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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중학생의 다짐

무려 11번이나 읽었던 그 시리즈
▲ 이문열의 삼국지 무려 11번이나 읽었던 그 시리즈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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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爲知己者死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위 구절은 중국 <사기; 자객열전>에서 자객 예양이 자신을 아껴주던 주군의 암살자를 죽이기로 결심한 이후 했던 말이다. 해설서에 따라서는 앞의 '士'자를 '사람'이나 '사나이' 혹은 '남자'라고 달리 번역하는데, 나는 중학생 때 삼국지를 읽다가 이 문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사나이는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고? 한창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던 14살 남아에게 위 구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멋지지 않은가. '남자는 의리'라고들 하는데.

이후 나는 오랫동안 여기저기에서 이를 인용하고 다녔다. 내가 마치 삼국지의 관우인냥 충성의 대상을 고민했다. 시대가 바뀌어 목숨까지는 내놓지 못하더라도,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 생각은 시간이 지나 성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士'자를 남자가 아닌 사람으로 해석하게 되었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조직을 들어갈 때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았고, 그가 나를 인정해주는 만큼 일을 했다.

문제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인데, 다행히 그런 사례는 거의 없었다. 아직 사회 경험이 미천한 탓도 있겠지만, 지금껏 나를 인정해준 사람이라면 기꺼이 나의 생각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생각에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을 수밖에.

그런데 이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영화 <밀정>을 보고난 이후였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매국이라도?

왜 임시정부를 배신했습니까?
▲ 영화<밀정>의 한 장면 왜 임시정부를 배신했습니까?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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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여겨봤던 씬은 이정출(송강호)과 김우진(공유)이 처음 만나 술을 마시는 장면이었다. 김우진은 자신을 의심하며 접근했던 이정출에게 왜 임시정부를 배신하여 친일경찰이 되었냐고 묻는다. 그에 대해 이정출은 앞선 언급한 바로 그 문구를 인용한다.

"사람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이정출에 감정이입 되었다. 물론 그 역을 소화한 송강호의 출중한 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정출의 대답이 너무도 인간적이었으며,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과연 내가 이정출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오로지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임시정부가 나를 어처구니없이 대우해줘도 참고 있었을까? 아니면 비록 매국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히가시 경부를 위해 임시정부를 배신했을까?

어려운 질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임시정부를 선택했겠지만, 난 흔들렸다. 아무리 민족과 국가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개인의 자아실현이 우선이지 않을까? 국가와 민족이 나를 하찮게 여긴다면 일본경찰이 되는 것이 존재의 의의를 찾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게 결국 친일파의 논리인가?

다행히 영화에서 이정출은 일본을 배신하고 의열단 쪽에 선다. 조선 독립도 원했겠지만 무엇보다 그를 지지하던 히가시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히가시는 이정출과 하시모토(엄태구)를 충성경쟁 시킨다. 이정출과 히가시 사이에 더 이상의 신뢰는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정출의 선택은 자명하다. 내 존재의 가치를 좀 더 인정해주는 의열단 쪽에 서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영화 <밀정>은 나의 시금석에 균열을 냈다. 영화는 아무리 자신을 알아봐주는 이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그이의 선택이 잘못이라면 되돌아 봐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내가 타자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면 난 거부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영화는 나를 알아봐주는 이가 사람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비록 아무도 나를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나의 행동이 역사에 부끄럽지 않다면 나의 신념과 양심이 나를 믿어주는 타자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나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준거를 찾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게 아닐까?

주군을 모시는 이들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멀리 돌아왔다. 내가 굳이 중학교 때 시절까지 언급하며 저 구절을 끄집어 낸 것은 요즘 시국을 보다보면 아직도 저 문구에 사로잡혀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 현 국민의당 대표에게 '충성충성충성'이란 문자를 보냈던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와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이 바로 그들인데 그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김기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혜훈 의원
▲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김기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혜훈 의원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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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등장한 이혜훈 의원의 증언을 보자.

"박근혜 의원이 우리랑 같이 있지 않는 자리에도 늘 '주군'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어요. '주군이 하명하시면...' 본인보다 선수도 아래고 나이도 아래인 어린 여성 의원에게 주군, 하명 이런 단어를 쓰는 걸 보고 굉장히 충격적으로 놀랐습니다."

이는 한때 박근혜 대통령의 심복이라 불리며 12월 탄핵 당시 '탄핵이 가결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등 온갖 막말을 쏟아낸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와 급이 다르다. 이정현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그가 오로지 박 대통령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른 만큼 거래적 요소가 있지만,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그렇지 않다.

이정현 의원에게 충성은 '충성충성충성'으로 희화할 수 있는 개념일지 몰라도,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충(忠)이란 '한자로 쓰면 중심'(2015년 1월 2일 비서실 시무식)으로서 그의 정체성에 닿아 있다. 따라서 그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충성의 대상이었던 박정희 '각하'의 따님이시며, 절대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의 정점인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태도가 헌법에서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민주 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국정을 운영하며, 국가의 원수가 국민의 직접 또는 간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에 의해 교체되는 체제로서 절대 권력자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근대의 충성은 '짐이 곧 국가'이기에 왕을 대상으로 했지만, 민주공화국에서 충성의 대상은 국민이라 칭하는 공동체, 더 나아가 현재의 우리를 이루고 있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신념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근대 민주공화국의 올바른 충성이다.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윗선으로 꼽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17일 오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에 출석하고 있다.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윗선으로 꼽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17일 오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에 출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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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주군을 위해, 그리고 그 체제를 위해 권력을 누려왔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이제 역사의 법정에 서있다. 그 동안 그가 모셔온 주군은 한낱 허깨비였음이 드러났으며, 그의 권력 운용 방식은 이 시대에 맞지 않은 것임이 명명백백히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부디 그가 21세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에게 충성하기 바란다. 역사의 법정에서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충성이라는 것을 명심하기를.


태그:#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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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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