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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생이던 때에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지만, 실제로 직접 페미니스트를 만나본 것은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당시 나는 학교에 개설된 여성학개론 수업을 들었는데 첫 강의 전날 드디어 페미니스트인 사람을 보게 된다며 두근거려 했던 기억도 난다.

고대했던 만남이니 질문할 것이 산적했지만, 수줍음 많던 신입생이었던 나는 결국 한 학기가 다 가도록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은 '선생님은 왜 페미니스트가 되었어요?'였다.

여성주의의 바람이 다시 불어온 지금이야 주변에서 페미니스트를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여성주의자라는 사람을 만나면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으리란 생각을 하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든 생각은 그때 그 질문을 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것이었다. 직접 '왜 페미니스트가 되었나' 하는 물음을 받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정한 사상을 접하고 어떤 주의자로 스스로를 정체화 하는 것은 인생의 큰 변화이긴 하지만 거기에 항상 거창한 동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소하거나 일상적인 경험의 누적이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이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자니 어쩌면 그 답이 질문자를 실망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고민이 들기도 했다. 주변에 점차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늘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잘 묻지 않게 되었다. 그것 말고도 할 말은 늘 많았다.

호기심을 접지 못한 그때 찾아온 답

 <페미니스트 모먼트> 표지.
 <페미니스트 모먼트> 표지.
ⓒ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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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질문을 접는다고 궁금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페미니스트로서 나름 긴 시간을 살아 보고, 내가 처음 여성학을 접하던 때 만난 선생님들의 나이에 가까워지니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그 분들의 앞선 10년은 어떠했을까. 나와 비슷했을까? 어떤 것이 달랐을까? 90년대에 페미니스트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특히나 여성주의자로서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거나 아무리 변화를 촉구해도 요지부동인 사회 앞에서 좌절을 느낄 때는 더욱 그랬다.

이미 그런 순간을 겪었던 선배들은 어떻게 그 시기를 돌파했을까. 페미니스트인 개인으로서 말이다. 이 같은 궁금증은 나만 가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성주의자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질문하고 비슷한 선례를 찾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때로 부러 답을 구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직접 우리를 찾아오는 때도 있다. 얼마 전 발간된 책 <페미니스트 모먼트>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이 책은 90년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여섯 명의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들의 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만큼 비슷한 영역에서 활동함에도 저자들의 이야기는 동질하기 보다는 다양함을 드러낸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의문시 되거나 부정된 스스로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들이 있는가 하면 복잡한 가족사를 페미니즘 정치학과 접목시킨 글도 있으며,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해가며 혹은 그런 스스로를 불온시하는 국가의 인식을 다른 소수자들의 경우로 확장하며 여성주의와 관계를 맺게 된 사연도 있다. 또 격렬했던 운동의 과정에서 활동가로서 겪은 고통과 절감한 한계를 진솔하게 풀어낸 글도 등장한다.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지니는 가치

물론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저자들의 보다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한 여성주의자 개인의 사적인 인생사'에서 그치진 않는다. 글에 등장하는 '나'가 자아로 환원되지 않고 자신이 그 당시에 있었던 좌표로 읽혔으면 한다는 나영정의 말처럼 저자들의 에피소드들은 그 당시의 여성주의 연구와 운동의 흐름 위에 포개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한채윤의 글에는 퀴어 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이 다소간의 긴장 관계에 놓여 있던 시기 활동가로서 느꼈던 고뇌가 담겨 있으며, 전희경은 "#OOO_내_성폭력" 운동의 전례라 할 '운동사회 성폭력을 뿌리뽑기 100인위'에서의 활동을 배경으로 페미니즘 공동체에 대한 통찰을 풀어낸다.

말하자면 이 책은 여성주의의 대표적 명제 중 하나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하나의 사상과 운동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질문해보고 지도를 그려보는 작업은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무척이나 필요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가치있다.

여성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풍부하지만 동시에 과열 양상을 띠는 상황에선, 김홍미리의 말처럼 '무엇이 진짜 페미니즘이고 누가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인가'를 묻는 것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쯤 머물고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야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토론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지도를 그리는 것은 주변을 살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이런 작업을 할 여러 번의 쉼표다.

우리가 서로의 좌표가 되자

이 글의 서두에 등장하는 내가 만난 첫 번째 페미니스트는 이 책의 필진 중 한 사람인 권김현영이다. 저자의 강의는 내 생에 첫 번째 여성학 수업이었으며, 나는 이후 그녀의 추천으로 한국여성민우회에 가입해 회원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저자인 한채윤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퀴어 운동가였으며, 성소수자 운동에 관심을 가지던 당시 그녀의 글과 조언들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전희경은 내가 민우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처음 들은 강연의 연사였으며, 페미니즘을 통해 노년을 이야기한 그녀의 강의 덕분에 나는 여성주의가 확장성이 큰 인식론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단체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들은 손희정의 강연을 통해 나는 대중문화 역시도 페미니즘의 틀을 통해 해석할 수 있음을 배웠으며, 지금도 관련된 원고를 쓸 때면 그녀가 앞서 쓴 글에서 도움을 얻곤 한다.

한국여성의전화의 '가정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에서 강사로 처음 만난 김홍미리는, 이 책보다 앞서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또 다른 강연을 통해 들려주었고 혼란스러움을 술로 달래던 시기 그녀의 이야기 덕분에 나는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또한 임신 중절이 한창 이슈로 떠오르던 때, 나는 '성과 재상산 포럼'의 구성원으로 있던 나영정의 글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임신 중절을 선택권이란 측면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생각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의 리뷰를 이렇게 닫는 것은 저자들과 내가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었음을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다만 필자들이 이 책을 통해 그려낸 그 지도에 나의 것을 덧대고 싶었다. 나 역시도 그녀들처럼 페미니스트가 되는 순간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성장하거나 좌절하거나 혹은 혼란스럽던 그 때에, 나는 그들을 만날 수 있었고 때로는 인식의 틀이 완전히 전환되거나 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접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저자들의 활동과 글들은 나의 무수한 좌표들 중 하나였다. 또한 그렇게 지도의 한 점이 되어준 사람들은 이 책의 필진들 외에도 많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고 나는 일어설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니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앞두고 혹은 지나친 후 두려움과 방황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필독을 권한다. 나처럼 당신들에게도 이 책은 또 다른 좌표이자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외 지음, 그린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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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에디터만 아는 TMI'를 연재합니다.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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