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달의 목소리> 공연 장면.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다. 공연계도 예외는 아니다.

연극 <달의 목소리> 공연 장면.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다. 공연계도 예외는 아니다. ⓒ 극단 독립극장


[기사 수정: 13일 오전 11시 38분]

근래 들어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의 모티브가 된 남자현,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겐 다소 낯설고 생소한 이름들이다. 생각해보면 남자들만 독립운동을 했으리란 법이 없는데, 그동안 왜 우리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홀대해왔을까. 이제야 비로소 그녀들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명이 있다. 수당 정정화(鄭靖和, 1900~1991). '한국의 잔 다르크'라는 수식어로 더 유명한 그녀다. 그녀가 살았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정정화는 여인의 몸으로 여섯 차례나 국내와 대륙을 오가며 독립자금을 모금한 여장부였다. 27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던 '임시정부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임정 요인 중 그녀가 해준 밥 한 끼 먹어보지 않은 이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임정 요인들의 독립투쟁은 더욱 고달팠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 오른 '임시정부의 며느리' 정정화의 삶

 연극 <달의 목소리> 세트. 책상 위에 정정화의 회고록 <녹두꽃>과 국화꽃이 놓여져있다. 연극은 이러한 상징을 통해 관객들에게 조국의 의미를 묻는다.

연극 <달의 목소리> 세트. 책상 위에 정정화의 회고록 <녹두꽃>과 국화꽃이 놓여져있다. 연극은 이러한 상징을 통해 관객들에게 조국의 의미를 묻는다. ⓒ 김경준


최근 그녀의 삶을 재조명한 연극이 무대 위에 올랐다. 구태환 연출의 <달의 목소리>다. <달의 목소리>는 정정화가 남긴 한 권의 회고록 <녹두꽃>(현재는 <장강일기>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이 출간됐다)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실제로 극을 구성하고 있는 장면과 대사들은 대부분 <녹두꽃>에서 그대로 빌려왔다. 제목 역시 <녹두꽃>의 한 대목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달은 묵묵히 어둠을 비춘다. 가장 어둡다고 생각되었을 때 오히려 달은 세상을 더욱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리고 날 비추고 있는 저 달은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묵묵히 우리 조국을 그리고 우리 역사를…. 달은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듯 비추고 있었다" - <녹두꽃> 중에서

문학 작품에서 달은 외로운 주인공의 심사를 투영하는 매개체로 묘사되곤 한다. 극 중 정정화는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도, 임시정부 가족들과 떠나는 피난길 위에서도 달에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녀에게 달이란 위로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조국과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비추던 존재. 그들은 사라져도 달은 언제까지나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산 자들의 이정표가 되어준다. 달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이들의 역사이자, 남은 자들이 지켜야 할 정의와 진실이란 가치의 표상이다.

조국의 의미를 생각하며

 지난 2013년 8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 <조국으로 가는 길> 포스터. 정정화 일가의 사진이 붙어있다. 왼쪽부터 정정화의 남편 성엄 김의한, 가운데 여성이 수당 정정화, 콧수염이 있는 노신사는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이다. 아이는 정정화의 아들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다.

지난 2013년 8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 <조국으로 가는 길> 포스터. 정정화 일가의 사진이 붙어있다. 왼쪽부터 정정화의 남편 성엄 김의한, 가운데 여성이 수당 정정화, 콧수염이 있는 노신사는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이다. 아이는 정정화의 아들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다. ⓒ 김경준


"조국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관객들에게 묵직한 물음을 던지며 막이 오른다. 무대 위에 조명이 들어오자 단정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이번 작품의 단독 주연을 맡은 배우 원영애다. 그녀는 무대 위에 놓인 책상에 앉아 <녹두꽃>을 낭독하며 정정화의 삶을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조국의 의미'를 묻는다. 관객들은 정정화의 삶을 따라가며 조국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극은 그녀의 삶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간다.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을 만나기 위해 홀몸으로 압록강을 건너 상해를 찾은 그녀.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밀명을 받고 국내로 다시 밀파된다. 1920년부터 시작된 그녀의 모금작전은 1929년까지 무려 여섯 차례나 반복된다. 여인의 몸으로 한반도와 대륙을 넘나드는 것이 무섭지는 않았을까. 당시 정정화가 느꼈을 두려움과 서운함은 배우의 대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저도 사람인데 무서웠죠. 누군가 말려주기를 바랐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어요. 서운했지만 결국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잖아요."

삼엄한 경비를 뚫고 국내를 드나들기 여러 차례, 결국 그녀의 신분이 탄로 나고 말았다. 종로경찰서로 끌려간 그녀는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모진 고문을 받는 이세창을 보게 된다. 눈물이 쏟아졌지만 끝내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그녀 앞에서 죽음을 맞았다. 분노에 찬 그녀는 "어떻게 같은 조선인끼리 이럴 수 있느냐"며 친일경찰 김태식을 원망한다. 이윽고 무대 위에 놓인 12개의 책상 중 하나에 국화꽃이 놓인다. 시아버지 김가진, 도산 안창호, 최준례(백범 김구의 부인) 그리고 백범 김구에 이르기까지 그녀와 함께했던 임시정부의 가족들이 하나둘 스러져갈 때마다 그녀는 책상 위를 국화꽃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해방 후 찾아온 조국의 냉정한 현실

 연극 <달의 목소리> 공연 장면. 그녀가 겪은 시련은 우리 모두가 겪은 아픔이었다.

연극 <달의 목소리> 공연 장면. 그녀가 겪은 시련은 우리 모두가 겪은 아픔이었다. ⓒ 극단 독립극장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왔다. 그러나 풍찬노숙 끝에 귀국한 그녀에게 조국은 냉정했다. 38선으로 나뉜 반쪽짜리 조국에는 친일파들이 옷만 바꿔 입은 채 다시 득세하고 있었다. 입국을 위해 몸수색을 받던 그녀는 자신을 수색하는 친일 경찰들을 보며 절규한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시련뿐이었다. 1949년 6월 26일, 임시정부의 대어른이었던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이듬해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와중에 남편 김의한이 납북됐다. 그녀는 하늘에 호소한다. "제가 할 일이 있거든, 차라리 저를 데려가지 왜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가나요."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끝이 아니었다.

남편의 납북으로 인해 북한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고 그녀는 종로경찰서에 수감된다. 종로경찰서는 그녀가 독립운동을 하던 와중에 수감됐던 곳이다. 해방 조국에서 '요시찰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다시 그곳에 감금되어야 했던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곳에서 그녀는 결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그 이름을 다시 보고 말았다. 김태식. 대일본제국 경찰에서 대한민국 경찰로 옷만 바꿔 입은 채, 언제 그랬냐는 듯 빨갱이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당신….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당신, 정말 부끄럽지 않나요? 스스로에게 떳떳한가요? 조국을 위해 죽어간 분들에게, 당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나요?"

다시 돌아온 조국은 그녀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그녀 역시 "정의가 정의로 대접받던 시절이 있긴 있었느냐"라며 체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극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한다. 임시정부 27년의 투쟁 역시 절망 속에서 피워낸 꽃이었다. 그들 모두 독립을 기약할 수 없는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은 채 독립운동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정정화는 조국을 위해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하며 산 자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당부한다.

"불혹이라는 사십의 나이에 비로소 조국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이역에서 산화한 이들을 동정호 물에 흘려보내면서 조국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 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 <녹두꽃> 중에서

백범의 혈의에 담긴 의미는

 연극 <달의 목소리> 무대. 대형 스크린 위로 백범이 서거 당시 입고 있던 혈의가 걸려있다. 혈의는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그 의미를 추적하게 만든다.

연극 <달의 목소리> 무대. 대형 스크린 위로 백범이 서거 당시 입고 있던 혈의가 걸려있다. 혈의는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그 의미를 추적하게 만든다. ⓒ 김경준


연극은 배우 원영애의 1인극으로 진행된다. 1시간 2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그녀는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극 중에서 그녀는 중국어 대사와 노래까지 선보인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카리스마는 관객들을 압도한다. 영락없는 정정화의 현신(現身)이다.

연극은 역사적 사실을 무대 위에 재현하는 단순한 구조를 거부한다. 무대 위 세트와 배우의 행동, 대사로 대변되는 상징을 통해 그 의미를 관객들 스스로 사유하게 한다. 예컨대 극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 뒤에 걸려있는 혈의(血衣)는 무슨 의미였을까. 막이 오르고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배우는 혈의의 의미에 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들은 막이 내려가는 순간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다. 혈의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에 입고 있었던 옷이다. 백범의 혈의는 정의가 패배하고 실종된 우리네 구슬픈 역사의 상징이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역시 기존의 역사극과는 다르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그리고 영상이 결합한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원영애는 정정화 역할을 맡은 동시에 해설자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 정정화가 되어 감정이 듬뿍 담긴 연기를 펼치다가도, 어느 순간 객석으로 들어와 감정이 절제된 담담한 목소리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해설하는 것이다. 스크린을 통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 영상도 함께 상영된다. 모든 배경 음악은 무대 한쪽에서 피아노와 첼로의 라이브 연주로 이뤄진다. 정정화가 느껴야만 했던 감정들은 피아노와 첼로의 선율로 고스란히 승화되고, 여기에 배우의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한다.

광장의 촛불로 승화한 부끄러움

극이 막을 내릴 즈음에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가 하나둘 혈의를 채우기 시작한다. 더는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지만, 사진으로 남은 그들의 눈빛에서는 여전히 독립을 위한 열망이 느껴졌다. 그 시선들을 마주하다 보니 고개를 들고 있기가 민망했다. 그들이 내게 묻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너는 정녕 우리 앞에서 그리고 후손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이처럼 '부끄러움'은 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극은 정정화의 입을 빌려 "너는 정녕 부끄럽지 않으냐"고 관객들에게 묻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촛불을 떠올렸다. 연극이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그 시간에도 광장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광장에 나온 이들은 하나같이 "부끄럽다"고 했다. 대통령이 부끄럽고, 나라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적어도 우리 국민은 불의한 권력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이들은 어땠는가. 청문회장에 나온 이들은 한결같이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며 회피와 부정,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번 사태의 주범이나 다름없는 대통령은 부끄럽다는 고백 대신 "진정성을 의심받아 안타깝다"며 자기변명에 급급했다. 그리고 모두 나라를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정정화는 자신의 삶을 통해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 길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잊은 그들에게 이 연극의 관람을 진지하게 권하고 싶은 까닭이다.

오는 18일까지 서울 대학로 소극장 알과핵에서 상연된다.

 연극 <달의 목소리> 공식 포스터. 오는 18일까지 공연된다.

연극 <달의 목소리> 공식 포스터. 오는 18일까지 공연된다. ⓒ 극단 독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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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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