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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이 죽고, 17명이 중상을 입었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지난 11일자로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보호소 시설은 변한 게 없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사회의 시선 역시 변한 게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그간 가까이서 지켜봤던 피해자들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 기자 말

"타인보다 우수하다고 고귀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고귀함은 과거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다." -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무엇이 정신적으로 높고 소중한 가치가 있는지, 누군가가 지체나 신분이 높은지를 알려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과거보다 '더' 나아짐이 있느냐를 살피라고 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좀 낫다고 고귀한 것이 아니다. 지난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인격이든 뭐든 나아지는 게 있어야 진정 고귀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귀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고귀함에 대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말을 빌려 생각하니 서글프다. 그들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없었고, 반성도 전혀 없었다. 그저 '재수 없게 일이 터졌다'는 푸념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자랑하듯 건물 외벽에 큼지막하게 '외국인과 공존하는 열린사회 구현'이라는 표어를 걸어놓았다. 그러나 표어는 언제나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이주노동자, 특별히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대하는 출입국 관료들에게서 '고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단속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말할 것도 없고, '보호'라는 명목으로 구금하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출입국은 숱한 이주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과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없었고, 털끝만큼의 반성도 없었다. 그저 '재수 없는 일이 터졌다'는 푸념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불법체류자가 죽어나가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상이었다.

보호라는 이름의 가증스러움


보호(保護)
1. 위험이나 곤란 등이 미치지 않도록 잘 지키고 보살핌
2. 잘 지켜 원래대로 보존되게 함

굳이 국어사전을 들추지 않아도 '보호'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그리 나쁘지 않다. 정말 따뜻하고 푸근하며 안정감을 주는 말이다. 누군가의 '자유'와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은 '보호'라는 단어 앞에 부들부들 떨며 경기를 일으킨다. 마치 저승사자를 보는 듯이 무서움에 오금이 저린다고 한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붙잡으면 '보호한다'고 말한다. 보호를 요청한 사람이 없고, 그 누구도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데 굳이 보호하겠다고 나선다. 보호받는 측은 자유를 외치고, 어떻게든 자유롭게 숨 쉴 공간을 찾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출입국 보호는 인권의 반대말이 되고 말았다.

자유와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사용할 줄 알았던 보호라는 말은 저승사자의 가증스런 가면이었다. 보호하겠다고 나선 측은 있는데, 보호받겠다는 사람이 없다 보니 양측 사이엔 늘 긴장이 감돌았다. 그 가운데 인명 사고에 대한 징조는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출입국 행정에서 고귀함을 찾을 수 있으려면 '징조'가 있었을 때에 예방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스스로 그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외부에서 누차 이야기할 때 듣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다. 출입국은 27명의 사상자를 낸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이전에 '보호'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망 사건들에 주의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외면했다.

사고 예방이 상식이 아니라는 출입국

새벽 4시 30분. 달빛은 스러진 지 오래고 새벽은 아직 어스름한 시간이었다. '쿵' 하는 소리에 수원출입국관리소 보호실에서 밤새 뒤척이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네 명은 가까운 곳에서 자동차 충돌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 그런데 먼저 눈을 부비며 일어선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셀림이 없어요! 셀림이에요."

당직 직원이 급하게 달려왔고 인원을 확인했다. 한 명이 비었다. 보호실에서 하루를 보낸 터키 출신 코스쿤 셀림이었다. 자동차 충돌 소리로 알았던 '쿵'하는 소리는 셀림이 6층, 18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며 낸 소리였다. 보호실에 같이 있던 중국인들이 바깥 형편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출입국 직원에 의해 곧바로 제지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로 50㎝ × 세로 20㎝, 보호실 화장실 채광창을 덮고 있던 아크릴판이 위로 젖혀 있는 것을 보았다. 셀림이 보호를 마다하고 자유를 얻은 대가는 죽음이었다. 골반과 갈비뼈 골절, 장기파손과 과다출혈이 원인이었다.

아크릴 판이 젖혀 있다.
▲ 가로 50 x 세로 20센티 보호실 채광창 아크릴 판이 젖혀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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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후, 출입국은 당직 직원이 쿵 하는 소리를 들었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근무태만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상식적으로 누가 18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릴 것을 상상이나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창은 세로로 고작 15센티 남짓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그전에 아크릴판을 젖히기까지 상당한 시간 동안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창문 높이 20센티를 15센티 남짓이라고 강변했지만 머리를 집어넣을 수 있고, 너비가 건장한 성인 어깨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했다.

무엇보다 출입국은 낮에 채광창 너머로 보이는 수원출입국 교통안내 표지판이 높이를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지적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구금된 사람들이 승강기로 올라와서 자신들이 얼마만한 높이에 있었는지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아 했다. 그들은 셀림 건 때문에 고작 넉 달 전 사건까지 다시 입에 오르내릴까 봐 쉬쉬하기에 바빴다.

출입국이 쉬쉬 했던 사건은 마흔 살의 중국 여성이 4층 유리창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관리 직원이 네 명이나 있던 대낮에 발생한 일이었다. 출입국은 보호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었는지 점검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진상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유족을 불러 유해송환을 독려했다. 공권력이 단속 혹은 구금 중 사망한 이주노동자를 위해 직접 돈을 지불하며 유족을 불러 오는 일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출입국은 사건 무마에 총력을 기울였다.

같은 기관에서 똑같은 일이 불과 넉 달 만에 일어났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게 출입국은 자신들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억울함만을 호소했다.

"제정신이면 뛰어내리겠어요?"

18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고 유리창을 깬 사람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사고 예방은 상식이 아니었다. 그런 사고를 상상한다는 게 오히려 비상식이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문책만 의식한 관료들은 그 누구도 철저한 원인 규명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 과정 중 또 다른 이주노동자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려 들지 않았다.

단속과 추방 과정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가 극단적인 선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고만 했다. 보호를 강제당한 자의 고통은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예견되었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두 번의 사망 사고에서 수원출입국이 보여 준 태도는 출입국 행정의 안이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책임자 처벌이나 단속추방정책의 문제점을 다시 헤아려 살피는 노력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바로 1년 전에 일어났던 코스쿤 셀림 사망 사건은 법무부 출입국이 진상조사를 통해 외국인 보호 과정의 문제들을 철저하게 개선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러나 출입국은 골든타임을 놓쳐 버렸다.

그 뿐 아니다. 2005년과 2006년, 시민사회 단체나 국가인권위원회, 학계 등이 이주노동자 단속 및 외국인보호소 실태 조사를 하고 외국인 '보호(소)' 운영에 대한 개선을 권고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입국은 보호 과정의 인권침해에 대해 "몇 사람 만나보고, 출입국의 모든 행정을 폄훼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시민단체 의견을 거부했다. 그렇게 숱한 징조는 무시되었고, 보호 명목의 인명 피해는 반복되었다.

그 결과 막을 수 있었던 27명의 인명피해를 낸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는 슬프게도 시민사회단체의 실태조사와 지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보호소 운영에 대한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함을 일깨웠다.

이주노동자 강제 단속과 추방 정책, 외국인보호소 운영 실태 등에 대한 규탄이 있었다.
▲ 코스쿤 살렘 사망 규탄 집회 이주노동자 강제 단속과 추방 정책, 외국인보호소 운영 실태 등에 대한 규탄이 있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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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의 보호소 수용은 범죄자 구금이 아닌 강제출국을 위한 신병확보를 목적으로 한다. 구금된 이들 중에는 월급과 퇴직금을 못 받은 사람도 있고, 산재 피해자들도 있다. 당장 귀국 항공료를 마련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귀국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결국 외국인보호소 구금 기간은 길어지며 적정 수용인원을 초과할 수밖에 없다.

과밀한 외국인보호소 내 인권현실을 잘 보여준 사건이 2007년 2월 11일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사건'이다. 10명이 죽고, 17명이 중상을 입는 대형사고가 발생했지만, 출입국은 구금자들이 탈출하기 위해 '방화'를 시도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사건 진상을 규명한다고 했지만, 왜 사람이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없었다. 그런 현실을 아는 이주노동자들은 외국인보호소를 '감옥'이라고 하지, '보호소'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출국에 앞서 결코 거치고 싶지 않은 곳이다.

앞서 말했듯이 출입국은 수원출입국 사망사건에서 외국인 보호 정책의 문제점을 해결할 단초를 찾았어야 했다. 사후약방문이라고 하지만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난 뒤에라도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했다. 하지만 참사 후 출입국은 희생자들에게 '방화'를 시도한 혐의가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사건 진상규명을 한다고 하면서 방화 여부를 추궁하기에 바빴고,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화재로 왜 사람이 죽게 됐는지에 대한 구조적 인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출입국 직원들은 화재 연기로 숨넘어가는 외국인들의 요구를 '보호'라는 명목으로 묵살했다. 공권력에 의한 명백한 살인 행위였다.

여수외국인보호소는 구금 시설에서 소방장비의 기본이라 할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음이 드러나 더욱 경악하게 했다. 화재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출입국이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 별반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말했다.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이 말은 '이주노동자'에게도 해당한다. 이 땅에 온 이주노동자들이라고 인정 욕구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주노동자들은 마치 인정 욕구가 없는 사람처럼 대우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어엿하게 성공해서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국에 왔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한 줌 재가 되어 돌아간 일들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이주노동자도 가족이 있고, 위험이나 곤란 등이 미치지 않도록 잘 지키고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라는 이웃과 대중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국인보호소 참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과밀한 외국인보호소 운영실태가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보호소에 갇힌 자들이 체류 자격이 없다고 비난만 하는 이들에게 "노동력을 불렀더니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지금이라도 출입국은 숱한 이주노동자 피해자들 앞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인정했는지 되물어야 한다.

이어집니다 :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⑤] 이주노동자 목숨도 귀한 목숨이다.


태그:#이주노동자, #죽음,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미등록이주노동자, #출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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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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