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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의 첫인상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네팔.

미리 예약한, 사진과는 세상 다른 호스텔에 짐을 놓고 먼지로 가득한 카트만두의 꼬불꼬불한 거리를 걸으며 트레킹 준비를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잡화들이 좁은 길 양쪽 좌판에 죽 늘어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 좁다란 길 사이를 택시 레이서들이 경적을 울리며 내달렸다.

알고 있는 네팔어라고는 '단야밧(고맙습니다)', '달밧(네팔의 전통음식)'뿐인 무지랭이인 나는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에이전시를 찾고 침낭과 배낭을 빌렸다. 낯선 길 위에서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여행은 시작되었고, 익숙한 환경과 언어, 상식 모든 것이 이곳과는 통하지 않았다.

서른셋. 이 적잖은 나이에 걸맞게 나는 적잖은 곳을 다녔다. 열한 살에 유럽 전역을 고종사촌의 말상대(?)로 따라나선 이후로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권의 나라들과 유럽, 아프리카, 미국 동부까지 빨빨거리며 잘도 돌아다녔다.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기도 하고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쉽고 재밌기 만한 여행뿐이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필리핀에서는 머물던 현지인의 집 아들에게서 소변이 담긴 화병을 선물 받았다. 그뿐인가, 화장대 거울에 붉은 립스틱으로 쓴 입에 담기 어려운 깜찍스러운 욕은 패키지였다. 아프리카 여행에서는 빈민촌에 행사를 하러 방문했다가 총기 강도 사건을 눈앞에서 경험하기도 했다. 비실거리긴 하나 스스로를 경험치 높은 여행자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 앞에서 나는 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여행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만랩의 여행자든 쪼랩의 여행자든 미아가 될 수밖에 없는 낯선 길 위에 홀로 선다.
어떤 이는 방랑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구도자가 되기도 하며
각자의 비밀스러운 목적지에 이른다.
내가 세우고 약속한 목표가 아닌 우연과 필연이 만나는
미지의 목적지가 아직은 어렵고 두렵다."
ⓒ 한유사랑
바람 빠진 풍선, 쪼그라들지 말자!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아니어도 히말라야의 쥐돌이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빌린 배낭에 짐을 구겨 넣으며 생각했다. 히말라야의 쥐돌이라도 될라치면 이 짐을 들고 무사히 등반을 마쳐야 한다. 몸과 맘을 정갈하게 하고 내일을 맞이하자.

분명 낮에는 여름 날씨마냥 따듯했는데 해가 지자마자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차가운 바람이 양 싸다귀를 날린다. 방 안에 들어와도 별다른 난방이 없으니 바람만 없을 뿐 춥다. 욕실 벽에서 떨어질락 말락하며 흔들 댄스를 추는 수도꼭지의 물을 틀었다(참나 가지가지 한다).  따듯한 샤워가 필요한 시간...인데 따듯한 물이 나오질 않는다. 아.. 과거의 나를 다시 소환할 때가 되었구나.

"첫 번째 숙소는 카트만두 중심가 타멜거리에 있는 TREKKERS HOME(트레커스 홈)! 무려 9불이에요! 더블침대! 독실!"

해맑기만 한 과거의 나를 소환해 등짝에 풀 스윙을 먹여주고 싶다!는 마음을 누르며 프런트에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샤워를 못하면 안 된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내게 호텔 직원이 쿨내나는 말투로 말했다.

"웨이뜨, 파이브 텐! 떤온쨉."

아. 또 시작되었다. 네팔에서 만난 대부분의 네팔리들이 영어를 쓰는데 나는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의 랩을 못 알아듣겠어요"라는 만국 공통어, '딸랑딸랑 으쓱으쓱 체조'를 하며 직원을 바라봤다. 눈을 크게 뜰수록 더 천천히 다시 말해준다.

"턴 온 쨉. 앤 웨이트 빠이브 미닛."

어? 어? 알겠다! 유레카! 영어인 듯 영어 아닌 영어 같은 영어를 쓰는 네팔 쿨냄퍼들. 발음이 구리면 어떠하고 단어를 잘 모르면 어떠한가. 수돗물 틀고 5분 기다리라고 한 거요 청년? 하고 묻자 그렇단다! 통이오! 우리는 통하였다! 쿨내청년 고맙네! 오케이! 이제부터 나도 '마이웨이 잉글리시'를 자신감 넘치게 써주게쒀! 말이 통하니 쪼그라든 마음이 조금은 펴졌다.

"오케이. 돈왈리, 윸칸 텤커 쌰월"

윙크를 날리며 쿨내청년이 말했다. 나도 윙크와 땡큐를 날려주었다. 앜칸테커쌰월! 10분여 후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머리를 대강 말리고 보니 새벽 네 시다. 히말라야 쥐돌이가 되기 위해 트레킹 복장을 모두 갖춰 입고 왕 벼룩 방지를 위해 김장봉투를 한 겹 깔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 한유사랑
떴다 떴다 비행기! 언제 뜨나요?

새벽 4시 반. 삼십 분을 눈을 감다 뜨고는 출발 준비를 했다. 쿰부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려면 카트만두 동쪽에 위치한 루크라라는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트레킹 기간 동안 필요 없는 캐리어를 카운터에 맡기고 어제 만난 쿨냄퍼 청년과 빠이빠이를 했다. 내가 다시 돌아올 테니 나를 잊지 말라고 당부를 했더니 생글생글 웃는다.

어제 미리 택시 불러달라고 하기를 잘했다. 이 꼭두새벽에 택시를 잡는다고 설칠 수야 없지. 맨날 욕만 주워 먹던 과거의 나를 소환해 칭찬을 하며 준비된 택시를 탔다. 어제 분명 퇴근 시간의 트래픽에도 역주행과 차선 바꾸기, 빵빵대기로 레이싱을 하며 30분이나 걸린 거리를 10분 만에 도착했다(네팔 택시기사분들, 카레이서예요. 역주행할 때도 속도를 안 줄여요. 기사님들, 제발 제 목숨 좀.. 덜덜덜.).

도착하니 아직 공항은 문을 열지도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들어간 공항은 어느 시골의 시외버스터미널 같은 느낌이다. 잡화와 주전부리를 파는 매점 하나, 화장실 하나, 대기할 의자 사이로 식수대와 휴지통이 있다. 중간에 비치된 고해상도의 평면 LG 모니터가 이질적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자 조그만 공항에 트레커들과 현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졌다.

'날이 맑으니 연착되지는 않겠군.'

이런 생각은 경기도 오산(오모나 죄송해요. 개그가 경기도 구리네요. 하하). 전광판에는 '카트만두 날씨에 따라 비행기가 연착될 수 있다'라는 글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연착을 밥 퍼먹듯 하는 중국 항공을 타고 왔다. 연착으로 눈물 콧물을 뽑아마셨는데 카트만두 날씨쯤이야 가뿐히 기다려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자리를 잡고 기다림에 지루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기다리고, 졸아도 비행기가 뜰 것이라는 안내는 없었다. 가뿐히 기다릴 것이라는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새벽 다섯시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오후 한시에 비행기가 이륙했다. 오마이지오디. 이건 뭐, 취학아동들이 등교해 학교에서 칠판을 보고 졸다가 맛없는 급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친구들과 하굣길 컵 떡볶이 한 잔 때리고 집에 와서 엄마가 하라는 숙제는 잠시 접어두고 게임 한판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역정을 내봤자 내 손해므로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길 위의 시간을 즐거워 해야지. 그래야지 암. 그래도 연착 시간이 길어지니 지친다! 지쳐! (지친다고! 이 카악트만두 날씨 놈들! 나는 삼십분 잤단 말이다! 이럴 거였으면 더 잤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행시간은 길지 않았다. 30분 타려고 8시간을 기다렸다니 자괴감이 들었지만 며칠 동안 비행기가 안 뜨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니 무사히 루크라 공항에 도착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뭔가 다중인격의 글쓰기인 듯 하오나 이때의 정신 상태는 다중이 만중이었습니다. ᅲᅲ).

잠시 루크라 공항에 대해 설명하자면, 1965년 건설된 루크라 공항은 에베레스트를 처음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와 그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를 기념해 '텐징&힐러리 공항'이라고도 불린다. 해발고도 2843m에 있는 루크라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장 위험한 공항으로 알려져 있다.

공항의 활주로는 산을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짧다. 그럼에도 이착륙이 가능한 이유는 활주로가 경사져 있기 때문인데, 비행기가 착륙할 때는 오르막을 이용해 속도를 줄이고 이륙시에는 비탈을 이용해 더 빨리 속도를 낸다고 한다. 해서 루크라 공항을 이착륙하는 조종사들은 경험이 많고 각종 변수에 대한 대처능력이 필요하다.

우리 비행기 조종사 아저씨는 경험이 많다고 했다. 그랬다. 조종사 아저씨는 경험도 장난기도 많았다. 루크라 공항으로 가는 산등성이를 날아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며 한 손으로 밖을 보라고 율동을 해줬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지만 한 손 운전이라니..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두근대 죽을 것만 같았다.

사실 조종사 아저씨가 이랬던 이유는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맥 사이를 경비행기로 날아가며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얼마나 있을까. 비행기 창문은 새똥으로 칠갑을 했지만 장관은 장관이다. 참고로 루크라로 갈 때는 왼쪽, 카트만두로 올 때는 오른쪽에 앉아야 산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텐징 힐러리공항 도착.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시작했다.
ⓒ 한유사랑
ⓒ 한유사랑
사람. 동행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은 특별하다. 모든 만남이 좋다고 단정지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길 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6년 전 야심차게 떠났던 영국의 길 위에서는 사심 없이 평생 아껴줄 수 있는 친구들과 평생 함께할 지병을 얻어 돌아왔다.(응? 이거 좀 이상한데?) 아직 청년의 시기의 내가 평생을 말하기는 조금 섣부르지만 성인이 되고 오랜만에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친구들을 만났다. 서른이 넘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노여워하지 않고 깔깔거릴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될까.

아무튼 이 친구들을 의지하며 일여 년간의 영국 유학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 뒤로는 유학의 '유'도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 친구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다 보면 6년 전 영국에서 가장 행복했던 길 위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행을 떠나기 전 전처럼 자주 볼 수 없지만 종종 만나는 영국 1호 박구남이를 만났다. 허기와 추위에 서로의 얼굴을 볼새도 없이 입 한가득 피자를 뜯어 넣으며 서로의 근황을 우물거렸다. 배가 빵빵해질 즈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 오늘 언니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인가염?"
"가면 돌아올 슈 엄떵."
"난 육개장보다 갈비탕이 좋아욤."

이게 무슨 악담인가 싶겠지만 이것은 악담이 아닌 액땜. 무겁고 버거운 이야기도 개그가 되어버리는 이 녀석 덕에 걱정을 한가득 집어먹었던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구남이의 액받이 설레발 덕에 나는 무사귀환 할 수 있었던 듯하다.
ⓒ 한유사랑
영국 유학으로 가산을 탕진한 다음 해, 앵벌이 겸 꽃거지 화가 역할을 맡아 열하일기 다큐를 찍으러 중국에 갔다. 근 한 달간의 여정에서 곰샘과 쭌언니를 만나고 그 인연으로 인문학 공동체 감이당을 알게 되었다. 하도 책을 안 읽어서 까막눈이 될뻔한 응급환자를 받은 명의들은 깜짝 놀라 극약처방을 내주었고, 환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활자를 읽고 쓰는 맛을 보게 되었다. (응급환자는 접니다! 맛만 보았기 때문에 이 모양이에요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어야 했는데!)

공동체를 나와 이런저런 형태로 살아가다가 올해 초, 염치 불고하고 곰샘을 찾아갔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고민들을 줄줄 쏟아내게 하는 능력의 소유자 쭌언니가 한국에 왔다는 핑계였다. 촛불시위가 있던 광화문 한켠의 카페.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던 태극기집회 어르신들의 아지트에서 나는 선생님과 쭌언니를 붙들고는 놓지 않았다. 멘탈이 흔들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내게 곰샘은 산전수전 공중전의 과정을 잘 통과하면 나에게 더 좋은 양분이 될 거라고 하셨다.

"너는, 그냥 잘 먹고 잘 싸고 건강해지는 게 중요하다."

이날 쭌언니와 곰샘을 만나고 나는 가벼운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여전히 내가 선택한 무거운 문제에 짓눌릴 때가 종종 있지만 그때마다 곰샘의 말을 생각한다. 그 선택 덕에 나는 네팔에 올 결심을 할 수 있었다.
ⓒ 한유사랑
이쯤에서 삼천포에서 헤엄치는 글을 구조해 다시 원상복구하자. 이 글의 원래 주인공은 히말라야 전 일정을 동고동락한 전우 동지에 대한 글이다. 나의 전우는 암 레슬러 김형석이. 앞으로의 이야기에서도 많이 언급되겠지만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형석이는 귀신도 때려잡는 해병대를 만기전역하고, 도전을 좋아해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한 건강한 대한의 건아(형석아 미안해 누나가 예쁘게 포장해 주려고 했는데 잘 안 된다. 엉엉)로 여정 내내 큰 의지가 되었다. 서로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길 위에서 팀을 이뤘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잘 맞고 체력 또한 잘 맞았다.

솔로 트레커로 시작한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팀이 만들어진 것은 순전히 루트가 비슷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르는 사람과 열흘이 넘도록 함께 먹고자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면부지의 외국인 포터 겸 가이드와(이하 가이드) 둘만 가기보다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국인이 한 명 더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별 문제도 있지만 가이드와 트레커 둘만 간다고 가정했을 때 의사소통이 완벽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 된다. 가이드와 트레커가 대체로 외국어(영어)로 소통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고산병 등의 신체적 문제가 있을 경우 신속한 대처가 어렵다. 또한 의견 충돌이나 문화 차이에서 가이드와의 문제상황이 생길 수 있다.(실제로 우리도 마지막 날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카트만두 공항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뜨지 않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형석이와 나는 쿰부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한 팀이 되었다.

"형석아, 누나가 초면에 말 놔도 될까?"
"아 그럼요!"
"(오예!)"
ⓒ 한유사랑
태그:#이타, #히말라야, #기부트레킹, #심장병후원, #에베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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