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주의! 이 글에는 영화 <사이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회는 서로를 속이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믿음 위에 성립한다. 이를 뒤에서 깨뜨리고 앞에서 교언영색 하는 사기꾼과 그 추종자들을 사람들은 사이비(가짜)라 부른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도 주권자로부터 '진정한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즉 '사이비'라는 통첩을 받았다. 물론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4%는 존재한다. 그중 유난한 행보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박사모)' 등을 포함한 보수단체 회원들이다.

이들은 지난 3일과 12일 탄핵 반대 집회를 열었다. 박사모 측은 카페 공지로 기자들에게 12일 집회에 대해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와 52개 참여단체가 공동 주최한 것이고, 탄기국 산하단체 회원은 20% 내외이며 나머지는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반 애국시민들임을 분명히 해달라"고 밝혔다. 필자는 이들의 의사를 존중하나, 집회의 주된 취지를 보면 어쨌든 박 대통령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범 박사모'로 볼 수 있기에 이 글에서는 호칭을 '박사모'로 통일한다는 점 양해 바란다.

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
▲ 박사모 등, 헌재앞 '탄핵 반대' 대규모 시위 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박사모는 독재와 계엄령에 열광하고 민주주의는 사치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면 선악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나뉜다. 국가와 국가의 화신인 박근혜(박정희)를 지키는 것은 애국보수이고 탄핵을 주장하는 것은 좌파들의 선동이자 혼란이다. 지난 3일 집회 참가자들의 호응을 받은 현장 발언을 보자(☞관련 기사).

12월 3일 동대문 디지털 프라자 앞 보수단체 집회 현장 발언 중
"어쩌면 박 대통령에겐 최고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장롱에 넣어두었던 비장의 칼을 꺼내 들어야 합니다. 계엄령은 선포할 수 없다지만, 좌파들의 억지와 횡포에 그 칼을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암덩어리들을 모조리 들어내야 합니다. 어차피 망가질 대로 다 망가진 대한민국입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보다는 좌파언론의 양파 까기식 의혹 제기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길은 좌파들에게 끌려만 왔던 정국을 혼란의 위기에서 이제 우리 애국동지 여러분 여기 있는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눈치 볼 게 뭐 있습니까. 좌파들에게 보여줄 것은 독재뿐입니다. 이들에겐 민주주의는 사치입니다. 민주화를 앞세워 독재를 전횡한 건 바로 좌파들입니다. 이들은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강력한 독재뿐입니다. 박정희식, 전두환식이 아닌 박근혜식 독재의 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광우병이 천안함이 연평도가 강정마을이 그리고 세월호가 사드 배치가 백남기 사망 물대포의 전리품이 생각보다 시원치 않다 보니 최순실이라는 카드를 꺼내서 이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 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일부 시민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아예 박사모를 동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단계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 최근 한 누리꾼은 박사모 카페에 영국 <BBC>가 "촛불 집회는 선동의 결과"라고 논평했다는 기사를 올렸다. 일부 박사모 회원들은 여기에 호응했고 웃음거리가 됐다. 사실 기사가 아니라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라는 곡의 가사였지만, 영어를 배운 적 없는 기성세대가 대부분이라 몰랐던 것이다.

이는 촛불 집회가 무지함의 결과인 듯 생각하고 싶어 하는 박사모의 자가당착과 무지함을 역으로 전시해 '박사모는 애초에 지성이 없는 존재다'라는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공론장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았다. 진보 성향 누리꾼들의 입장에서는 통쾌함을 느낄 수도 있는 해프닝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박사모를 조롱한들 세상이 달라질까 의문은 남는다.

영화 <사이비>(2013) 포스터.
 영화 <사이비>(2013) 포스터.
ⓒ NEW

관련사진보기


불과 몇 달 전까지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층 30%는 안 무너진다는 냉소가 팽배했다. 이 상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심지어 박근혜의 지지율이 한때 60%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최소 56% 시민들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은 박근혜에게 당한 '배신'이지 깨어있다는 사람들의 조롱은 아니었다.

혹자들은 4% 중 가장 극성스러운 박사모를 이해해서 뭐에 쓰느냐 물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박사모의 인간성까지 상상해내는데 성공하면 그보다 관용적인 이들의 인간성도 능히 상상할 수 있고, 아직 허약한 공동체의 지반을 확장시킬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혹자들에게는 박사모가 한낱 미몽의 존재일지 모르나 어떤 점에서는 박사모도 과계몽된 이들이다.

박사모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거론하며 "좌파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낯설지 않은 계몽주의적 독단까지 느껴진다. 다만 그들이 깨어있다는 사람들과 정반대라면 2008년 촛불집회에 유언비어와 검역 주권 사수라는 그늘과 빛이 모두 존재했음에도 전자에만 집착한다는 거다. 2016년 촛불은 2008년 촛불보다 성숙해졌음에도 박사모는 여전히 지도자를 맹신하고 동료 시민들은 불신한다.

주권자 다수의 판단처럼 박근혜가 사이비 대통령이라면 박사모도 필연적으로 사이비 추종자라 해야 한다. 전자는 처벌, 후자는 사회로 복귀시킬 대상이다. 박사모의 맹목적 믿음만을 지적해 사이비라 한다면, 이들에게 극단적인 믿음과 의심이 공존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사이비의 조건은 맹신이기 이전에 불신은 아닐까? 영화 <사이비>(감독 연상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새삼 곱씹어 볼 수 있는 사회 고발 애니메이션이다.

박사모의 인지부조화, '불신'에서 비롯됐다 

영화 <사이비> 스틸컷.
 영화 <사이비> 스틸컷.
ⓒ NEW

관련사진보기


영화의 배경은 종말의 음울함을 풍기는 시골 마을이다. 댐 개발로 마을은 물에 잠길 예정이며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상실한다는데 두려움을 느낀다. 이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믿음 즉 희망이 필요하다. 이때 최 장로와 성 목사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기적을 빙자하며 천국에 갈 수 있게 돕고 함께 살 수 있는 기도원을 지어주겠다며 꼬드긴다.

그들이 차린 비닐하우스 임시 교회 역시 흡사 선거철 지역구 후보들의 선거 캠프를, 주민들이 줄지어 헌금통에 개발 보상금을 넣는 장면은 투표 장면을 연상시킨다. 딸 영선의 대학 등록금을 노름판에서 날리고 읍내에서 주취 난동을 피우다 최 장로와 시비가 붙었던 민철만이 그 정체를 안다. 파출소에 끌려갔다 수배 전단에서 최 장로의 얼굴을 본 것이다.

문제는 민철이 옳은 말도 상스럽게 전하는 우악스러운 인물이라는 것. 민철은 "정말 술집에 최 장로가 나타났었느냐"는 경찰의 물음에 마담이 답할 찰나 화를 돋워 일을 그르친다. 수배 전단을 보고 잠시 놀란 마담의 표정이 "쌍년아 대번에 보면 알지"라는 민철의 말에 바로 일그러지며 "누구보고 쌍년이래? 맞긴 뭘 맞아"라는 엉뚱한 답이 튀어나왔기 때문.

오늘날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깨어있다는 사람들이 종종 옳은 말도 주체 못 할 격정적 어조에 실어 보내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며, 이것이 야권의 확장성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라 지적된 지 오래다(강준만 <싸가지 없는 진보> 참조). 밤 예배 중이던 최 장로와 마을 사람들을 발견하고 민철이 가장 먼저 던진 말도 "에라 미친놈들아"이다.

영화 <사이비> 스틸컷.
 영화 <사이비> 스틸컷.
ⓒ NEW

관련사진보기


민철은 최 장로가 사기꾼이라고 폭로하며 주민들을 꾸짖고 딸 영선과 성 목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마을 사람들은 민철의 말을 믿기는커녕 사탄이 들렸다며 혐오스러워한다. 마치 '종북'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이후 최 장로의 부하들에게 끌려갔다가 탈출한 민철은 경찰을 데려오고 경찰은 성 목사와 마을 사람들에게 수배 전단을 내민다.

사람들은 잠시 놀라더니 곧 이구동성으로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민철의 태도 외에도 공동체의 파멸을 재촉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 등의 인지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태도의 일관성이 깨질 때 불쾌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 불쾌함을 없애고자 태도를 조정하는 심리가 발동한다.

이 성향은 사이비 집단일 경우 더 심하다고 한다. <사이비>의 마을 사람들의 경우 이제까지 최 장로와 성 목사를 믿고 따랐다. 그런 그들에게 수배 전단을 들이밀면? 잠깐 흠칫하겠지만, 인지부조화 이론과 일치하는 사람일수록 '닮은 사람일 거야' '잘못 봤겠지'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등의 사고 회로를 거치며 태도를 조정할 것이다. 박사모 역시 평생 박근혜를 믿고 따랐다. 사람들은 박사모가 맹목적으로 박근혜를 신격화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박사모 카페를 모니터링하면 의외로 치밀하다(?)는 인상을 받는 구석들이 있다.

예컨대, 탄핵에 반대하면서 헌법재판소에 증거주의 재판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이 굳이 동어반복을 안 해도 재판은 원래 증거주의를 따르는데도 말이다. 설사 '무죄(탄핵 기각)'결정이 내려진다고 해도 실정법상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 죄가 없다는 뜻과 동의어는 아니다. 법은 정치, 도덕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기존에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정치적, 도덕적으로 충분히 비판 가능한 것들이 법의 영역에서는 제재를 받기 까다로울 수 있다. 그래도 주권자의 정치적, 도덕적 판단 역시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인데, 탄핵 이슈를 애써 '법'에만 소급시키려는 박사모를 지켜보면 정치와 윤리는 없는 개념인 것처럼 못 본 척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스럽다.

영화 <사이비> 스틸컷.
 영화 <사이비> 스틸컷.
ⓒ NEW

관련사진보기


현재 박사모는 최순실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고 있다. 이 역시 경찰이 다녀간 후 더는 최 장로를 찾지 않고 성 목사에게만 의존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박사모가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 등을 사생활 문제로 축소하며 야권 정치인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도 성 목사를 옹호하며 사탄의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박사모는 박정희와 박근혜를 진심으로 사랑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걸까? <사이비>의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을 또 그 아들이라 주장하는 성 목사를 진심으로 사랑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걸까?

박사모 회원들 개개인에게도 마을 사람들이 수배 전단을 받아든 그 잠깐의 '순간' 같은 것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기존의 믿음을 한 번쯤 의심해보는 순간.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런 균열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때 개개인을 반성과 인지부조화 중 후자로 끌어당기는 힘이 무엇인지 정답이 없을 뿐, 고민해볼 만한 실마리는 있다.

박사모는 동료 시민들을 믿고 현실의 헬조선을 헤븐조선으로 만드는 일보다, 철저히 애국을 외치고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고집하며 과거회귀적 성향을 보인다. 한편 <사이비>의 수몰 예정 마을 사람들도 서로를 의지해 자신들끼리 새 공동체를 꾸리기보다, 외지인 성 목사에게 의지하며 기도원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결국 이들 모두가 공동체의 상실을 두려워하며 구원의 가능성을 찾지만 정작 동료들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공동체는 상실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이비란 맹신이기 이전에 불신의 문제일 수 있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시자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천국 들어갈 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벌써 한자리 차버렸으니 어쩌면 좋아유"라고 말하는 주민의 모습은 이를 암시한다.

박사모는 과연 박근혜를 '진심으로' 사랑할까?

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
▲ 박사모 등, 헌재앞 '탄핵 반대' 대규모 시위 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앞서 질문했던 '박사모는 정말 박근혜를 사랑할까?'라는 물음에 필자는 선뜻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가 주저된다. 지금의 박사모의 모습은 과거 박정희 시절 '센 놈에게 붙어야 산다'는 그들 나름의 생존 전략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박사모가 어떤 결말로 치달을지 속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는 파국의 책임을 일방에게만 돌리지 않는다. 사기꾼 최 장로도, 선교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최 장로의 기적빙자 행위를 모른 척하고 살인을 교사한 성 목사도, 제때 병원에 못 가고 종교에만 의지하던 성호네 할머니와 칠성네 아주머니도 모두 죽거나 감옥에 간다.

영화의 압권은 민철의 딸 영선의 자살이다. "이놈들 가짜야!"를 집요하게 외치며 최 장로네와 맞서던 민철조차 "그분들은 제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대요. 그게 가짜면 저는 왜 태어났나요?"라는 영선의 말에 "그게 네 팔자여"라고 답한다. 그리고 민철이 돌아왔을 때, 영선이 자살한 광경을 보고 "내 말이 맞았어! 그놈들이 가짜였어!"라고 외친다. 민철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보다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증명하는데 관심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후 영화는 머리가 하얗게 센 민철이 토굴 속에서 기괴한 종교적 주문을 외우는 장면으로 끝난다. 마을은 어찌 된 일인지 물에 잠기지 않았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 지난 임기 4년처럼, 마을 사람들이 겪은 모든 일이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댐을 건설할 회사가 부도가 났을 수도 정책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자신들의 선택이 헛된 것이었음을 반성하고 다시 시작할 마을 사람들도 떠난 지 오래고, 남은 민철도 자신이 혐오하던 종교에 빠지며 영화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훌륭히 완성한다.

민철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할 때 심리적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춰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영화로부터 현실의 정답을 이끌어낼 수는 없지만 교훈은 이끌어낼 수 있다. 필자는 깨어있다는 사람들이 민철과 같은 길을 걷지는 않으리라 믿어 본다. 문제의 본질은 '불신'이다.


태그:#박사모, #박근혜, #최순실,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댓글4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