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 해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영화보다 더욱 영화같은 일들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년이 흐른 뒤, 후대는 오늘을, 그리고 오늘을 살아간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은 찰나의 연속일 뿐인 현재에 과거의 흔적을 덧입힌다. 즐거운 기억과 의미 있는 역사는 오늘을 향긋하고 비옥하게 하지만 어떤 과거는 고통과 무력감만을 더할 뿐이다. 그러나 그 역시 기억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어떠한 기억도 없이 오늘에 떨궈진 존재란 과연 얼마나 얄팍한가.

삶의 특정한 지점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정리하는 건 지혜로운 습관이다. 먼 항해에 나선 배가 목적지를 잃지 않는 건 거듭 항로를 수정하기 때문이다. 풀만 먹는 소도 되새김질을 해서 살이 찐다. 스치듯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 의미 있는 기억을 만들고 그로부터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는 것, 그게 바로 역사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한 해 한국 영화계에 있었던 일을 정리해볼까 한다. 모두 세 편으로 나눠 쓰는 기획으로 상편에선 지난 12달 극장가 풍경을 돌아보고, 중편에선 한국사회에 긍정적 파문을 남길 수 있었을 좋은 영화임에도 고전한 작품을 살펴보며, 하편에선 지난 한 해 한국영화계에서 발생한 의미 있는 일을 되새기려 한다.

[해오름달] 월 2000만 관객선 붕괴, 꽁꽁 얼어붙은 한 달

히말라야 2015년 12월 16일 개봉한 <히말라야>는 전국 누적관객수 775만을 기록했다. 1월 박스오피스 1위.

▲ 히말라야 2015년 12월 16일 개봉한 <히말라야>는 전국 누적관객수 775만을 기록했다. 1월 박스오피스 1위. ⓒ CJ 엔터테인먼트


극장가에서 통상 1월은 매력적인 작품이 넘쳐나는 시기다. 겨울방학 특수를 노린 한·미 블록버스터가 연말연초에 개봉해 힘을 겨루는데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주요 부문에 이름을 올린 검증된 작품이 여럿 개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6년도 1월 극장가는 그야말로 꽁꽁 얼어붙었다. 1월 한 달 동안 전국 극장에 든 관객은 1690만여명으로 지난 3년 간 이어온 1월 2000만 관객 돌파기록을 어이없이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예년보다 훨씬 수준 높고 다채로운 작품이 개봉했는데 아카데미 출품작인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빅쇼트> <헤이트풀8>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1월 박스오피스 3위 <레버넌트>를 제외하곤 충분한 스크린을 배정받지 못하고 빠르게 관객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얼어붙은 극장가에서 흥행세를 주도한 영화는 250만 관객을 모은 <히말라야>였다. 통상 매달 최고 흥행작이 500만 내외의 관객을 모으는 걸 고려하면 매우 저조한 수치다. 올해 월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영화 가운데 이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둔 영화는 비수기인 3월 220만 관객을 모은 <귀향>뿐이다.

여기에 더해 <오빠생각> <그날의 분위기> <나를 잊지 말아요> <조선 마술사> 등 기대를 모은 한국영화도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들며 1월 극장가는 극심한 침체를 겪었다. 병신년 첫달 개봉영화가 거둔 저조한 성적은 올 한 해 극장가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전조처럼도 느껴졌다.

[시샘달] <검사외전>의 독주? 황정민의 독주!

검사외전 2월 3일 개봉한 <검사외전>은 970만 관객을 모았다. 2016년도 흥행순위 2위.

▲ 검사외전 2월 3일 개봉한 <검사외전>은 970만 관객을 모았다. 2016년도 흥행순위 2위. ⓒ (주)쇼박스


2월은 반전의 달이었다. <검사외전>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작품이 없어 침체가 지속될 것으로 우려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검사외전>의 흥행세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월초부터 치고나온 <검사외전>은 한 달 동안 무려 950만 관객을 끌어들이는 파괴력을 과시했고 이달 한국영화 스크린 점유율을 전달 45%에서 62%까지 끌어올렸다.

중순 이후엔 마블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데드풀>, 디즈니의 역량이 한껏 발휘된 <주토피아>,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 등이 흥행세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이들은 각기 다른 매력을 바탕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 비교적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했다. 전달보다 440만여 명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은 데는 이들 영화의 힘이 자리하고 있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성취를 거둔 작품도 있었다. <동주>와 <캐롤>은 제작비가 많이 들지 않은 비교적 작은영화임에도 완성도 면에서 호평이 이어졌고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은 담론을 재생산했다. 표현과 수용, 그리고 재표현의 과정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가능성을 확인하게 했다.

다만 아카데미 시상식이 선택한 <스포트라이트>는 박스오피스 10위 진입에 실패했고 전년도 오스카를 거머쥔 에디 레드메인의 <대니쉬 걸> 역시 9만8000명의 관객과 만나는데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물오름달] 영화를 통한 시민사회 의제의 확대 재생산

귀향 2월 24일 개봉한 <귀향>은 전국 358만 관객이 들었다. 3월 박스오피스 1위.

▲ 귀향 2월 24일 개봉한 <귀향>은 전국 358만 관객이 들었다. 3월 박스오피스 1위. ⓒ (주)와우픽쳐스


개학과 맞물려 전통적 비수기로 꼽히는 3월은 기대작의 부진과 함께 작은 영화들의 군웅할거가 이어졌다. 절대 강자 없이 3편의 영화가 100만 이상, 8편의 영화가 4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소소한 흥행을 이어갔다. 규모 면에서 단연 눈에 띈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개봉 직후부터 수준 이하라는 평가가 쏟아져 흥행에 힘을 받지 못했다.

3월 박스오피스 1위는 <귀향>으로 전년도 12월 28일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는 여론과 맞물려 지속적인 흥행을 이어갔다. 시민사회 차원에서 대관상영, 무료상영 등 여러 이벤트가 진행돼 영화를 통해 사회적 의제가 '확대 재생산'되는 긍정적인 파문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당초 기대작이라 할 만한 영화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대작으로 꼽힌 영화마저 부진하자 전체적인 관객 급감은 피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한국팬들을 찾은 알렉스 프로야스의 <갓 오브 이집트>가 선전한 게 <귀향>을 제외하면 3월 극장가에서 유일하게 언급할 만한 부분이다.

[잎새달] 명불허전, 마블 히어로물의 독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4월 27일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전국 누적관객수 867만을 달성했다. 병신년 흥행순위 3위.

▲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4월 27일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전국 누적관객수 867만을 달성했다. 병신년 흥행순위 3위.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볼 영화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4월 한 달 동안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달 말 개봉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개봉하자마자 침몰을 시작한 가운데 <시간이탈자> <날, 보러와요> <해어화> 등 4월 개봉한 기대작 역시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비교적 괜찮은 평을 받은 <클로버필드 10번지> <독수리 에디> <라스트 홈> <트럼보>가 있긴 했지만 이들은 또 다른 시련과 마주해야 했다. 충분한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하고 박스오피스 하위권에 처박히고 만 것이다.

이런 부침 속에서 4월 최고 흥행작 자리는 2월 17일 개봉한 <주토피아>가 차지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그러다 4월 27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개봉하자 이 영화가 단숨에 최고 흥행작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 2016년 한국 극장가에서 이변이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법이다.

4월 한 달 전국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999만 명으로 올 한 해 최저치를 기록했다. 4월은 영화업계 종사자들에게 참으로 잔인한 달이었다.

[푸른달] 한국과 미국 상업영화가 달성한 최고의 지점

곡성 5월 12일 개봉한 <곡성>은 전국에서 687만 관객이 봤다. 병신년 흥행 8위, 5월 박스오피스 1위 기록.

▲ 곡성 5월 12일 개봉한 <곡성>은 전국에서 687만 관객이 봤다. 병신년 흥행 8위, 5월 박스오피스 1위 기록.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5월은 <곡성>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압도한 한 달이었다. 이달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한국과 미국의 상업영화계가 달성한 최고의 지점을 번갈아 만나는 호사를 누렸다. 이들 영화는 지난 몇 달간 영화다운 영화에 목말라 있던 영화팬들을 해갈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안에 담긴 세계관은 때로 지나치게 종교적이거나 폭압적이었고 때로 현대사회에 대한 교묘한 은유였으나, 그를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만족스러운 감상이 되었으리란 점만은 분명했다.

두 영화는 나란히 500만이 넘는 관객을 나눠 가졌고, <엑스맨: 아포칼립스>와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 1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아 뒤를 이었다. 규모 있는 네 작품의 질주 뒤에는 채 십만을 넘기지 못한 많은 작은 영화의 좌절과 예술영화관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의 폐관이 자리했으나, 여기까지 눈길을 돌리는 여유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5월은 연초 침체에 빠진, <검사외전> 단 한 편을 제외하고, 한국 극장가가 용트림한 시기였다. 이달부터 연말까지 내내 극장가엔 기대작이 끊이지 않았고 그 가운데 몇몇은 기록할 만한 성취를 거뒀다.

[누리달]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아가씨 6월 1일 개봉한 <아가씨>는 전국 누적관객수 428만 명으로 6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 아가씨 6월 1일 개봉한 <아가씨>는 전국 누적관객수 428만 명으로 6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 CJ 엔터테인먼트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접전의 장이 될 것이라 점쳐졌던 6월 극장가의 패권은 박찬욱의 <아가씨>가 거머쥐었다. 한 달 동안 백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영화가 무려 8편이 나왔는데 <아가씨>는 4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 독보적인 1등을 차지했다.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역할이 없지 않았겠으나 박찬욱의 이름값과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입소문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가씨>는 같은 기간 흥행순위 2위에 오른 존 파브로의 <정글북>을 거의 더블스코어로 따돌리며 6월의 주인공이 됐다.

6월 한 달 동안 8편의 영화가 100만관객을 넘겼다. 이건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 있는 일이다. 2012년 이후의 기록은 확인해봤으니 적어도 2012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은 분명하다. 2015년 1월 <국제시장> 등 7편, 2012년 12월 <레미제라블>을 비롯해 7편, 같은해 8월 <도둑들>을 포함해 7편이 한 달 동안 100만관객을 넘어섰다. 하지만 8편은 처음이고 그것도 <아가씨>가 홀로 4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한 상황에서 여러 작품이 많은 관객을 나눠가졌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 8편은 <아가씨> <정글북> <컨저링 2>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엑스맨: 아포칼립스>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곡성>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거나 주목받는 감독의 작품이거나 한국에서 대형회사를 끼고 제작·배급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려 8편이 100만을 넘겼지만 이들 아래로는 참담한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다.

어느 때보다 많은 8편의 흥행작, 그리고 어느 때보다 많은 흥행실패작이 공존하는 6월이었다.

[견우직녀달] 역전도 이변도 없다

부산행 7월 20일 개봉한 <부산행>은 2016년도 유일의 1000만영화로 누적관객수 1156만명을 기록했다. 한국극장 역대 흥행 9위.

▲ 부산행 7월 20일 개봉한 <부산행>은 2016년도 유일의 1000만영화로 누적관객수 1156만명을 기록했다. 한국극장 역대 흥행 9위. ⓒ NEW


역전도 이변도 없는 7월이었다. 7월 한달 극장에 든 관객 2623만 명 가운데 상위 7편의 영화가 모은 관객이 2200만 명에 달했다. 7월 한달 극장서 상영된 영화가 무려 422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위 0.016%의 영화가 전체 관객의 80%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7월엔 압도적인 흥행세의 <부산행>을 필두로 <나우 유 씨 미 2> <도리를 찾아서> <봉이 김선달> <인천상륙작전> <굿바이 싱글> <제이슨 본>이 연달아 100만을 넘겼다. 모두 한국과 미국의 영화였는데 그중 할리우드 영화 3편은 모두 시리즈 및 스핀오프였다. 최근 몇 년의 흐름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할리우드 상업영화는 소위 '먹히는' 이야기의 확대·재생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참고로 전달 100만 관객을 넘어선 할리우드 영화 가운데 시리즈는 역시 3편으로 <컨저링 2>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 <엑스맨: 아포칼립스>였다.

한국영화는 4대 투자배급사 가운데 하나인 NEW의 <부산행>을 비롯해 CJ엔터테인먼트의 <봉이 김선달>, 쇼박스의 <굿바이 싱글>이 활짝 웃었다. <부산행>은 개봉 열흘만에 800만 관객을 그야말로 빨아들였다.

[타오름달] 불타는 한국영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밀어내다

터널 8월 10일 개봉한 <터널>엔 712만 관객이 들었다. 병신년 흥행 5위, 8월 박스오피스 1위.

▲ 터널 8월 10일 개봉한 <터널>엔 712만 관객이 들었다. 병신년 흥행 5위, 8월 박스오피스 1위. ⓒ (주)쇼박스


극장가 최대 성수기 8월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 텐트폴 영화(대형 기획사가 성수기를 겨냥해 내놓은 기대작)가 우세를 보였다. 지난해 8월 쌍끌이 어선처럼 1000만 관객을 수확한 <베테랑> <암살>만큼은 아니었으나 <터널>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부산행>이 박스오피스 1위부터 4위까지를 사이좋게 점하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저 아래로 밀어냈다.

기대를 모은 <수어사이드 스쿼드> <제이슨 본> <스타트렉 비욘드>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았다. 이들의 부진은 3년 연속 8월 3000만 관객 돌파를 내심 기대한 영화팬들에게 커다란 아쉬움을 남겼다. 8월 한달 극장을 찾은 관객은 2994만 명이었다.

8월 한국영화 스크린 점유율은 올 한 해 최고인 68%를 기록했다.

[열매달] 씨앗을 심어야 열매가 맺힌다, 독재와 친일의 상처

밀정 9월 7일 개봉한 <밀정>은 전국 누적관객수 750만명을 기록했다. 병신년 흥행 4위, 9월 박스오피스 1위.

▲ 밀정 9월 7일 개봉한 <밀정>은 전국 누적관객수 750만명을 기록했다. 병신년 흥행 4위, 9월 박스오피스 1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9월은 김지운 감독의 <밀정> 외엔 이렇다 할 작품이 보이지 않았다. 기대를 모은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100만 문턱을 넘기도 힘겨워보였고 그보다 작은 영화들은 더욱 고전했다. 티무르 베크맘베토브의 <벤허>와 이병헌이 출연한 <매그니피센트 7>도 기대만 못한 성적을 거뒀다.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을 이뤘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밀정>의 흥행세는 그 모두를 씻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월 <검사외전>이 그랬던 것처럼 관객들은 오직 <밀정>을 보러 극장을 찾았다. 이 영화가 생산한 독립운동 및 친일청산과 관련한 담론은 지난 2015년 <암살> 이후 한국영화가 던진 가장 매력적인 화두인 듯도 보인다.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미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노장의 귀환도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과 우디 앨런의 <카페 소사이어티>가 그 영화들이다. 여기에 노장이라 부르기엔 아직 젊지만 중견은 한참 지난 팀 버튼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도 개봉해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나이 지긋한 외국 감독의 활발한 작품활동을 보고 있자면 문화예술을 말살한 독재정권의 폐해가 얼마나 지독하게 지속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안타까울 뿐이다.

[하늘연달] 하늘이 열렸다더니 뚜껑이 열리네

럭키 10월 13일 개봉한 <럭키>엔 모두 697만 관객이 들었다. 병신년 흥행 7위, 10월 박스오피스 1위.

▲ 럭키 10월 13일 개봉한 <럭키>엔 모두 697만 관객이 들었다. 병신년 흥행 7위, 10월 박스오피스 1위. ⓒ (주)쇼박스


모든 면에서 상상을 초월한 10월이었다. 연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됐고 관객이 된 국민은 그 참담한 수준에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했다. 영화로 치면 졸작도 그런 졸작이 없었다. 그러니 망작이 돼야 마땅한데 사건은 10월을 넘어 내년까지 전 국민이 보는 스크린에 걸려 있을 태세다.

10월은 적어도 한국에선 영화의 달이었다.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 최고의 영화축제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 작고 초라했다. 어느덧 21살, 사람으로 치면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동남권을 휩쓴 태풍 차바보다 더욱 매섭고 끈질긴 부산시의 외압엔 의연할 수 없었다. 올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관람객은 15만5149명으로 지난해 22만7377명보다 27.4%가 줄어들었다. 문화가 부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창작과 수용, 표현과 공유의 자유라는 걸 우리는 또 한 번 아프게 깨우쳤다.

그래도 10월 극장가엔 작은 희망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만년 조연 유해진의 주연작 <럭키>가 570만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것이다. 조연배우 가운데선 독보적인 톱스타지만 그에게도 첫 도전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테다. 가끔은 누군가의 성취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끈해진다. 내겐 <럭키>가 거둔 성공이 꼭 그랬다.

<럭키>의 뒤를 이어 마블의 야심작 <닥터 스트레인지>가 4일만에 250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마블은 올 한 해 '데드풀'과 '닥터 스트레인지' 두 인기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 DC코믹스가 배트맨과 수퍼맨, 원더우먼을 모두 들이붓고도 혹평만 받아든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미틈달] 182편이 개봉했다는데 다들 어디로?

신비한 동물사전 11월 16일 개봉한 <신비한 동물사전>은 370만 관객이 봤다. 11월 흥행순위 1위.

▲ 신비한 동물사전 11월 16일 개봉한 <신비한 동물사전>은 370만 관객이 봤다. 11월 흥행순위 1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관객 수 1200만. 한 영화에 든 관객이 아니다. 11월 한 달 동안 한국 극장을 찾은 관객 수다. 한국사회 전반을 뒤흔든 국정농단 파문의 여파가 극장가에까지 영향을 미친 걸까? 같은 달끼리 따져보면 최근 5년간 독보적으로 낮은 수치로 지난해보다 무려 300만이 넘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볼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놀랍게도 11월 한 달 동안 무려 182편의 영화가 한국 극장에 개봉했는데 이는 올 한 해 가장 많은 개봉작 수다. 물론 보통의 관객에게 이는 수치일 뿐이다. 대다수의 경우 개봉 소식을 듣기도 어려울 뿐더러 극장을 찾아도 만날 수 있는 영화는 손에 꼽는 게 현실이니까.

11월 극장가에서 1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모두 4편이다. 2편은 지난달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와 <럭키>이고, 11월 개봉작 가운데서는 <신비한 동물 사전>과 <형>이 100만을 넘겼다. 이들 중 세월의 가혹한 심판을 견뎌낼 영화가 과연 있을까? 나는 답할 수 없다.

[매듭달] 이 영화로 병신년 한 해를 매듭짓자

판도라 12월 7일 개봉한 <판도라>는 현재 12월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있다.

▲ 판도라 12월 7일 개봉한 <판도라>는 현재 12월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있다. ⓒ NEW


기독교 경전인 <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번성했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단 열 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을 맞는다.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 구체적인 죄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의 죄악에 분노한 신이 유황불을 퍼부어 두 도시를 멸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아브라함은 신에게 열명의 의인이 있으면 도시를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지만 끝내 열명의 의인이 없어 도시는 비극을 피하지 못한다.

좋은 영화를 아브라함이 의인 구하듯 간절히 찾는 영화팬들에게 12월은 의미 깊은 한 달이 됐을 테다. 예술적 깊이와 사회적 메시지, 개인적 울림을 선사하는 훌륭한 영화들이 여럿 개봉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정우의 <판도라>와 데이미언 셔젤의 <라라랜드>는 관객과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며 박스오피스 1, 3위에 랭크됐다. 황금종려상을 생애 두 번째로 받은 존경하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12월 개봉해 한국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

아직 끝나지 않은 12월, 극장에서 이들 영화를 보는 건 당신이 2016년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병신년 부산행 검사외전 밀정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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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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