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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하며 논란을 불러올 때마다 그의 말 속에는 '노력'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었다. 지난 5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언론 간담회에서 그는 "국가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제가 그런 말(반기문 대망론)을 안 했는데 자생적으로 얘기가 나오는 데 대해 개인적으로 '제가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고 [노력]한 데 대한 평가가 있구나'하고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모두가 그를 대권 주자로 인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를 '역대 최악의 유엔 사무총장'으로 평가한 외신 보도가 새삼 이슈화된 이유다.

그러자 반 총장은 10월 전미 한인 리더십 콘퍼런스에서 "상선약수는 내 좌우명이다. 물은 지혜, 유연함, 부드러움을 상징한다. 유엔을 이끌며 이 덕목을 적용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를 <동아일보> 등 일부 언론은 대선에서 '최악의 사무총장'이라는 평가가 퍼지는 게 불리한 만큼, 스스로를 동양적 리더로 포지셔닝 하는 대응 논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결과는? 역시 모두가 반 총장 본인의 생각처럼 그를 봐주지는 않았다. 그가 전임 총장 코피 아난에 비해 난민, 분쟁, 질병 등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우려'만 표한다는 평가가 또 새삼 이슈가 됐다(관련 기사: 반기문 그는 오늘도 '우려'한다 / http://www.ziksir.com/ziksir/view/3384#cb). 최근에 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해 "우려를 갖고 지켜보고 있다. 한국 헌법기관의 성숙함과 힘을 믿는다"는 말을 남겨 이 평가에 도장을 찍자 일부 누리꾼들은 '우려왕 반기문'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5일 오후 제주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이후 약 1년 만에 방한한 반 총장은 이날 제주포럼 환영 만찬에 참석할 예정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5일 오후 제주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이후 약 1년 만에 방한한 반 총장은 이날 제주포럼 환영 만찬에 참석할 예정이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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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물이 아닌 불을 들고 나온다는 점에서 현란하다. 지난 20일(현지 시각) 한국 특파원들과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이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한 몸 불살라서 [노력]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문자 그대로 '물불 안 가리고' 출마를 기정사실화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왔다.

물불, 우려왕, 기름 장어, 최악의 사무총장 등 그를 전형화하는 말은 많다. 하지만 현재의 평가들은 그의 말 몇 마디, 친노와의 불화 등 일화로부터 추론된 것이거나 외신 몇 편에 의존하는 한계가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참고 자료가 있다면 <시사인> 천관율 기자가 반기문의 1기, 2기 임기 10년 치 외신을 분석한 기사 정도다(관련 기사: 어디에도 없는 반기문/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6301).

천 기자는 유엔 사무총장(secretary-general)이 사람들의 편견만큼 실권을 가진 자리는 아니며, 1기 때는 실권을 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을 의식하는 비서형(secretary) 총장이 될 수 있음을 소개한다. 그러나 연임에 성공한 후에는 도덕적 권위를 앞세워 민감한 현안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장군형(general) 총장이 될 수 있는데, 막상 외신을 분석해보니 반 총장은 2기 때도 영향력 없는 '투명 인간'에 가까웠다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천 기자는 반 총장에 대한 "어디에도 없는 남자"라는 <포린폴리시>의 평가가 국제 사회의 인식을 대표한다는 논증에 성공한다. 이로써 우리는 훌륭한 참고점을 하나 획득한다. 다만 외신의 프리즘을 벗어나 반기문 리더십이 국내 실정에 맞는지 검토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외신이란 이해관계에 따라 혹평을 쏟아내다가도 얼마든지 논조의 방향을 틀 수 있다.

반 총장을 "역대 최악의 사무총장"이라 혹평하던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남자"라고 평가하던 <포린 폴리시>는 파리기후변화협정을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으로 성사시켰다며 그를 '세계의 사상가 100인' 중 한 명에 선정했다. 한편 미국판 <허핑턴포스트>는 반기문의 상대로 유력한 문재인이 당선되면 박근혜의 대외정책을 뒤엎는 것 아니냐는 계산을 내놨다. 지금도 이러한 데이터는 쌓이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게 많지만 외국의 관점에만 기댈 수도, 당장 '물불 안 가리고' 출마 의지를 드러내는 그의 말 몇 마디로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반 총장의 발언권을 보장하되, 그 목소리에 장기간 나타난 일관성을 발견하는 절충안은 어떨까. 2012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그의 5년 치 연설문을 수집해 그 담론 지형을 살펴봤다.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보다 더 센 놈이 나타났다

<그림1> 반기문 연설문 의미망.
 <그림1> 반기문 연설문 의미망.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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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누리집에 반 총장의 1, 2기 연설문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반 총장이 1기 때는 무난한 의제인 기후변화에 집중했으므로 2기 당시 민감한 의제들인 ①평화와 안보 ②핵 ③테러와의 싸움 ④군비 감축 ⑤에이즈와 보건 문제 ⑥아프리카 이슈 ⑦인도주의 업무 관련 연설문 396만3963자, 200자 원고지 1만6011매 분량(장편소설 16권을 쌓아놓은 높이)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분석에는 R, 시각화에는 노드엑셀 등의 도구를 사용했다.

우선 그가 어떤 말을 많이 했는지 단어 빈도수를 분석해봤다. 뚜껑을 열자 가장 먼저 깨지는 편견이 있다. 반 총장이 하는 일이 우려하는 것'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우려를 너무 많이 한다는 대중의 비판은 대체로 맞았다. 그는 5년간 881번의 연설에서 셋 중 한 번은(316번) 최소 한 번 이상 '우려'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공통 어간을 갖는 단어들을 통일해 추출한 7560개 단어 중 49위다. 엄청난 서열이다. 대중의 직관이 옳았다.

하지만 사실 우려보다 센 실세들이 있다. <그림1>은 반 총장이 언급한 단어들 사이의 연관 규칙(arules)을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그린 담론 지도다. 이 단어들은 연설에서 반 총장이 언급한 확률이 50% 이상인 단어들이다. 선으로(→) 연결된 두 단어는 함께 등장할 확률이 50% 이상, 출발 단어를 언급할 때 도착 단어도 언급할 확률이 80% 이상임을 뜻한다. 복잡한 설명을 걷어내면, 이 담론 지도는 반 총장의 연설문에서 핵심만 뽑아낸 것들이다. 이렇게 기준을 높이면 언급 횟수 48위 시리아조차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시리아의 구체적 현실은 참혹하지만, 보편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국제기구의 관점에서는 시리아도 하나의 회원국이기 때문이다.

유엔이 어떤 구체적인 문제에 접근하든 그 이전에 기본적인 지향점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반기문의 이상은 뭘까. 지도의 2시부터 6시 방향까지 보라색 점들에 주목하자. '세계' '인류' '권리' '평화' '안보' '개발(성장)'. 국제 기구의 수장이라면 중요하게 여길 만한 사안과 가치들이다. 그러나 고려하지 않으면 비난받을 뿐 고려했다고 칭찬받을 만한 것들도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반 총장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느냐인데, 이것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린다. 리커창 중국 총리나 메리 로빈슨 아일랜드 대통령 같은 외국 지도자들은 '반기문은 사회적 약자를 재조명했다'고 호평했고, 팔레스타인 시위대는 '이스라엘과 미국 편만 드는 자'라며 신발을 던졌다. 한국인은 어떠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남북 관계 이슈를 검증해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후속 기사에서 다루고 여기서는 이상과 실천의 연결고리부터 추적해본다.

우선 모든 국제 문제와 해결의 중심에는 '나라'들이 있다. 유엔의 '구성원'은 회원국들이다.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할 책임이 있고 '정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일'이 돌아가려면 '리더'들도 움직여야 한다. 그럼 문제는 정확히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까. 나라들을 둘러싼 초록색 점들에 주목하자. 어떤 나라들은 '지원'이 '필요'하고 '도움'을 줘야 한다. '정부'와 '위원회'들이 나서야 한다.

그런데 지원과 도움이란 주는 쪽 입장에서는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실현의 결과이자 현실이다. '헌신'은 명백한 수단이지만, 헌신의 영단어 커밋먼트(commitment)는 '위원회'를 뜻하는 커미리(committee)와 공통 어간을 가져 중첩되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수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때 지도 가운데에 일관되게, 또 꿋꿋하게 고개를 든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 '노력'이다.

단어 빈도수 분석을 해보면 반 총장은 881번의 연설에서 셋 중 두 번 꼴로(559번) '노력' 운운했다. 전체 단어 중 공식 서열은 13위이지만 가지치기를 하고 나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남는 이 전가의 보도야말로 비공식 서열 1위인 것이다. 사람들이 반 총장의 별명을 짓는다면 '우려왕'보다는 차라리 '노오력왕'이라고 지어줘야 옳다.

구조를 때리지 못 하는 '노오력'은 사회의 결과값을 왜곡한다

<그림2> 반기문 '시리아' '우려' '노력' 관련 담론 지도
 <그림2> 반기문 '시리아' '우려' '노력' 관련 담론 지도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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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반 총장이 임기 동안 무슨 노력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회원국들에게 '노력해달라'고 촉구하는 노오력을 했다'는 답이 가장 모범 답안에 가깝다. 문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반기문 체제 하의 유엔이 평화 유지에 실패했다는 게 통설이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유엔이 시리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약간 오해가 있다. 간단한 연관성 탐색(findAssocs)으로 '시리아' '우려' '노력'과 함께 언급될 확률이 25% 이상인 단어들을 살펴보자.

<그림2>의 점의 크기는 각 단어들이 얼마나 자주 언급됐는지, 선의(-) 굵기는 단어들이 얼마나 함께 언급됐는지 나타낸다. 간명한 시각화를 위해 단어들을 '시리아' '우려' '노력'를 중심으로 뭉치되 다른 단어들끼리의 관계는 생략했다. 분위기를 대강만 살펴봐도 반 총장이 시리아에 대한 상황 인식이 전무했던 것도, '우려' '노력' 운운할 때도 맥락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 노력이 근본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실체 없는 노'오'력에 그치고 마는 이유는 뭘까.

반 총장은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를 바꿀 의지가 있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어떤 점에서 유엔은 꽤 모순적이고 불평등한 조직이다. 그래서 유엔 사무총장직을 어떤 사람들은 '독이 든 성배'라고도 한다. 유엔은 공식적으로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추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과 분담금을 많이 내는 강대국들이 승인한 의제만을 추진하는 시스템을 초창기부터 유지하고 있다. 물론 다그 함마르셸드 등 몇몇 '장군형 총장'들처럼 이 모순에 도전하던 송곳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반 총장의 리더십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림3>은 경제학자들이 소득 불균등 정도를 확인할 때 쓰는 '로렌츠 곡선'을 변형한 것이다. 반 총장은 10년간(2007년 1월 1일부터 2016년 10월 24일까지) 155개국, 1594일간 출장을 떠났다. 발걸음은 다소 불균등하게 분배됐다. 그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303일 즉 약 19%를 분배했다.

<그림3> 반기문 '불평등 곡선'. 지니계수는 약 0.59
 <그림3> 반기문 '불평등 곡선'. 지니계수는 약 0.59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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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시리아에 방문한 것은 단 2일. 이조차 시리아 내전 발발 전이다. 국제회의는 제1세계 국가들에서 자주 열리지만, 한정된 임기 중 회의를 할수록 정작 분쟁, 재난, 빈곤 국가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유엔의 보편 이상은 실체를 감추는 역설이 발생한다. 반 총장은 이 구조적 모순에 '유효타'를 때리기보다는 이 모순을 받아들이는 조건 하에서 무언가를 해보는 선택을 했다.

이러한 류의 리더십은 국내 실정에 맞을까. 국내 지난 12일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6'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일생 동안 노력을 한다면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2015년 기준 국민 21.8%만이 '매우 높다' '비교적 높다'라고 답했다. 반면에 '매우 낮다' '비교적 낮다'라고 답한 비율은 62.2%였다.

노력이 투하되는 조건을 바꾸지 않는 갈등 회피적 리더십이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든 이유다. 노력주의는 단기 성과를 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근본적인 문제들을 '노력 부족' 정도로 정리 처분해버림으로써 공동체가 산출할 수 있는 결과값을 점점 왜곡한다.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면, 노력주의 리더십은 새로울 것 없는 '이미 한 번 파산한 리더십'의 동어반복이다. 이것을 역수입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이 치를 기회비용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방향이 어긋난 노력은 노력이라기보다는 노'오'력이기 때문이다.


태그:#반기문, #UN사무총장, #대선, #우려, #기름장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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