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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1일 발간된 한 편의 소설이 있다. '정빈'이라는 익명의 저자가 쓴 <혜주>라는 소설이다. 기자는 올초 그 책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그저 '답답한 누군가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쓴 역사소설 책'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다 최근에야 저자 '정빈'이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설 <혜주>는 경륜이 부족한 어리석은 지도자가 국가를 사유화하는 과정이 상세히 드러나있다. 사유화된 국가는 비선실세에 의해 농락당하고 개인 간의 감정, 섹스나 연정, 종교 따위에 휘둘리며 널뛰기를 한다. 이렇게 소설 <혜주>는 현재 박근혜 정권 말기의 모습까지 거의 그대로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거나 탄핵당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실권을 잃고 궁에 유폐된 혜주의 모습과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이런 예측이 가능했을까.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 따르면, 최종원고를 무려 2015년 10월에 받았는데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사실 예측을 하려고 쓴 건 아니"라면서 "어차피 혜주의 말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근혜 또한 혜주와 같은 식으로 권력을 운영했으니 똑같이 무너진 것이다"라고 밝혔다.

박근혜와 너무나 닮은 여왕 혜주

정빈 장편소설,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 여왕 <혜주>
 정빈 장편소설,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 여왕 <혜주>
ⓒ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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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조선 중기, 광조라는 임금이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시작한다. 광조는 정변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광조가 아들 없이 죽자 조정의 합의로 광조의 딸 혜명공주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조선의 유일무이한 여왕 '혜주'다.

혜주는 시작부터 측근들을 발탁해 조정을 뒤집어 놓았다. 또한 어릴 때부터 보모였던 민 상궁을 제조상궁으로 올리고, 자주 드나들던 회운사 주지 태허를 '국사'로 임명해 유교국가 조선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에 반발하는 신료에게는 부서를 없애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거나 무시하는 방법으로 무마시켰다.

혜주는 궁을 벗어나 회운사나 행궁에 나도는 것을 좋아했다(순방을 좋아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때는 소수의 측근들 외에 혜주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혜주는 점점 공식적인 통로보다 측근들을 통해 나라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재위 2년째 여름, 수도권에 엄청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강 한가운데 있는 두물섬 주민 100여 명이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하필 혜주는 이때 궁에 없었다. 왕이 없는 사이 두물섬 주민을 위한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모두 자기 권한이 아니다, 무리라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었다. 그 사이 두물섬 주민이 모두 물에 떠내려가 몰살하고 말았다.

혜주는 뒤늦게 사건을 보고 받고 "물가에 사는 사람들이 헤엄도 하나 못치나요?"라고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두물섬 참사 책임을 물었지만 어정쩡한 사람 몇 사람을 파직하고 담당부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이에 두물섬 인근 주민들과 유가족들이 농성을 벌였지만 세월호 참사가 그러했듯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흉년이 거듭되면서 백성의 고통이 커져가지만 혜주는 되레 쌀을 매점하면서 물가를 폭등시켰다. 혜주를 둘러싼 괴소문이 돌자 사람의 혀를 자르는 '단설형'을 제정하고, 정탐서라는 기관을 만들어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감시하게 했다. 급기야 성균관 유생들이 하야를 요구하자 유생 2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초죽음으로 만들어 버렸다. 혜주는 이렇게 언로를 완전히 막아 버렸다.

조정에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약삭빠른 자들이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메르스 사태와 마찬가지로 한양에 역병이 돌았다. 혜주의 심기를 우려한 관료들은 제대로 된 보고조차 하지 않았고 뒤늦게 혜주가 사태를 파악했다. 혜주는 "그걸 왜 인제 보고합니까? 과인이 역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영상이 책임질 거요?"라며 자신부터 챙겼다.

혜주는 자신의 책임은 없다는 식이었다. 문제가 터지면 늘 아랫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혜주에게는 사람을 부리고 누르는 권한만 있을 따름이었다.

최순실과 문고리 실세 꼭 닮은 혜주의 측근

혜주의 핵심 측근은 3명이 있다. 먼저 민 상궁. 민 상궁은 어릴 때부터 보모였고 옷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목욕까지 모든 것을 혜주와 함께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제조상궁이 되어 궁을 장악하고 정사에 깊이 관여했다. 다음으로 민 상궁이 데리고 온 좌별직 무극과 우별직 노천이 있다. 좌별직 무극은 회운사 승려로 혜주의 사실상 섹스 파트너였다. 혜주의 욕정을 풀어주면서 2품 벼슬을 받았다.

두물섬 참사로 주민들이 몰살할 때 혜주는 무극과 함께 궁 밖 회운사에서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우별직 노천은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으로 당시 '술객'이라 불렀다. 사이비 종교인이었지만 민 상궁의 추천으로 혜주 옆에서 국정에 대해 조언을 해줬다.

물론 그 조언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둘은 벼슬 이름에도 알 수 있다시피 법규에도 없는 벼슬을 받았고, 그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았다. 사실상 조선의 공적 운영체계 밖에 있는 '비선실세'였다.

두물섬 참사로 여론이 시끄럽자 우별직 노천은 "전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백성들은 마구간 누렁소나 뒷간의 똥돼지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나면 죽고 죽으면 또 태어나는 법이옵니다"며 문제를 일축했다.

혜주는 "우별직은 어찌도 그리 매사에 명쾌하시오? 속이 다 시원하구려!"라며 받는다.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개돼지' 발언과도 겹쳐지는 대목이라 놀랍니다. 아무튼 이렇게 문고리 3인방은 혜주의 시선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또한 혜주 곁에는 종교도 깊숙이 개입돼 있었다. 섹스파트너인 무극이 일하던 회운사 주지 태허는 혜주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국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혜주는 대규모 불교제례를 열고 머리가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회운사를 찾아 국정을 방치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비선실세인 우별직 노천은 사이비 종교인이었다.

결국 이들로 인해 조선은 공적 시스템이 마비가 됐고, 나라 전체가 개인의 사유물처럼 움직였다.

참혹한 혜주의 마지막... 우리는?

혜주 정권의 위기는 이 3인방이 깨지면서 시작됐다. 혜주는 두물섬 참사 당시 무극과 섹스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무극의 거처를 궁 밖으로 옮겼다. 궁 밖으로 밀려난 무극이 다른 여성을 만나자 혜주의 질투를 부른다. 3인방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위기를 깨달은 무극은 혜주 반대파에게 자신의 신변을 의탁하면서 혜주 출생의 비밀을 폭로한다.

사실 혜주는 임신을 못하던 왕비의 지시로 자신과 가까웠던 회운사 주지 태허와 민 상궁이 합방해 낳은 딸이다. 출생의 비밀이 알려지자 조정 내에서 혜주를 지지한 여당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반정이 일어나고 새로운 임금이 추대된다. 혜주는 자신의 생모인 민 상궁과 자결 하면서 4년 간의 재위를 마감한다.

소설은 혜주가 쫓겨난 이후 나라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은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역사적인 경험을 돌이켜 볼 때 비선실세가 농단을 하고 난 뒤에는 나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최순실과 비슷한 사례로 여겨지는 조선 말기 진령군, 러시아 제국 말기 요승 라스푸틴 모두 제거는 되었으나 왕조는 곧 몰락했다.

조금 더 멀리봐도 마찬가지다. 명나라를 뒤흔든 환관 위충현도 비참하게 죽었지만 명나라도 17년 뒤 멸망한다. 어느 정도 국력을 갖춘 국가는 나름의 '시스템'이 존재한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리더라도 그 시스템을 함부로 허물지는 않는다. 심지어 박정희 전 대통령조차 독재를 하더라도 청와대 경호실-보안사령부-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관들이 상호 견제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마친 뒤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다 광화문광장에서 경찰과 밤샘 대치했다.
▲ "대통령은 1+1이 아니다"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마친 뒤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다 광화문광장에서 경찰과 밤샘 대치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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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최소한의 공적인 지위도 얻지 못한 이에게 의지해버렸고, 그는 시스템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가를 농단했다.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최순실의 겁박에 거의 모든 국가기관들이 알아서 기었다.

이렇게 되면 공적인 틀 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 모두 좌절과 절망 밖에 남지 않는다. 국가나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은 그 권위를 크게 상실했다. 권위를 잃어버린 시스템은 한층 더 깨기 쉬울 것이고, 이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과연 2016년 대한민국은 공적인 시스템을 회복할 수 있을지 깊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나라는 잠재력이 있고 상식이 있는 국민들이 많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지만 이걸 계기로 상식을 회복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며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태그:#박근혜, #최순실, #혜주, #피플파워, #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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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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