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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가장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에 대북 지원이 꾸준히 줄었다. 통계는 그가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음을 보여준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대기중이던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대기중이던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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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헌법 격인 유엔 헌장 제1조에 따르면, 유엔은 세계 각국의 ①평화와 안전 ②평등과 자결(스스로 결정함) ③인도주의 실현을 위해 존재한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이 중 세 번째에 해당한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웃 중 하나다.

농업은 낙후했고, 만성적인 식량난과 질병·위생 문제에 시달리며, 재난 대처도 취약일 뿐만 아니라 경제까지 중국에 의존적이다. 고로 유엔은 북한을 도울 의무가 있다. 각 회원국이 어떤 이념과 체제를 갖고 있던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게끔 돕는 것은,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을 스스로 천명한 유엔의 헌장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다. 이상의 세계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 훈훈한 엔딩으로 끝날 테지만, 현실 세계의 북한은 회원국들에게 도움은 받으면서 평화는 위협하는 존재인 양 느껴질 수 있다. 핵무기 개발 때문이다. 그렇다고 21세기의 유엔이 북한과 전쟁을 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전쟁은 늘 인류에게 상상 이상의 피해를 안긴다.

1950년대의 유엔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남한을 지켜낸 것은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회원국들에게 한국전쟁은 전쟁은 역시 피해야 할 일이라는 교훈을 재확인시켜준 계기였다. 한국전쟁 당시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거나 포로로 붙잡힌 유엔군은 15만 4481명에 달했다. 애초에 유엔 탄생 배경도 1, 2차 대전을 겪은 강대국들이 상시적인 협상 테이블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한다.

평화를 지향하는 것은 유엔 본연의 임무다(제1원칙). 고로 회원국들은 전쟁을 자제하고 군비축소를 해야 한다(제2원칙). 그런데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한다. 그렇다고 1950년대처럼 북한과 전쟁을 할 수도 없다(제1원칙과 상충). 딜레마에 빠진 유엔은 이 딜레마를 새로운 딜레마로 대체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군사 제재를 가할 수는 없으니 북한이 핵 실험을 할 때마다 결의안을 채택해 경제 제재를 가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도 유엔의 또 다른 이상인 인도주의 실현과 모순된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유엔은 인도주의를 실현해야 한다(제1원칙). 북한은 가난하다. 고로 북한을 도와야 한다(제2원칙). 제대로 도우려면, 매번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익혀 자립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경제 교류와 개혁·개방 활성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경제 제재를 가하면 정반대로 북한이 고립된다. 결국, 유엔은 북한을 간간이 돕되 근본적으로는 자립 못하게 막는 모순에 빠진다(제1원칙과 상충). 모순에 빠진 대표적인 회원국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먼저 진정성 있는 비핵화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 이상, 취약 계층만을 지원할 것이며 민간 교류 재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 결과 남북 관계는 거의 단절됐고 긴장은 지속돼왔다.

숫자는 보여준다, '반기문은 무능했고 한국에 관심도 없었다'고

그런데 지난 10년간 유엔 회원국들과 북한의 이러한 모순적인 관계에 중심에 섰던 장본인이 나타났다. 바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다. 10년간 이 관계 유지에 일조했으면 했지, 남북 관계 진전에 기여한 게 없는 그가 지난해 5월 방한 당시 꺼낸 말은 의외였다. "대북 압박을 계속하면서도 인도적으로 물꼬를 터 가며 대화하고 긴장을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반기문의 '투 트랙 대북 정책'은 이명박-박근혜의 '선 비핵화, 후 교류 확대 정책'과 '얼핏' 다르게 들릴지도 모른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안보·통일 문제의 적임자라고 계속 주장한다. 지난 15일 그는 천안함 기념관을 둘러본 후 한반도 문제에 대해, "(나는) 과거 외교부 장관과 유엔 사무총장을 했기 때문에 잘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연 그가 한반도 문제의 적임자일까.

빨간색 점선은 추세선이다.
▲ <그림1> CERF의 지난 10년간 대북 지원 현황 빨간색 점선은 추세선이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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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래프는 유엔 중앙긴급구호기금(CERF)의 지난 10년간 북한 지원 현황이다. CERF는 반기문 직전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의 마지막 임기인 2006년에 설립됐다. CERF는 유엔 산하의 국제기구들 각각이 도움이 필요한 회원국들을 지원하던 관행을 바꿔 하나의 통합된 기금에서 관리하게끔 한 것이다. 보다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지원을 해준다는 취지에서다.

북한은 반기문 임기 첫해인 2007년부터 CERF 체제에 속해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북한을 편입시킨 건 반기문이 사무총장이 안 됐어도 누군가 했을 일이다. 실제로 CERF가 출범한 2006년에는 33개국만 지원을 받았지만, 2007년부터 45~55개국이 지원을 받아왔으며 북한은 2007년부터 한차례도 지원 대상에서 빠진 적이 없다. 그만큼 북한의 사정은 어렵다.

그런데 위 그래프를 보자. 초록색 선은 실제 대북 지원 현황이고 빨간색 점선은 그 추세를 나타낸 것이다. 추세선을 보면 반기문의 사무총장 1기(2007~2011) 임기 말까지는 증가 추세였던 대북 지원이 1기 임기 말부터 2기(2012~2016) 임기 내내 계속 줄다가, 반기문의 귀국이 임박할 때가 돼서야 '갑자기' 늘어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롭다. 보통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평가는 1기보다는 2기에 더 냉정히 이루어진다. 아직 연임에 성공 못한 1기 때 사무총장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기후변화 등 무난한 의제에 집중할 수 있다. 따라서 평가는 관용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2기 때는 연임에 성공한 이상 도덕적 권위를 활용해 강대국들에게 안보·인도주의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2기 내내 대북 지원이 줄었다?

대선 주자로서 강점을 내세워야 할 귀국 임박 시점이 다가오자 '갑자기' 늘었다? 지난 18일 <오마이뉴스> 대선 기획취재팀은 반 전 총장의 10년 치 연설문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반 전 총장이 귀국이 가까워질수록 '갑자기' 한국(KOREA)을 언급하는 빈도가 늘었다는 사실도 지적됐다(관련 기사: 한국 정치 담쌓던 반기문, 임기 말 "코리아, 코리아!").

<그림2> 반기문 한국 언급 추이
 <그림2> 반기문 한국 언급 추이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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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마시라. 반 전 총장이 임기 말이 돼서야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부랴부랴 대북 지원을 늘리고 한국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는 '주장'은 아니다. 필자도 이러한 현상이 '우연의 일치'라고 믿고 싶다. 유엔이라는 조직도 아무리 수장인 사무총장일지라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만한 조직은 아닐 것이다. 각 기구는 나름의 원칙과 논리를 갖고 운영될 것이다.

실제로 CERF의 2015~2016년 대북 지원 상세 내역을 확인해보니 홍수(flood)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했다. 갑작스러운 재난 때문에 지원이 증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팩트'는 2015~2016년에 대북 지원이 갑자기 는 이유가 무엇이든 적어도 2009~2014년에는 대북 지원이 꾸준히 줄었다는 것이다.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가장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에. 그런데도 반기문은 자신이 한반도 문제의 적임자라고 주장한다.

반기문은 자신이 "외교부 장관과 유엔 사무총장을 했기 때문에"라는 근거를 들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논리는 빈약하다. 유권자에게 중요한 정보는 그가 단순히 장관, 사무총장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장관, 사무총장이었느냐다. 숫자는 2010~2014년에 반기문이 대북 지원을 많이 이끌어내지도 못했고, 한국에 관심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기문의 방식으로 통일이 될 수 없는 이유

CERF가 10년간 북한에 지원해준 돈은 총 1억 1819만 달러다. 얼핏 커 보이는 숫자 때문에 이 돈의 성격을 오해하지는 말자. 지원 내역을 확인해보면 식량(food), 농업(agriculture), 건강과 영양(health-nutrition), 식수와 위생(water and sanitation) 등. 대북 지원 목적이 인도주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원 항목마다 구체적인 사유도 기술돼 있었다.

북한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빠지는 것을 간신히 막을 정도의 돈일 뿐이다. 통일 비용 측면에서 봐도 남한에 손해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2006년부터 2016년까지 CERF에 총 3800만 달러를(한화 약 447억 원) 기부했다. 그런데 북한이 국제 사회로부터 1억 1819만 달러를(한화 약 1390억 원) 받았으니 한반도 전체로 보면 난국을 굉장히 싸게 막은 셈이다.

하지만 CERF의 지원은 '긴급' 지원일 뿐 북한의 경제적 자립까지는 돕지 못한다. 그때그때 물고기를 주지 물고기를 잡는 법을 익히게 돕진 않기 때문이다. 반기문은 이 물고기를 주자는 호소조차 잘 안 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일 반기문의 2기 임기 '북한' 관련 담론 지도를 분석한 결과를 보도했다(관련 기사: '통일 대통령' 반기문? 과대평가 혹은 기회주의).

<그림3> 반기문 '북한' 관련 담론 지도.
 <그림3> 반기문 '북한' 관련 담론 지도.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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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처럼 지난 5년 치 반기문의 연설문을 분석한 담론 지도에서 '북한'은 '도움' '지원' '격려' 같은 키워드와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 또한 북한 문제를 거의 북한 스스로 핵 개발을 한 책임으로만 돌리는 가운데, 핵 비확산 조약인 NPT를 무기로 압박하는 데 앞장선 입장인 것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반기문은 유엔과 북한의 교착 상태를 유지해왔을 뿐이다.

그 결과 한반도 평화와 인도주의 어느 것도 제대로 실현 못했다. 반기문의 결정적인 잘못은 '평등과 자결'이라는 유엔의 두 번째 이상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다. NPT와 유엔은 모순을 내장한 불평등 조약,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NPT는 핵 비보유국들의 핵 무장을 막을 뿐 정작 핵보유국이 핵 무장을 해제하도록 강제하지도 않고 뚜렷한 성과도 없다.

유엔 역시 안전보장이사회 5개국(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이 실권을 쥐고 있다. 북한의 핵 개발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이다. 다만 북한이 2003년 1월 NPT를 임의 탈퇴한 뒤 경제 제재를 감수하면서까지 유엔에 도전하는 것을 마냥 비난하기에는, 다른 회원국들도 명분이 약해지는 부분이 있다. 강대국에 유리한 불평등한 질서를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미 동맹 관계로 인해 운신의 폭이 작은 한국 정부보다, 좀 더 자유롭게 도덕적 권위를 활용해 강대국들을 압박할 수도 있었다. 평화라는 유엔의 이상이 한낱 종이의 잉크가 되지 않으려면, 북한을 비판할 때 NPT와 유엔 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미국 등도 비판하며 '너희들도 군비 감축하라' '안보리 의결 시스템 바꾸자'고 했어야 옳았다.

인도주의라는 유엔의 이상이 한낱 종이의 잉크가 되지 않으려면, 북한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결의안을 채택할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를(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이유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제외한 민간 교류를 끊은 사건) 만류했어야 옳았다.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마저 폐쇄했을 때 비판 성명을 냈어야 옳았다.

하지만 반기문은 옳은 일들을 하지 않았다. 평화와 인도주의는 회원국들의 '평등'이 전제되지 않은 한 실현될 수 없는 일임에도, '협의'라는 미명 하에 강대국들의 뜻을 거슬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반도에서 평화도, 인도주의도, 평등도 이룩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반기문의 방식으로는 통일이 되기 어려운 이유다.


태그:#반기문, #유엔,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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