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영화의 제목에 집중한다. 홍상수의 <밤에 해변에서 혼자>를 보고 나서부터다. 주인공인 김민희가 해변에 누워있는 장면에서 '해변에서'와 '혼자' 사이가 유달리 멀고 외롭게 느껴졌다. '혼자, 밤에 해변에서'도 아니고 '밤에 혼자 해변에서'도 아닌 <밤에 해변에서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

<꿈의 제인>, '꿈'이다. 꿈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시간에 지배받는다. 인과 없이 설명될 수 없다. 꿈은 다르다. 인과와 관계없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보일 뿐이다. 그렇기에 꿈을 기억하는 방식은 꿈에서 나온 장면의 인과를 분석하기보다는 여러 장면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일 테다.

가출청소년인 소현(이민지 역)은 자신과 같이 살았던 정호(이학주 역)를 만나러 동거했던 모텔로 찾아간다. 소현은 모텔에서 자살을 시도하지만 트랜스젠더인 제인(구교환 역)을 만나 목숨을 구한다. 제인은 술집에서 일하며 가출청소년들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 영화사 서울집


뒤죽박죽 얽힌 사건들... 소현이 만든 '꿈'

영화는 꿈처럼 전개된다. 제인과 함께 살던 청소년들은 서로를 몰라본 채 어느 '가출팸'에서 함께 지낸다. 영화의 흐름은 소현의 의식 반영이다. 영화를 유일하게 지탱하는 것이라곤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소현의 편지에 불과하다. 소현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제가 처음 배운 말은 거짓말이었대요. 저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소현의 거짓말은 영화가 풍기는 몽환적인 잔상과 함께 꿈이 됐다. 처음 배운 말이 거짓말이었고 그래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소현은 더 사랑받기 위해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인 역시 소현이 만들어낸 거짓말일지 모른다. 잠시나마 행복하기 위한,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 말이다. 가출청소년은 소현에게 현실이다. 그에게 제인을 우연히 만나고, 제인의 거처에서 머무르고, 아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출청소년이 겪는 현실이라기보다는 상상에 가깝다. 제인(Jane)의 이름이 영미권에서 신원 미상의 인물을 지칭하는 '제인 도(Jane Doe)'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제인이 없던 소현의 다른 이야기는 다르다. 가출팸의 '아빠'라 불리는 자, 병욱(이석형 역)은 소현에게 노래방 도우미가 되라 하고 이 돈을 생활비 명목으로 빼앗는다. 그러면서도 병욱은 소현에게 생활비를 훔쳤다고 다그친다. 병욱은 지수가 자신을 복종하지 않자 원조교제를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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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이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케이크가 3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라고 연대를 건네는 말은 애석하게도 소현의 편지와 꿈에서만 나오는 대사로 볼 수 있다. 소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이며 '시시하지 않게 살겠다'는 다짐이다.

삶은 줄곧 불행했고, 앞으로 불행할 거란다. 제인이 그랬다. 행복은 가끔 흩뿌려지는 모래알처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란다. 제인이 그랬다. 그럼에도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잔다. 이 또한 제인이 그랬다. "제가 처음 배운 말은 거짓말이었대요. 저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예요." 영화 시작의 소현의 대사이기도 하면서 영화 마지막의 제인의 대사이기도 하다. 제인이 입은 곧 소현의 생각인 것이다.

제인이 일하는 술집 '뉴월드'를 들어서면 손목에 도장을 찍어준다. 'UNHAPPY'라 적혀있다. 불행한 삶 속에서 함께 있자고, 사랑해 달라고. 영화 내내 퍼지는 이 갈증이 단순히 '트랜스젠더'와 '가출청소년'과 같은 소수자의 말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 <꿈의 제인> 영화 포스터 ⓒ 영화사 서울집



꿈의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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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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