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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하루가 지난 서울시청 앞, 탄핵무효 집회장에는 군가가 울려퍼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하루가 지난 서울시청 앞, 탄핵무효 집회장에는 군가가 울려퍼졌다.
ⓒ 홍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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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1시 시청역에서 나오자마자 군가가 들렸다. 군대에서 지겹도록 듣던 '멸공의 횃불'이었다. 4분의 4박자의 간결한 리듬과 우렁찬 노랫소리. 사람들이 박자에 맞춰 태극기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집회의 공식명칭은 '제1차 탄핵무효 국민저항 총궐기 국민대회'였다. 육사 28기 구국 동지회, 육사 30기 구국 동지회, 육군 3사 애국 동지회, 예비역 공군 장교단, 육사 34기 구국 동지회. 집회장에 나온 예비역 군인들이 구령에 따라 "탄핵 반대"를 외쳤다. 서로에게 '우리가 밀리면 나라가 망한다'며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기도 했다.

한 손에는 유모차를, 다른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든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유모차 안에는 태극기와 과자를 각각 손에 든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태극기를 흔들고 '헌법재판소 판결은 무효다'라고 외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아이는 이 집회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알까?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아이를 향해 "너도 애국시민이구나"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1일 오후 2시 '탄핵 무효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 다수가 군인 출신이었다.
 11일 오후 2시 '탄핵 무효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 다수가 군인 출신이었다.
ⓒ 홍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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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한테 좋은 글 좀 써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는 시청 앞부터 대한문 앞까지 곳곳에 좌판을 깔고 모금·입당 운동을 진행했다. 좌판 위로는 탄기국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모셔오겠다'며 창당 선언한 새누리당 입당원서가 깔려 있었다.

머리에 '자유통일'이라는 띠를 두르고 가방에는 태극기를 붙인 할머니 한 분이 좌판으로 다가갔다. 할머니는 고생한다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엇을 꺼냈다. 비닐봉지의 매듭을 풀고 켜켜이 겹쳐 있던 은박지를 여니 쑥떡이 보였다.

"집에서 만들어 온 거야. 먹고들 해요."

할머니는 입당원서에 이름을 적었다. 할머니의 옆모습을 찍으려고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고 '기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제발 우리 박근혜 대통령님한테 좋은 글 좀 써줘. 좋은 분이야. 언론이 이럼 안 돼. 나라 생각해서 잘 써줘."

그리고 할머니는 다시 입당원서를 쓰러 좌판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왼쪽 다리가 절뚝거렸다. 그런 와중에 정광용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회장이 연단에 나타났다. 마이크를 든 정광용 회장은 곧바로 전날(10일) 있었던 헌재의 파면 결정을 비난했다.

"어제 있었던 헌재의 탄핵 인용은 반역입니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어제 죽었습니다. 헌재는 즉각 다시 판결해야 합니다."

또한 어제 친박단체들의 헌재 결정 반발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헌재에 탓을 돌렸다. 그는 "헌재는 태극기를 든 우리를 자극해 아스팔트 위에 피가 나게 했다"고 말했다. 집회에 모인 참가자들이 '헌재 해산'을 일제히 외쳤다.

탄기국에서 창당 준비 중인 새누리당에 입당하기 위해 몰린 인파
 탄기국에서 창당 준비 중인 새누리당에 입당하기 위해 몰린 인파
ⓒ 홍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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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정서'로 자극되는 노인들

이윽고 연단에 올라온 한 보수단체 인사는 노인들의 '반공 감정'을 노골적으로 건드렸다.

"광화문에서 '김정은 동지 만세'라고 적힌 종이가 발견되며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온갖 발언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와 탄핵은 반란세력의 음모입니다."

곳곳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빨갱이 XX들, 다 죽여 버려야 해!", "이정미 집 어디야!" 근처에 서 있던 강원도에서 왔다는 할아버지께 넌지시 물어봤다. "제 친구는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아버지가 격앙된 목소리로 답했다.

"잘못했다고 쳐도 어떻게 김정은 찬양하는 놈들한테 어떻게 나라를 내줘? 너희 같은 젊은 놈들은 북한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몰라."

그는 다시 태극기를 흔들며 연단으로 가까이 갔다. 그의 모자 뒷면에는 '6.25 참전 용사'라고 삐뚤빼뚤하게 적힌 하얀 종이가 매달려 있었다. 곧 있으면 박근혜 전 대통령 법률 대리인단 김평우 변호사가 나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또 어떤 자극적인 말들로 사람들을 흥분시킬지, 궁금증과 동시에 우려가 들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음악이 울려퍼지자 일제히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언거나 거수경례를 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음악이 울려퍼지자 일제히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언거나 거수경례를 했다.
ⓒ 홍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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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태에도 말 한 마디 없는 박근혜 전 대통령

집회 참가자들이 격앙되자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목을 막는 차벽 근처에 있던 경찰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방패를 든 의경들이 더 두꺼운 방어막을 쳤다. 경찰은 좁은 길목만을 열어둔 채 시민들의 통행을 통제했다.

태극기를 든 한 노인이 '저, 저 빨갱이 놈들!'이라며 '광화문으로 가겠다'며 차벽 앞으로 왔다. 한 경찰관이 "집회는 저기(시청 앞)에서 하시면 돼요. 어르신"이라고 말했다.

전날 헌재 앞에서 있었던 폭력사태를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경찰버스가 탈취됐으며 차벽이 뚫렸고 경찰과 기자가 폭행당했다. 11일까지 총 3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시청을 지나 광화문으로 향했다. 이순신 동상 앞에 설치된 노란리본 조형물이 보였다. 그 뒤로 청와대의 한 귀퉁이가 눈에 들어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은 오늘도 청와대에 머문다고 한다. 헌재의 탄핵 인용 결정에 대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침묵이 오래되는 만큼 노인들의 '반공정서'와 '애국심'을 이용하는 집회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을 자극하는 집회 주최 측, 친박 정치인 등의 발언이 계속될수록 부상자와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도 여전하다.

'승복하겠다…여러분도 모두 승복하시고 제자리로 돌아가시라' 그 한 마디면 될 것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반대 집회를 하다 죽은 노인들에 대해, 다리를 절뚝이며 집회에 나온 할머니에 대해 알고나 있을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태그:#탄핵, #태극기,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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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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