 한 자리했어야 맞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아들이 판검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고작 된 것은 옥살이하는 아들이었다. 그것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반국가사범이니 어머니의 가슴에 그냥 못질이 아니라 대못질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정치범 경력을 쌓으며 그날은 오고야 말리라 벼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포석을 깔았으면 빛나는 학벌에 걸 맞는 한 자리쯤은 너끈히 차지했을 것인데 그것도 아니다.

그가 된 것은 천하의 광대였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의 오적(五賊)들을 통렬하게 풍자하며 비판했다. 판을 잡고 뒤 흔들며 좌중을 휘어잡는 민중 광대의 신명난 한 바탕에 관객들은 웃고 울었다. 어쩌다 광대가 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광대가 됐으니 섭섭할 일은 아니다. 그깟 부귀영화야 한 세상이면 끝장이지만 민중·민족의 판소리를 개척하며 살아온 명창 임진택(67)의 인생 후반전은 창작판소리로 심금을 울릴 것이 틀림없다.

전북 김제 출신의 임진택은 '비가비'(학식 있는 소리꾼) 명창으로 보안사 사찰 문건에 마당극의 1인자로 기록된 민중 마당극의 창시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정권진(1927~1986) 명창에게 5년간 사사(師事)하면서 소리꾼의 삶을 살게 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를 이수한 그는 '소리 내력', '오적', '똥바다', '오월 광주', '백범 김구', '남한산성', '다산 정약용' 등의 판소리를 작창(作唱)했다.

이와 함께 완판 장막창극 '춘향전'과 마당창극 '비가비명창 권삼득' 등의 작품을 총연출 하고 마당극 '밥', 서사극 '직녀에게'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등을 연출했다. 또한 전주세계소리축제, 세계야외공연축제, 가야세계문화축전 등의 총감독을 역임했으며 영화 <천년학>(감독 임권택)에서 소리꾼 유봉 역을 맡기도 했다.

임진택 명창은 유관순 안중근 등의 행적을 담은 '열사가'를 창작한 명창 박동실(1897~1968)과 '이순신 장군 일대기'와 '성서 판소리' 등을 작창한 명창 박동진(1916~2003)의 뒤를 잇는 창작판소리 3대 유파로 불린다. 임진택 명창의 창작판소리는 옛 법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기법을 가미한 최초의 본격 창작판소리로 인정받고 있다.

사형수 김지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문화운동

임진택 명창은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울릉도 간첩조작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상처꽃-울릉도 1974>의 예술감독을 맡아 제작에 나섰다. 사진은 공연을 마친 뒤의 모습으로 맨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임진택, 그 다음이 함세웅 신부.
 임진택 명창은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울릉도 간첩조작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상처꽃-울릉도 1974>의 예술감독을 맡아 제작에 나섰다. 사진은 공연을 마친 뒤의 모습으로 맨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임진택, 그 다음이 함세웅 신부.
ⓒ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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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일, 임진택 명창은 서울 성북구 정릉동 1번지 성가소비녀회 성재덕관 1층에 위치한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아래 숨)에서 고문·국가폭력 피해자 및 가족을 대상으로 판소리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 등 조작간첩과 노동운동 고문 피해자 등이 참여했다.

고문 생존자와 가족 등 18명으로 구성된 '길음 판소리 모임'은 오는 23일 오후 3시 국회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진행되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4주년 기념식과 2017년 UN 국제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에서 '이산저산', '농부가' 등을 부를 예정이다. 이와 함께 이소선합창단 대표인 테너 임정현의 공연과 성가소비녀회 수녀들의 합창 공연도 이어질 계획이다.

다음은 임진택 명창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판소리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한 계기는.
"조작 간첩 피해자 한 분이'30년 동안 짓눌려서 소리 한 번 못 질러 봤다'고 해서 '그럼, 소리를 질러보자!'하고 판소리 모임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3년째 진행하고 있는데 판소리 치유 프로그램 참석자들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한과 응어리를 토해내고, 판소리를 익힌 다음에는 공연을 통해 자신감을 갖고 다른 피해자들을 판소리로 위로한다. 치유 효과가 아주 크게 나타나서 국제치유학회에 사례 보고까지 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결정적인 치유 프로그램은 박근혜가 파면되고 새로운 나라로 출발하게 된 정치적 상황이었다. 자신들을 고문하고 간첩으로 조작했던 박정희-박근혜 체제가 붕괴되면서 응어리가 풀린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억눌렸던 기를 펴게 하는데 판소리가 크게 도움이 됐지만 한과 응어리 전부가 다 해소되진 않는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본질적인 치유는 그들을 괴롭힌 체제의 폭력성을 청산하는 것이다. 고문·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정의가 승리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생긴 요즘 너무 행복해 한다."

- 을릉도 간첩단 조작사건을 다룬 연극 <상처꽃-울릉도 1974> 제작자로도 나섰다.
"울릉도 조작 간첩사건이 1974년 3월 15일 발생했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다. 울릉도 조작 간첩사건 피해자들은 대개 양민이었다. 조작된 인혁당 재건위 구속자들과 민청학련 구속자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상황에서 빨간 딱지가 붙은 그분들의 억울함을 대변할 상황이 못 됐다.

그분들의 억울함을 뒤늦게 알면서 대학생과 지식인이었던 민청학련 피해자만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민청학련 40주년이 되던 2014년,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후배인 최창남 목사가 쓴  <울릉도 1974>를 원전으로 <상처꽃-울릉도 1974>의 예술 감독을 맡아 직접 제작에 나섰다."

독재자 박정희는 유신체제 수호를 위해 간첩사건 조작을 획책했다. 중앙정보부(현재 국정원)는 1974년 울릉도 주민과 전북대 교수 등 47명을 간첩 혐의로 지하 밀실에 불법 구금한 뒤 고문을 통해 사건을 조작, 32명을 기소하면서(3명은 사형 집행) 공포의 공안정국을 조성하는데 성공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난 2015년 1월 1~2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대법원은 같은 해 11월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 같은 분단과 좌우 대립에 의한 피해는 임진택의 집안에서도 있었다. 아버지 8형제는 4명씩 좌우익으로 갈렸고 그 중 2형제가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연좌제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위암 수술 이겨낸 괴짜 명창의 인생 후반전은?

지난해 위암 수술로 12kg 빠진 임진택 명창. 하지만 위암 수술을 거뜬히 이겨내고 창작판소리 12바탕이란 전대미문의 작업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지난해 위암 수술로 12kg 빠진 임진택 명창. 하지만 위암 수술을 거뜬히 이겨내고 창작판소리 12바탕이란 전대미문의 작업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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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모습에 비해 살이 많이 빠졌다.
"지난해 7월초 건강검진 중에 위암이 발견됐는데 7월 18일부터 26일까지 8박 10일 일정으로 '임진택 명창과 함께하는 시베리아-바이칼 인문기행'이 준비된 상태였다. 나 때문에 신청한 분들이 여럿 있는데 내가 아프다고 안 가면 되겠나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여행을 다녀왔다.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주변 분들이 '암이 발견됐는데 여행가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난리였다. 다행히 위암 초기여서 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했고 지금은 수술 전보다 12kg 빠진 71kg로 적당한 몸무게가 됐다."

- 성격이 낙천적인 것 같다.
"자연치유 하러간다는 마음으로 인문기행을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내 성격이 낙천적인 것을 거듭 알게 됐다. 살고 죽는 문제를 놓고 고민한 적은 없지만 목소리를 잃을까봐 매우 걱정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목소리에는 이상이 없었다. 목소리에 이상이 없으니 됐다. 위 수술을 통해 66년간 사용했던 위의 2/3를 잘라냈으니 나머지 1/3로 33년을 사용하면 99세가 된다. 그러면 딱, 100세 인생 아닌가." (라고 말한 뒤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렸다.)

- 성격이 낙천적이니 후회할 일이 별로 없겠다.
"태평한 것은 좋은데 게을렀다. 197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마당극을 만들었고 1980년대는 한창 성행했는데, 마당극의 독창적인 미학과 원리를 지속 발전시키지 못한 채 '시의성 강한 연극' 정도로 머물게 했다는 자책이 밀려오면서 나태함에 대해 반성했다. 마당극을 많이 했지만 '밥'을 빼놓고는 대표작이라고 내 놓을 만한 작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극 '밥'은 김지하 시인의 이야기 모음집 '밥'을 원전으로 해서 임진택이 재구성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똥이 밥이다', '식사가 제사', '나는 밥이다' 등 3개의 마당으로 구성된 '밥'은 농촌 문제와 도시 문명을 비판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제시한 마당극이다.

임진택과 김지하의 인연은 남다르다. 임진택은 김지하의 유언 같은 부탁으로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된 김지하와 임진택은 단둘이 호송차를 탔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 시인이 그에게 "진택아, 나는 죽는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문화운동'이다. 네가 그 일을 맡아다오"라는 부탁을 받고 먼저 출옥한다. 홀어머니는 그에게 판검사가 되라고 했지만 그는 김지하 시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문화운동을 선택했다.

-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렸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하면서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진택아, 너 그만하면 할 일 했으니 이제 고시공부해라'하고 간절히 원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어머니, 지금은 문화운동에 나서야합니다. 고시공부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하고 지금은 제 일을 할게요'라고 하자 어머니는 '그려, 그러면 너하고 잪은 대로 해보고 언제든 공부해서 고시 패스혀라'고  양보를 해주시더라. 어머니는 언제든 나를 믿어주셨는데 나는 끝내 어머니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거지.

마흔 다섯이던 1994년, 그동안 금지됐던 '소리 내력'과 '오적'을 학전에서 공식적으로 공연하게 됐다. 그때 영국에서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도 함께 관람했다. 어머니도 처음으로 내 공연을 봤는데 공연이 끝나자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진택아, 그 많은 것을 외느라고 욕봤다. 너, 인자 고시 그런 것은 나이가 지나서 못항게 이제 이 길에서 일등 혀라'라고 말씀하셔서 '어머니, 이 길로는 제가 일등 할게요'라고 말씀드렸다."

창작판소리 12바탕이란 전대미문의 작업 중인 임진택 명창

2015년 5월 18일 조계사에서 '오월 광주' 공연을 하고 있는 임진택 명창
 2015년 5월 18일 조계사에서 '오월 광주' 공연을 하고 있는 임진택 명창
ⓒ 임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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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판소리 12바탕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독재체제를 민주주의로 바꾸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우리 문화운동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내 나이 육십이 되면서 그것이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이명박근혜 정권의 반역사적 횡포로 민주주의가 급격히 후퇴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서 예술가로서 자기 작품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마당극의 미학을 완성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나만의 작업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현대의 새로운 창작판소리 12바탕을 창작하는 전대미문의 작업이다. 그렇게 창작된 첫 작품이 '백범 김구'다. 백범 김구의 사설(辭說, 이야기)을 쓰고 작창을 하고 직접 소리를 하면서 김구 선생에 동화되는 체험을 했다. 백범에 대해 좌파는 우파라고 경원시하고 우파는 좌파라고 백안시하는 것부터 모순이지만 분단 과정에서 중도세력이 압살당한 사실이야말로 우리 역사에 치명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좌우 양 극단끼리 적대적 공생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분단의 적폐인 셈이다,

두 번째 작품으로 '남한산성'을 만들었고, 세 번째 작품으로 '다산 정약용'을 만들었다. 이전에 이미 작창한 '소리내력·오적'과 '똥바다'와 '오월광주'까지 포함한다면 다섯 바탕 정도는 만들어 놓은 셈이다."

- 창작판소리 주인공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이번에 새로 만든 '다산 정약용'은 내가 구상하는 창작판소리 역사 인물 중에 가장 먼 시대 인물이다. 그 다음 시대 순으로 보면 창작을 준비 중인 녹두 전봉준, 의사 안중근, 전태일과 어머니, 시민군 윤상원 순이다. 이들은 모두 민족의 자주와 민중해방, 만민이 평등한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영웅들이다.

지난 2월 경기도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다산 정약용'을 초연했을 때가 박근혜 탄핵심판 시기였는데 관객들은 다산 시대의 부정부패와 삼정의 문란을 '국정농단'으로, 부패한 정치에 맞선 백성들의 민란을 '촛불시위'로 연결 지었다. 지금 시대, 창작판소리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사정의와 적폐청산이다."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한 생을 바친 광대로 기억됐으면"

임진택 명창은 "소리만 잘하는 '명창'보다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소리로 한 생을 바친 '광대'로 기억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임진택 명창은 "소리만 잘하는 '명창'보다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소리로 한 생을 바친 '광대'로 기억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 임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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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운동을 하면서 정치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다산은 고통 받는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시(詩)도 아니라고 했다. 옛 고전인 시경(詩經)에서부터 예술은 본래 정치적인 것이라고 했다. 정치가 질곡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 깨뜨려야 한다. 내가 정치적 행동에 참여했던 것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새뚝이'로서 행동하기 위해서였다. '새뚝이'란 질곡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사람을 가르치는 순 우리말이다."

-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길 바라는가.
"때로는 가난하고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예술가의 자존심이 나를 버티게 했다. 역사 속 인물들 중에 의사 안중근과 우당 이회영과 동농 김가진 등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재물과 재능을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재산이 없는 대신에 나의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려고 애썼다. 내가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소리만 잘하는 '명창'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소리로 한 생을 바친 '광대'로 기억됐으면 한다."


태그:#임진택 , #마당극, #창작판소리, #민청학련,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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