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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서법이 있다. 속독으로 한 번 읽고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오랜 시간 행간의 의미를 곱씹으며 읽는 숙독파도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편한 방식으로 책을 읽지만, 좀 더 효율적인 독서법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책 한 권을 읽어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까닭이다.

나만의 독서법을 찾아서

스스로 책 좀 읽는다고 자부하는 내게도 '나만의 독서법'을 찾는 것은 오랜 화두였다.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계기는 군 복무 시절의 독서 경험에서 비롯됐다. 나는 1년 9개월의 군 생활 동안 86권의 책을 읽었다. 그런데 전역하고 보니 기억에 남는 책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독서 목록에 있는 책 제목을 보면서도 '이 책의 내용이 뭐였더라'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많았다.

고민 끝에 간서치(看書癡: 책바보)로 유명했던 후임으로부터 독서 노하우를 전수 받기도 했고, 병영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저마다의 책 읽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자연스레 다양한 방식의 독서를 시도해봤다.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음독(音讀)도 해보고, 인상 깊은 구절만 정리해 필사도 해봤다.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였다. 특히 필사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중간 중간 필기를 해야하는 탓에 책에 대한 집중력이 흐려지는 단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손이 너무 아팠다. 그렇게 고생 고생해서 한 권의 필사노트를 만들었지만, 결국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것을 보고 절망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어떻게 책을 읽었을까

문득 평생 책 읽기를 즐겨했던 옛 선인들의 독서법이 궁금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독서는 일상이자 생존수단이었다. 자연스레 그들만의 독서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하며 도서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조선 왕의 독서법> 표지
 <조선 왕의 독서법> 표지
ⓒ 북씽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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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인들의 독서법을 주제로 한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바로 <조선 왕의 독서법>이었다. 이 책은 26대에 걸친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자신만의 독서 스타일이 뚜렷했던 15명의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은 웬만한 선비들보다도 더 많은 독서가 요구됐다. 유교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상은 군사(君師: 뛰어난 지식으로 백성들을 직접 가르치는 군주)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독서를 하는 경연(經筵) 역시 임금을 뛰어난 학자로 만들기 위한 제도였다. 힘이 아닌 덕(德)으로 통치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완성을 위해서는 임금 스스로 독서를 통한 개인의 수양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조선 왕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책 읽기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조선 왕들에게도 더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었으리라. 막연한 기대를 품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독왕 세종의 책 읽기

수많은 임금들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끌었던 임금은 세종이다. 세종은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다독왕으로 유명했다. <세종실록>에도 기록된 충녕대군 시절의 일화는 세종의 광적인 독서병을 잘 보여준다. 당시 충녕은 병에 걸린 상태였다. 와병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아들을 본 아버지 태종은 환관들을 시켜 모든 책을 압수했다. 이때 <구소수간>(歐蘇手簡)이라는 책 한 권만이 남자, 세종은 이 책 한 권을 무려 백 번 이상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저자는 세종의 독서법을 '백독백습(百讀百習)'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한다. 말그대로 백 번 읽고 백 번 쓴다는 뜻이다. 한 권의 책을 백 번 이상 읽고 쓰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구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뜻인데,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위서에 실린 동우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고사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인 동우의 명성을 듣고서, 그에게 배움을 청하겠다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곧장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땅히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한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물리쳤다.

누군가 "책 읽을 겨를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동우는 "세 가지 여가만 있으면 책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고 되받아쳤다. "겨울은 한 해의 여가이고, 밤은 하루의 여가이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내리는 비는 한때의 여가"라는 것이다. 결국 짬짬이 시간을 내서라도 한 권의 책을 100번 이상 읽을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천재적 군주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천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 속에서 샘솟던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들은 결국 한 권의 책을 100번 이상 읽을 정도의 피나는 노력에서 비롯됐다.

실제로 세종은 "궁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지내본 적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했을 정도로 한 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밥상에서까지 한 손엔 숟가락을 한 손엔 책을 들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의 독서법은 전형적인 '노력파' 스타일이었던 셈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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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연산군의 불량한 독서

세종의 독서는 그 자신의 수양보다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며 '실천적 독서'를 한 것이다. 세종 대에 발전한 과학기술과 제도들은 결국 세종의 폭 넓은 독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국정 최고지도자의 독서 스타일은 곧 그만의 통치 스타일로 이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종과 대비되는 폭군 연산군의 독서 태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연산군의 독서에 대해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억지로 삐딱하게 책을 읽어 폭정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불성실한 독서가 곧 폭정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연산군일기>에서 드러나는 임금 연산은 경연에도 자주 빠지는 등 책 읽기를 게을리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물론 저자의 주장대로 연산군의 불량한 독서 태도가 폭정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한 사람의 생애와 행위에 대해서는 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스로에 대한 수양을 게을리한 군주들 중에서 성군이 나온 적은 없다. 자연스럽게 책 읽기를 게을리 한 연산군에게 국정 운영을 위한 어떠한 비전이나 목표, 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폭정의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그의 불량한 독서 태도를 꼽을 수는 있을 것이다. 세종과 연산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독서에 임하는 국왕의 태도는 나라의 운명을 가르기도 한다.

독서는 이상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니다

잠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왜 책을 읽는가. 저마다 다양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읽는 경우도 있고, 시간을 때우거나 재미를 위해 책을 읽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옛 선인들은 "무작정 외우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독서는 이상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격언은 오늘날 우리들의 책 읽는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독서의 요체는 성현의 언행을 마음에서 본받아서 조용히 찾고 가만히 익힌 뒤에라야 비로소 학문을 진작시키는 공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바쁘게 넘어가면 예사로 외기만 할 뿐이라면, 이것은 장구(章句)를 들은 대로 말하는 나쁜 버릇에 불과하니 비록 천 편을 다 외고 머리가 희도록 경(經)을 이야기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 퇴계 이황(p.187)

"독서는 이상하거나 유별난 무엇이 아니다. 단지 어버이라면 마땅히 사랑할 줄 알고, 지식이라면 마땅히 효도할 줄 알고, 임금을 섬기는 신하라면 마땅히 충성할 줄 알고, 부부라면 마땅히 분별할 줄 알고, 형제라면 마땅히 우애할 줄 아는 것과 같다. 또한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친구가 된다면 마땅히 믿음과 의리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은 날마다 움직여 생활하고 활동하는 사이에 자신이 하는 일에 따라 각각 마땅한 자리를 얻을 뿐이다." - 율곡 이이(p.202~3)

때론 누군가에게 내 지식을 뽐내기 위한 수단으로 독서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독서하는 행위 그 자체를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퇴계와 율곡이 강조했듯이, 독서는 그 자체로 순수해야만 한다. 남들에게 뽐낼 요량으로 책의 구절들을 뜻도 모른 채 줄줄 외기만 한다면 헛똑똑이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이 그런 태도는 독서의 본질인 '자기 수양'에도 어긋난다.

영화 <역린> 속 책 읽는 정조(현빈 분)의 모습
 영화 <역린> 속 책 읽는 정조(현빈 분)의 모습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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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독서법도 검증되어야

책장을 덮으며 나의 독서법을 되돌아봤다. 결국 모든 것은 내 자신의 나태함과 게으름의 문제였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금세 싫증이 나서 나중에는 대충 넘기거나, 다 읽기도 전에 새로운 책을 펼치곤 했던 것이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던 세종조차도 한 권의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백 번을 읽었다.

하물며 나와 같은 둔재가 고작 한 번 읽고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과욕이었던 셈이다. 이는 다독을 자랑하는 이들에게서 곧잘 발견되는 병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종의 '백 번 읽기'는 책 좀 읽는다고 하는 이들이야말로 한 번쯤 되새겨봐야 할 교훈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우리 정치인들의 독서법도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가 국정을 맡으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역사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대통령 한 사람의 모자란 지적 수준이 나라를 파국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때,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평소 읽는 책과 독서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노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책] <조선 왕의 독서법>, 박경남 저, 북씽크, 2014.12.10, 13,000원



조선 왕의 독서법 - 조선 왕들은 어떻게 책을 읽었는가

박경남 지음, 북씽크(2014)


태그:#조선, #임금, #독서법, #독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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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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