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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처럼 정이 붙고 그 정이 바로 사랑이 됐지"

두 노부부는 금슬이 무척 좋았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순간 심장이 찌릿했다.
 두 노부부는 금슬이 무척 좋았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순간 심장이 찌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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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95년 7월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72세였고 정복덕 여사님(66세)과 살고 있었다. 그와 그녀는 금술이 매우 좋은 부부였다. 첫 만남 때 그는 집에서 에어컨 설치를 돕는 중이었고 그녀는 나를 위해 잡채를 무치고 있었다. 한눈에도 선해 보이는 이 두 노부부는 나를 보고 문화예술인같이 생겼다며 반겨줬다.

처음에 나는 그와 말 붙일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이름도 그렇듯이 복과 덕이 많으신 분이셨다. 내가 그 집에 갈 때 마다 두 분은 낡은 집을 반질반질 닦아 놓으시고 손수 만든 반찬을 정갈하게 차려놓은 후 상보자기로 덮어두고 허드레 의자를 대문 앞에 끌어다 그림처럼 거기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생활이 힘들진 않는지, 몸은 건강한지 이것저것 물으시고 밥숟가락을 뜨는 내 앞에 나란히 앉아서 컵에 물을 따라준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내가 묻자 그는 "그 때는 일제 강점기야. 그래서 결혼 안한 남자들은 징병을 가고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지. 그래서 두 집안 어른들이 부랴부랴 혼인을 시켰고 결혼할 때 처음 서로 얼굴을 봤어" 하신다.

나는 "몇 년을 사귀고 사랑해서 결혼을 해도 살다보면 힘든 일이 많은데 두 분은 어떠셨어요? 살다보니 사랑이 생기셨어요?" 물었다. 그는 눈을 들어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 두 사람이 하나가 돼서 살다보니 그림자처럼 정이 붙고 그 정이 바로 사랑이 됐지. 사랑이 딴 게 아니고 정이야" 하신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찌릿 전율했다. 아...

6년 후 복덕 여사님이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할머니가 얼마 안 남은 거 같아. 평생 고생만 했는데 너무 안쓰럽고 속이 상해" 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갇혀 하루에 잠깐씩 밖에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그와 나는 상의 끝에 그녀를 집 근처 병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곳 병원과 잘 얘기가 돼서 우리는 2인실을 통째로 쓰며 인공호흡기며 가래 흡입기 등을 방에 비치하고 간호사인 내가 직접 모든 처치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같이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때부터 그와 나는 많은 얘기들을 나누고 서로를 마음깊이 이해하게 된 거 같다.

나는 그의 그녀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매일 감동 받았다.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굳어가는 그녀의 몸을 주물렀고, 시시때때로 뜨거운 물수건을 가져다 그녀의 마른 몸을 닦으며 "어때? 시원하지? 깨끗이 닦으니까 할머니가 아주 말쑥하니 예뻐" 했다. 하루가 다르게 그녀는 의식을 잃어갔고 그의 시름은 깊어갔다.

그는 그녀가 깨어 날 때마다 뭐가 먹고 싶은지 얼굴을 부비며 물었고 두 시간도 더 떨어진 수산시장에서 홍어를 사다가 쪄오거나 회를 떠오거나 생선을 구어 왔다. 물론 그녀는 전혀 먹지 못했지만 그는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제발 한 입만이라도 먹어봐요,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요." 그는 호흡마저 가늘어진 그녀 앞에서 접시를 든 채 서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석션(suction, 입 안에 넣어 분비물 흡입)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히는 상황이 계속 발생했고 침대에서 대소변을 7-8번씩 받아냈다.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내가 잠시 휴식 차 자리를 비운 사이 그 곳 간호사들이 처치하는 걸 참지 못했다.

'조심스레 다루지 않고 함부로 막 하는 거 같다'며 언짢아했다. 이 후 나는 쉴 틈 없이 자리를 지켰다. 정신이 멍 한 상태로 몸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어느 날 그녀가 하늘로 갔다.

정복덕 여사의 빈 자리, 그는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았다

아내가 떠났다. 그는 우울증과 함께 심한 불면증을 앓았다.
 아내가 떠났다. 그는 우울증과 함께 심한 불면증을 앓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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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울증과 함께 심한 불면증을 앓았다. 금술이 좋은 부부일수록 혼자됨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는 한 뭉치의 수면제를 꺼내 보여주며 "한 입에 털어 넣고 할머니 곁으로 가고 싶지만  자식들에게(5남매) 상처가 될까봐 그러지도 못해" 했다.

그는 또 다시 울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노인복지관이나 노인정 같은 또래 친구들이 있는 곳에 가서 어울릴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오랫동안 할머니 병간호로 사람들을 만난 지가 오래야. 그래서 그런 곳에 가서 뭘 한다는 게 낯설고 어색해" 했다. 설득 끝에  마침내 그는 복지관으로 가서 컴퓨터와 수지침 수강신청을 했다.

시간은 흐르고 그는 점점 생기를 찾아갔다. 그와 나는 종종 맛집에서 점심을 했는데 어느 날 그가 쑥스러운 듯 내게 뭔가를 털어 놨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할머니 돌아가시고 외로움에 힘들었잖니? 그런데 복지관 다니면서 사람들 만나고 같이 그런 아픔들을 얘기하고 그러니깐 내 맘이 훨씬 나아졌어. 딴 게 아니구 내가 그 곳에서 몇 분의 할머니들을 만나봤는데..." 한다. 

나는 웃음이 났다. 친구로 잘 지내시라고 말하는 내게 그는 "이 나이에 친구는 싫고 매일 같이 밥 먹고 눈 맞추고 얘기할 사람이 필요해. 그래서 그 중 한 분과 결혼하려고 하는데 네 의견은 어떠니?" 했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절박함을 읽었다. 그의 나이 81세 때 얘기다.

나는 그의 사랑의 카운셀러가 되어 예비후보 할머니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는 한 분 한 분 어떤지 내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81세의 노인도 사랑에 관한한 18세 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놀랐다.  내게는 그저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상대의 몸짓에도 그는 큰 의미를 불어 넣으며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이내 혼자만의 오해였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수의 후보를 물리치고 첫 눈에 반한 분을 만났다. 복지관 지인 분의 소개로 그녀를 만나고 온 저녁 그는 마치 로미오가 줄리엣을 첨 봤을 때의 흥분한 얼굴로 내게 "오늘 아는 분 소개로 한 분을 만났는데 인상이 아주 품위가 있고, 뭐라 그럴까? 음... 기품이 있고 아주 마음에 쏙 들어. 말하는 것도 보니까 애교도 있고  무엇보다도 미소가 아주 함박꽃처럼 환해" 했다.

몇 주후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얼굴이 하얗고 동그랗고 부티가 나 보였다. 무려 그와 16살 차이가 나는 65세 꽃다운 그녀였다. 그녀도 오래 전에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 지낸다고 했다. 두 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워낙 '동안'이었기 때문에 잘 어울려 보였다.

그는 국어 선생님을 했었고 교감선생님으로 정년퇴직을 한 터라 200이 훨씬 넘는 연금이 나왔고 빚도 없고 집도 있다. 게다가 그는 젠틀하고 로맨티스트이다. 이런 매력 덩어리인 그가 인기가 있는 건 당연했다.

두 분은 결혼을 했다. 그는 점점 더 젊어지고 활기차졌다. 두 분은 여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여행도 함께 다니고 종교 생활도 함께 하면서 즐거운 생활을 했다. 그는 "이제 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거 같아. 젊어서는 맨손으로 5남매 키우느라 힘들었고 다들 출가시키고 나니 할머니가 아파서 병간호하느라 허리 한 번 펴기도 힘들었어. 이제야 좀 사람답게 사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아주 행복하고 좋다" 하신다.

그러면서 "돌아가신 할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살아생전에 최선을 다 해서 미련은 없어" 했다. 정말로 그랬다. 그는 자신의 에너지가 1도 남지 않을 만큼 복덕여사님께 다 쏟아 부었다.

10년 세월이 흘러 그녀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말했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야.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있어"
 그가 말했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야.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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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행복하다고 하니 내 맘도 기뻤다. 두 분은 점점 닭살이자 민폐 커플이 되었다.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서로 더 먹으라고 고기를 서로의 밥그릇에 올려놓느라 도무지 식사가 끝나질 않았고 눈만 마주쳐도 서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아주 비슷하니 자매 같아 보여요. 아주 보기 좋아요" 한다. 그녀는 "아이고 무슨... 말도 안되는 말씀을 그리 하세요. 호호호..." 하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그녀는 내 엄마랑 동갑이었고 나는 그냥 따라 웃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2016년 4월 13일. 그 날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새벽 1시 돌연 택규씨의 그녀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큰 병 없이 지내온 그녀였기에 그의 충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나이 76세였다.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 인지상태가 제로가 되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집에서도 문을 열고 자서 심한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그는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다. 5남매가 돌아가면서 그를 돌봐주고 위로했지만 그 무엇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 전보다도 자주 그를 보러 갔다.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는 그의 등을 어루 만져준다. 뭐 하고 있었냐고 물어본 후 그의 손을 잡는다. 얼어있던 그의 얼굴이 다소 풀어지는 걸 느끼며 그의 하소연을 들어준다. 건강했던 그녀를 아무런 준비 없이 잃어버리고 그는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못해준 것만 떠오른다며, 후회되는 일, 다시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일들, 등등 마치 처음 얘기 하듯 상세히 말한다. 이미 대사까지 외울 만큼 많이 들은 얘기지만 나 또한 처음 듣듯이 반응한다. 그것이 그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그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버텼다.

지난 주 나는 며칠 후 있을 그녀의 첫 번째 기일에 '같이 산소에 갈 것'을 의논하면서 그와 순대국밥을 먹었다. 그는 예전에 복지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할머니가 자신의 소식을 듣고 위로하러 집에 한 번 왔었다고 얘기했다.

그 분과 얘기를 나누니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주고 말이 잘 통해서 좋았다고 했다. 그 분이 찾아와준 거에 대한 보답으로 식사 대접이라도 한 번 하고 싶은데 옆에 사는 딸의 감시(걱정)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야.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있어" 했다. 나는 그의 입가에 서린 흐린 미소를 보았다.

그와 나는 이번 일요일에 그녀의 산소에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자주 못 와서 미안하다고 울먹였다. 나는 그가 그녀와 할 말이 많이 있을 거 같아 슬쩍 자리를 피했다. 산소에서 93세의 그를 부축하고 내려오는 길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나무 과수원을 보고 그가 선창을 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그리고 그 뒤를 잊어버린 듯 나를 쳐다 보기에 내가 그 뒤를 받았다.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우리는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택규씨는 나의 시아버님이다. 그와 나는 그와 그 친 자식들이 느끼는 가족의 유대감과 좀 다른 의미로 깊은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나는 말이 통하는 며느리이자 친구이며 늘 든든한 그의 정서적 후원자이다. 나는 그를 마음 깊이 존경한다. 그는 사랑이 뭔지를 내게 보여준 사람이다. 

93세에도 마음이 보들보들 살아있다. 남편과 나는 비밀이 많다. 거의는 그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그에게 무한 신뢰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버님! 다음 주말에 제가 알리바이 만들어 드릴 테니 그 분께 식사대접도 하시고 말씀 나누세요"라고 전화 드렸더니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그럴래?" 하신다. 나는  이 밤에 '다정도 병인 택규씨'가 잠 못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그:#다정가, #사랑, #시아버지, #며느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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