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를 봤다. 대선 주자들을 상대로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를 조사한 결과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세 명의 대선주자가 모두 한 편의 영화를 공통적으로 꼽은 것이었다. 바로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형식화·관료화된 제도의 그늘에 가려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할 이들이 소외되는 역설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다. 주인공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취약계층이지만 보험서류의 일련번호로만 기록될 뿐 개별 존재로서의 존중을 전혀 받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해있다. 대선주자들이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늘에 가려진 사회적 약자들을 꼼꼼히 보살피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심사기관의 벽에 자신의 이름을 페인트칠한 다니엘이 길거리의 시민과 함께 환호를 내지르고 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심사기관의 벽에 자신의 이름을 페인트칠한 다니엘이 길거리의 시민과 함께 환호를 내지르고 있다. ⓒ 영화사 진진


사회보장제도의 뒤에 가려진 그늘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 다니엘과 의료전문가의 상담 장면으로 시작된다. 평생 성실한 목수로 살아온 다니엘(데이브 존스)은 심장병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정부에 질병수당을 청구한다. 그러나 다니엘을 심사하기 위해 파견된 의료전문가는 다니엘의 증상과는 무관한 질문만 일방적으로 쏟아낸다. 결국 다니엘은 "일하기에 충분히 건강하다"는 소견과 함께 심사에서 탈락한다.

다니엘의 상태를 살피려는 노력은 않고 차트에 적힌 질문만 읊어대는 의료전문가는 형식적으로 전락해버린 사회보장제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일방통행으로 전개되는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관객들은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다니엘은 심사결과에 항고하고자 하지만 기관에 전화 연결 한 번 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기관을 찾아간 그에게 현장 담당자는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된다"는 말로 일관한다."연필 세대는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항의도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 인터넷은커녕 생전 키보드 한 번 두드려보지 못한 다니엘에게는 갈수록 태산이다.

돌아온 건 성실함에 대한 보답이 아닌 굴욕

기약 없는 항고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실업수당을 받고자 구직활동에 나선다. 아직은 일할 수 없다는 주치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자신의 가난함을 증명해 보여야만 하는 다니엘. 가족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열심히 살아왔던 그에게 정부는 성실함에 대한 보답 대신 끊임없는 굴욕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모든 활동이 이뤄지는 세상에서 다니엘의 낡은 자필 이력서는 구직활동을 증명해주지 못한다. 심사기관 직원은 또다시 증거가 없다며 다니엘의 수당 지급을 반려한다.

원칙을 내세우며 다니엘과 대립하던 직원들이 얼핏 '악역'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와 그에 따라 요구되는 원칙에 충실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제도의 관료화가 가져온 피해자들이다. 다니엘에게 동정을 표하면서도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여직원은 원칙과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그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는 약자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사회보장제도가 역설적이게도 원칙과 형식에 갇혀 본질을 상실해가는 것은 아닌가 반문하면서 그 본질인 사람에 주목해야함을 강조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던 다니엘은 결국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실업수당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지키고자 한다. 세금을 내지 못해 당장 가스가 끊길 위기에 처한 그는 집안의 가구들을 모두 팔아치우면서도 자신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은 조각품 하나만큼은 끝끝내 팔지 않는다. 그 물건은 다니엘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을 상징한다. 다니엘에게 자존심은 존재의 근거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영화는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은 그 어떤 이유와 상황에서라도 결코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임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영화의 두 주인공인 케이티(왼쪽)와 다니엘(오른쪽)이다. 둘은 모두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이지만 자존심만큼은 지키고자 하는 다니엘과 달리 케이티는 점점 이성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신을 내몬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영화의 두 주인공인 케이티(왼쪽)와 다니엘(오른쪽)이다. 둘은 모두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이지만 자존심만큼은 지키고자 하는 다니엘과 달리 케이티는 점점 이성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신을 내몬다. ⓒ 영화사 진진


다니엘의 의지는 상황이 절박해질수록 더욱 강렬해진다. 역설적인 그의 행동 뒤에는 비슷한 처지에 내몰린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의 존재가 있다. 런던에서 두 아이를 이끌고 다니엘이 사는 지역으로 이주해 온 싱글맘 케이티 역시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다.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사는 다니엘과 달리 두 아이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녀는 훨씬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다니엘이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케이티는 그 반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생필품 지원센터에 들렀던 그녀는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통조림을 허겁지겁 뜯어먹다가 이내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고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식욕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 앞에서 존엄성을 잃어가는 한 인간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도 결코 편치만은 않다. 결국 생계를 위해 스스로 몸을 파는 그녀를 본 다니엘은 모든 소외자들의 십자가를 대신 멘 채 거리로 나선다.

심사기관 문을 박차고 나선 다니엘은 건물 벽에 자신의 이름을 써내려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가 새겨 넣은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소외된 모든 약자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자신들을 보험서류의 일련번호가 아닌 이 세상의 유일한 개별 존재로 존중해달라는 다니엘의 외침에 길거리의 시민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본다. 그들은 다니엘의 행위를 통해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그를 일깨워준 다니엘에게 환호와 거수경례를 보낸다.

영화는 다니엘이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로 끝맺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 주위의 수많은 '다니엘 블레이크'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남 일 같지 않아서다. 잠시 눈을 돌려 주위를 보라.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다니엘 블레이크가 있던가. 국회와 정부청사 앞에서 홀로 피켓을 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이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뿐인가. 해마다 3.1절이나 현충일만 되면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 어렵게 생계를 잇는 6.25 참전용사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사례가 단골 뉴스로 등장한다. 이들에겐 생계와 존엄이 걸린 문제지만 공직자들은 그들의 행적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요구를애써 외면해오고 있다.

그들이 챙기고자 하는 것은 참전수당 몇 푼이 아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투쟁했다는 자신들의 자부심, 즉 자신들의 존엄성을 존중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투쟁이 계속되는 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다시 대선 주자들에게 당부하고자 한다.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는 말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라. 지금이라도 거리로 나가 국회 앞에서, 정부청사 앞에서 외롭게 투쟁하는 그들의 손을 맞잡고 그들의 이야기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라. 또 다른 다니엘 블레이크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국내 개봉 공식 포스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국내 개봉 공식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다니엘 블레이크 안철수 대통령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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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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