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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후마니타스, 2016)
 <지연된 정의>(후마니타스, 2016)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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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걸려온 전화. 발신인 '박쌍규'다. 본명 박상규. 그가 누군가. 맞다. 2016년 한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 3건의 재심 결정을 받아낸 백수 기자, 박상규다(익산, 삼례는 최종 무죄 판결, 완도 김신혜 사건은 검찰의 항고로 고등법원에서 재심 개시 여부 판단 중이다).

'법원과 검사가 제일 하기 싫어한다'는 재심을, 그것도 3번이나 받아내 이름을 알린 박상규는 돈도 벌었다. 박준영 변호사 등과 함께 진행한 스토리펀딩 '가짜 살인범 '3인조'의 슬픔,  나는 살인범이 아닙니다,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프로젝트로 십여억원의 독자후원을 받은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  

그런 그가 퇴사한 지 2년 만에 전화해 밥이나 먹자고 했다. '그냥 밥이나 먹자'고? 설마. 예감은 정확했다. 곧 신간이 나올 거라 했다. '그럼 그렇지'. 그날 우린 정말 밥만 먹었다.

며칠 후 아침 또 그가 찾아 왔다. 손에는 백수 기자 박상규와 파산 변호사 박준영과의 만남과 앞서 언급한 사건들이 재심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 <지연된 정의>가 들려 있었다. "커피라도 먹고 가라"고 하자 바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 권이라도 더 팔려면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다면서. '뭔 억척이야, 펀딩도 많이 받았다'며 박상규 뒤통수에 대고 속엣말이 나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박상규는 몰랐겠지만) 나는 한 달 장기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글 한 편 쓰지 않고 놀았다. 나는 놀아도 열일 하는 기자들은 많았다. <지연된 정의> 기사는 계속 업데이트됐다. 책 리뷰며 인터뷰며 기사들을 보며, 굳이 내가 숟가락 하나 얹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후크송 같은 박상규 말이 계속 생각났다. 밥을 괜히 같이 먹었나, 후회가 됐다.

"책 많이 팔아야 해. 그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와."

<지연된 정의>를 소개하고 있는 많은 기사들.
 <지연된 정의>를 소개하고 있는 많은 기사들.
ⓒ 네이버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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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 많이 노출되는 것과 책 판매량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다. 박상규는 지금도 페북에 홍보 아닌 홍보인 것 같은 글을 올린다. 책을 팔기 위해. 아니 펀딩 받은 돈도 많은데, 왜 박상규는 그토록 책을 팔려는 걸까. 같이 일하던 시절, 박상규가 닮고자 하는 사람으로 종종 입에 올리기도 했던 조지 오웰의 자서전 <조지 오웰>(한길사)을 읽다가 그 대답이 될 만한 대목을 발견했다.

'조지 오웰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관된 도덕적 힘이었다. 무릇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한다. 오웰의 도덕적 힘은 피해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가해자로서의 수치와 죄의식에 터를 잡고 있다.'

닮고자 하면 닮는다더니, 이 대목에서 박상규는 조지 오웰과 닮았다. 가령 이런 대목에서 그랬다.

'살면서 자주 만난 익숙한 존재들이 사대문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생산직 노동자, 동네 구멍가게에서 술 마시다 갑자기 싸우는 아저씨들, 백인이 아닌 외국인, 결혼 이민 여성, 농민, 가출 청소년, 교도소, 화장터, 굴뚝 공장 등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인 존재가 외로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문득 사대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창피하네요. 미안해요. 1만원 만 빌려주세요. 사장님한테 어제 가불을 못 해서요. 나갈 것도 많고, 애로 사항도 많네요. 21일이 월급날인데...죄송해요. 이상한 말해서. 그냥 없던 일로 할까요?' 그는 지금도 1만원이 절실하다. 이 땅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 역시 일을 해도 가난하다. 단돈 1만원을 빌리기 위해 서른 여섯 살의 임명선은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문자메시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뒤 손으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난 2월 박상규가 강화도 오마이스쿨 강당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이날 시민기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박상규는 3건의 재심 성공으로 남들이 알아주는, 그만하면 잘 나가는 프리랜스 기자가 됐다고 했다. 여기 저기서 강연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대접이 융숭하다고 했다. 유쾌한 술자리가 벌어지던 어느 날 밤 박상규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단다.

"너무 추워 못 살겠다"고 "방 구할 돈 좀 달라"는 내용이었다. 재심 사건의 피해자였다. 박상규는 얼마간의 돈을 부쳤다. 그래서 우울하다고 했다. '왜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데, 피해자들은 여전히 그렇게 못 사는가. 재심 이후에도 왜 그들의 삶은 달라지는 게 없는 건가. 언제까지 그들을 책임져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으로 우울하다고 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당분간은 책임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우울하다고 했다. 우울해 죽겠다고 했다.

영화 <재심>이 다룬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박상규 기자.
 영화 <재심>이 다룬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박상규 기자.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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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지 오웰의 말대로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하는 법, 박상규는 우울해 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난생 처음 사업자등록을 하고 회사를 차렸다. 월급 받던 기자가, 월급 주는 사장이 됐다. 진실탐사그룹 '셜록' 이야기다. 그는 '기자는 알리고 독자는 퍼트리고 변호사 등 전문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회사 셜록을 차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만질 수 없는 돈을 펀딩으로 후원 받았다. 이 돈을 갖고 있기가 무서웠다. 독자들이 준 돈이니,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박상규답다. '이게 될까?' 싶었다던 셜록은 순항 중이다. '1년은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던 박상규가 많은 독자들의 후원으로 '2년은 갈 것 같다'고 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물론 과장이 조금 보태졌을 거다.

그래서 뒤늦게 숟가락 하나 얹었다. 책 <지연된 정의>가 많이 팔려서 그들의 활동 자금이 든든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백수 기자가 돈에 굴하지 않고 그가 알리는 진실을 계속 지켜보고 싶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회사 이름 '셜록'은 심했다. 박상규랑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니, 전혀 매치가 안 된다.


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박상규.박준영 지음, 후마니타스(2016)


태그:#셜록, #박상규, #백수 기자, #파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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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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