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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이 죽고, 17명이 중상을 입었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지난 2월 11일로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보호소 시설은 변한 게 없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사회의 시선 역시 변한 게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그간 가까이서 지켜봤던 피해자들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 기자 말

"쉼터라면서 왜 사람을 안 받아요. 왜 한국사람 관리자는 쉼터에 없어요. (불법 사람) 신고하겠어요!"

협박조로 전화를 한 사람은 두 명의 남자 이주노동자를 데리고 온 한국어를 제법 잘 하는 OO국 여성이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이주노동자쉼터가 정부나 지자체 지원이라도 받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쉼터에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사람 중에는 브로커 역할을 하며 쉼터를 마치 자기가 제공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갈 곳 없는 사람을 뜯어먹는 사람이 있다. 전화를 한 여자도 그런 부류였다.

여자는 남자 숙소에 통원 치료 중인 두 명과 소송 중인 결혼이주민, 실직 중인 사람과 출국에 앞서 쉼터를 이용하기로 오전에 예약하고 간 사람까지 다섯이 이용 중이라 받아줄 수 없다는 말에 발끈했다. 그 와중에 한국 사람이 왜 없냐며 여자 숙소에서 행패를 부렸다. 여자 숙소를 이용 중이던 베트남 여성에게 '너 나가! 지난번에도 여기 있었지'라며 주인행세를 해 댔다.

식사 시간도 다 끝난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쉼터 관리자는 "그런 억지를 경험해 봤기에 OO국 사람은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을 꾹 참았다. 대신 "밤에도 관리자를 둘 형편이면 나도 좋겠다. 다 퇴근한 밤에 와서 그런 억지를 부리는 사람 얼굴 좀 보게"라고 답했다.

남자들 때문에 왔다고 하면서 여자 숙소에서 행패를 부린 여성은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떠났다. 그 여성은 쉼터 이용자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성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당시 쉼터 이용자들은 모두 체류 자격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신고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쉼터는 운영과 관련해서 관에서 십 원 한 푼 지원받지 않는다.

설령 받는다 해도 누군가 억지 부린다고 받아줄 거면 쉼터를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신고한다는 협박에 억지로 자리를 만드는 것은 대통령 아니 대통령 할아비라도 어림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지원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협박과 억지는 반감만 줄 뿐이라는 것을 그 여성은 모르고 있었다.

'신고하겠다'고 협박한 여성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을까를 생각하면 씁쓸하다. 그 여성은 한국인들이 툭하면 '신고하겠다'며 이주노동자들을 협박하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아왔을 것이다.

이처럼 미등록 이주노동자, '불법 체류 이주노동자'는 본인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출입국의 무리한 단속 중에 죽어가도 '불법 체류자'라고 하면 그냥 묻혀 버린다. 왜 죽었는지, 그 삶이 그렇게 허무하게 마감할 수밖에 없었는지 따지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불법'은 만만하게 보인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외국인들마저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협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김남주 시인의 '시인은 모름지기'가 떠오르는 이유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시인은 모름지기: 김남주

대한민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도둑놈 취급을 받는다. 간혹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주제넘은 패배한 전사들로 치부된다. '불법 사람은 자기 권리, 인권을 주장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땅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주름살과 상처투성이의 기구한 삶, 미등록 이주노동자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이는 시인은 찾아볼 수 없다.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삶일진대, 그 누가 다소곳하게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추방반대 캠페인 중인 이주노동자들
▲ 추방 반대 미등록 이주노동자 추방반대 캠페인 중인 이주노동자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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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참 많이 좋아졌다고요? 천만에요!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다문화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함께 더불어 사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하던 말들은 다문화라는 단어 앞에 맥을 못 추고 자리를 뺏겼다. 결혼이주민, 이주노동자, 유학생 등이 방송이나 영화와 같은 미디어에서 주요 소재로 다뤄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양념으로 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주 요리가 될 정도로 다문화 관련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언론뿐만 아니라 정부부처와 지자체, 기업과 시민단체들이 만든 다문화 관련 행사와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다보니 결혼이주민들을 사업 대상으로 끌어들여 한복을 입히고, 김치를 만들고 나눠주며 생색내기에 여념이 없다. 이처럼 범람 수준의 다문화 담론은 일반 대중에게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대중은 "요즘 참 많이 좋아졌어"라며 모든 외국인이 다문화 정책의 수혜를 받겠거니 생각한다. 그런 말 속에서는 상대적 박탈감과 어느 정도의 질시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다문화라는 말이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수록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문화 구성원이면서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못 내는 현실에 직면한 이주노동자, 특히 체류 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속과 추방의 대상이며, 법의 보호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들은 '차라리 다문화, 다문화 말이나 하지 말지, 왜 말로는 대접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차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편, 반 다문화정책을 외치는 사람들도 '반만 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민족, 대한민국에 다문화가 웬 말이냐!'며 다문화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에게 다문화정책은 대한민국에서 당장 중단되어야 할 악의 축이다. 다문화정책이 외국인 범죄의 온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다문화정책 중단 요구에 문화 이슈는 없고, 이주노동 이슈만 있다. 그것도 이주노동자는 미등록자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곧 범법자다'는 전제를 깔고 접근한다. 인종적 혐오와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구국단체인 것처럼 포장한다.

반 다문화정책을 요구하는 단체들은 '불법 체류자'라는 단어를 인간 존재 자체가 '불법'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이주노동자가 국내에 체류하며 하는 모든 행위를 불법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심지어 당연한 인권을 주장하는 것마저 불법이라고 매도해 버린다. 그들에게 '외국인 불법 체류자 추방'을 핵심 국정과제로 선택한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대의 영웅일지 모른다.

반 다문화단체들은 '불법 체류자'를 '불법 노동자'로 규정한다. 유엔이주노동자권리협약이 체류 기간을 넘긴 노동자들을 '미등록 이주노동자'라고 부른다고 말하면 콧방귀를 뀐다. 그들은 비자 기간이 만료된 행정사범을 형사범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다문화정책 수혜자로 보이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위해 행위를 가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어떠한 위해 행위를 취하는 개인 혹은 집단은 만만한 상대방을 고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외국인 혐오 집단의 시각에서 볼 때 가장 만만한 상대가 바로 이주노동자다. 그 중에서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손쉬운 먹잇감이다. 배타적 국수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외국인 혐오주의자들은 같은 국적자에게는 그나마 우호적이다. 현실적으로 결혼이주민들은 그들의 뒷배를 봐주는 한국 국적의 가족이 있기 때문에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국민 정서상 국민의 배우자에게 위해 행위를 했을 때, 쏟아질 비난을 감내할 자신이 없는 이들은 만만한 상대로 이주노동자를 선택한다.

다문화정책 중단을 요구하는 이들은 이주노동자를 다문화정책의 최대 수혜자로 호도한다. 그들이 설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주노동자들, 특히 미등록자들은 다문화정책 수혜 대상에서는 늘 배제되고 있는데 말이다.

권리는 주장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 권리를 주장할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이들이 다수인 것이 우리사회 이주노동자들이다. 체류 자격을 갖고 있든, 체류 자격을 갖고 있지 않든지, 그들은 모두 우리 시대 소시민이요, 이웃으로 와 있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경외는 단순히 체류 자격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놓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땅의 이주노동자들은 합법이라 해도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해'라고 보는 시선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시선 속에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말한다.

이주민도 인권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도 인권이 있습니다.
▲ 이주노동자 캠페인 모습 이주민도 인권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도 인권이 있습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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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권리도 인권입니다."

이주노동자도 이 땅에서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웃이며, 우리 사회를 위해 일하는 구성원이다. 입으로는 세계화를 외치면서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반세계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시정해야 한다. 이주노동자가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말하기에 앞서 그들이 비인간적인 상황에 몰리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는 게 우선이다. 최소한 세계 속에서 당당한 대한민국을 이야기하려면 그래야 한다. 그럴 수 있어야 한다.

해외에서 한국인이 지나갈 때마다 뒤에서 한국어로 "*발새끼"라는 욕을 들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깊이 되새겨볼 필요도 없다.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귀국했을 때 한이 맺혀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사람의 도리이다. 우리도 가난한 나라일 때 서독과 중동, 일본, 미국으로 꿈을 찾아 떠났다. 지금도 미국에선 트럼프의 반 이민행정명령에 조마조마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교민이 20만을 넘는다. 출입국 단속을 피하다 죽은 친구의 주검 앞에서 눈물 훔치던 이주노동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국 사람도 나라 밖에서는 외국 사람인데, 왜 불법 사람, 불법 사람 하나요?" 

한 인간을 '불법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아직도 단일민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단일민족, 씨족혈연, 피를 중시하는 것들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는 긍정적인 의미의 민족주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폐쇄적인 단일민족은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무조건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그들을 동정하고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한 인간의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이는 시인이 돼 보자는 것이다. 아!, 김남주 시인의 심성이 그립다.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⑧] 그 사람, 어떻게 살고 있을까?


태그:#이주노동자, #미등록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 #불법 사람,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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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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