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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가는 길입니다.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일주문이 없어도 이렇게 수수한 길인 걸...
 강진 무위사 가는 길입니다.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일주문이 없어도 이렇게 수수한 길인 걸...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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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은행 열매가 가득합니다. 남도를 여행하다 보면 발걸음 닿는 곳이 절집입니다. 이는 남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그렇습니다. 특히 산행에선 당연히 사찰에 들러야 할 정돕니다. 지금에서 하는 말이지만, 어찌 보면 아름다운 산에 가람이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명암으로, 가장 큰 특혜(?)이지 싶습니다. 그만큼 절묘하게 산과 어울린다는 의미입니다.

월출산에도 영락없이 사찰이 들어서 있습니다. 영암 쪽에 도갑사와 천황사가, 강진에 무위사가 있습니다. 절집에 다녀보면 유독 도선 국사께서 창건한 곳이 많습니다. "삼국 통일 이후 백제 쪽 사찰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선 스님 이름을 빌린 곳이 있다"는 일설이고 보면, 믿어야 할지 여부를 떠나 그만큼 드높았던 명성 알 만합니다. 그런데 무위사는 조금 다르네요. 무위사는 원효 스님이 창건하고 도선 국사께서 첫 번째 중창했다 합니다.

살아보니 40대는 머리, 50대는 가슴으로 만난다?

강진 무위사 일주문과 사천왕문은 화려합니다.
 강진 무위사 일주문과 사천왕문은 화려합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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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뒤 월출산 국립공원에는 고요가 가득합니다.
 강진 무위사 뒤 월출산 국립공원에는 고요가 가득합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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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첫 번째로 나오는 게 강진, 해남이고, 도갑사와 무위사인 줄 알지?"

전남 강진 월출산 무위사 가는 길, 아내가 기억을 환기시킵니다. 이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이처럼 50대는 40대와 또 다릅니다. 머리를 채웠던 기억들은 때로는 잊고 내려놓아야 다시 채워지는 법이기에, '기억 내려놓기' 순환 구조를 가동 중입니다. "살아보니 알겠다"던, 40대와 50대의 차이를 선배 박형근씨의 입을 빌어 보겠습니다.

"사십대와 오십대의 차이는 강한 바람에 부러지는 나무와 흔들리면서도 살아남는 풀처럼 강직함과 유함의 차이인 것 같다. 사물을 대할 때 불혹인 40대는 머리, 지천명인 50대는 가슴으로 만난다. 또한 인생은 사람이란 큰 바위가 세월을 만나 바위에서 몽돌이 되는 과정이지 싶다. 바위가 몽돌처럼 작아지고 단단해지는 과정. 그래서 오십이 넘으면 말을 긍정의 웃음으로 표현할 줄 아는 듯하다."

오십이 넘은 나는 긍정의 말을 웃음으로 표현할 줄 알까? 바위가 몽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인생이다? 손뼉 쳤습니다. 이도 도를 닦는 사람 말이지, 나이 50이 넘었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철이 들어야 말이지, 철 안 든 사람은 나이가 몇이든 천방지축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를 뿐이지요.

각설하고, 무위사로 가는 길은 한가롭습니다. 계절의 변화가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걸어가야 할 곳을 씽씽 달려갑니다. 관광차 한 대 앞서 갑니다. 가로 막은 관광차가 무위사로 가는 길 위의 주변 경관을 살피게 합니다. 관광차는 모 대학교 사학과 학생들 답사 차량입니다. 우리나라 곳곳을 둘러보는 자체가 배움의 연속이니 가치로운 일이지요.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가 일품 '극락보전'

무위사 극락보전입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입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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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을 통과하면 무위사 극락보전이 나옵니다.
 누각을 통과하면 무위사 극락보전이 나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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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화려한 범종각 뒤로 소담한 극락보전이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무위사. 화려한 범종각 뒤로 소담한 극락보전이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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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無爲寺)는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로 유명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사로 유명했다. 그런 만큼,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이다.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은 조선시대 불교 건축물 중에서도 초기 형태에 속한다.

눈여겨 볼 것은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진 극락보전의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이다. 특히 극락보전 측면 기둥과 보가 만나 이루는 공간 분할의 절제된 아름다움도 놓쳐서는 안 될 감상 포인트다. 단정하고 검소한 극락보전 겉모습과 달리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묘사한 건물 내부의 조선 초기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불상과 불화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위는 안내판에 소개된 무위사입니다. 무위사 일주문이 화려합니다. 무위다원, 사천왕문, 누각 등도 제법 화려합니다. 대웅전인 극락보전에 비하면 말입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 1권에서 "아늑하고 소담한 절집 무위사는 능력 있는 주지스님이 바야흐로 거찰이 될 터 닦이를 시작했"다던데(12~13쪽) 그 우려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선배 말에 따르면 그저 웃을 수밖에.

학생들, 발걸음이 경쾌하고 빠릅니다. 젊음은 이런 게지요. 누각 밑을 지나 극락보전을 봅니다. 여기서 뜬금없이 경남 고성의 연화산 옥천사가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누각 밑을 지나 대웅전을 대하는 게 아니라, 막힌 누각을 돌아 대웅전을 봐야 했습니다. 절집의 이런 친절과 불친절은 각 사찰의 특색 내지는 역사와 관련 있지요.

옥천사는 임진왜란 때 의승수군과 19세기 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본거지였기에 직선으로 대웅전에 드는 걸 피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무위사 가람 배치는 옥천사와 달리 훤히 뚫려 훨씬 났다는 거죠. 무위사는 전각들이 대웅전을 가리지 않아야 빛을 발한다는 생각입니다. 왜냐?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어야 최상이니까. 절집은 부처님 뿐 아니라, 그 절만 가지는 특징이 분명해야 합니다.

유홍준 교수가 극찬한 무위사 극락보전의 미는?

유홍준 교수가 단아한 멋을 강조했던 무위사 극락보전입니다.
 유홍준 교수가 단아한 멋을 강조했던 무위사 극락보전입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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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본 무위사 극락보전입니다.
 앞에서 본 무위사 극락보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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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무위사 극락보전에 대해 설명 듣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무위사 극락보전에 대해 설명 듣고 있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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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여기 그대로 살아 있다. 거기에다 권위보다 친근함을 주기 위함인지 용마루의 직선을 슬쩍 공글린 것이 더더욱 매력적이다. 치장이 드러나지 않은 문살에도 조선 초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단정함이 살아 있다."(28쪽)

유홍준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강조한 무위사 극락보전에 대한 평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건축물을 대면서 극찬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주심포 맞배지붕, 단아함, 공글린 용마루, 문살의 단정함입니다. 이걸 보며 감탄까진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 안목 대단하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아름다움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는 작은 안내판을 내거는 친절이 아쉽습니다. 

요즘, 절집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몇몇 사찰은 편액 등에 자랑스럽게 금을 도배하고, 입구에서부터 수입 대리석을 까는 등 무조건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는 경향입니다. 부탁합니다. 제발 자연과 어울리는, 그 절집과 조화로운 게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가꾸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무위사 충분히 살펴볼 보배로운 절집입니다.

학생들, 밖에서 열심히 설명 듣더니 우르르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젊은 몰려다니는 자체로 행복입니다. 아내, "저 학생들 무위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까?" 걱정입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성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저들은 저들대로 또 다른 눈이 있으니 우려는 접어야지요. 아내 그러면서, "당신, 극락보전 측면 분할 사진 찍었어?"라고 묻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그저 웃고 맙니다.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 배치는 신앙의 변화

뒤쪽이 국보 제313호인 무위사 아미타삼존도입니다.
 뒤쪽이 국보 제313호인 무위사 아미타삼존도입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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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270cm. 1476년 작.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 좌우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에 6명의 나한을 배치해 원근감을 표현했다. 아미타불 뒤에 표시된 광배 모양은 키를 연상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은 고려 후기 단아양식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 끈을 대좌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고려시대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국보 제313호 아미타삼존도에 대한 무위사의 설명입니다. 설명대로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는 건 관람자의 몫입니다. 그래야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가 하는 관심과 예술작품을 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네 습관처럼 대충 쓱 훑고 지나가는 건 예술품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 수월관음벽화는 봤을까, 싶게 쓱 보고 썰물처럼 빠져 나갑니다. 아쉬움을 떨치고 밖으로 나옵니다.

무위사 선각대사탑비와 극락보전입니다.
 무위사 선각대사탑비와 극락보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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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대사탑비는 거북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높이 약 2.35m, 너비 1.12m. 귀부(龜趺)의 두부(頭部)는 양 뿔을 뚜렷이 조각한 용머리이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은 투조로 되었다. 거북 등에는 6각갑 무늬를 양각했다. 비좌(碑座) 앞뒤 2면에는 보운 무늬, 양 측면에는 안상을 각각 양각과 음각으로 새겼다. 이수(首)에는 3단 층급형 받침을 새겨 겹송이 연꽃무늬를 장식했다."

보물 제507호인 선각대사탑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 등을 거쳤음에도 온전하게 보존되었다니 한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학생들 우르르 사라집니다. 아내, "충남에서 먼 길 달려 온 학생들 볼 건 다 봤겠죠?" 합니다. 감탄 사이로 견공 한 마리 다가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이미 했던 영역표시를 확인합니다. 사람들이 행여나 자기 터전을 노리는 건 아닌지 살피는 게죠.

"당신 뭐해?"

묻기는 했습니다만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내는 땅에 떨어진 은행 줍는 중입니다. 보림사에서부터 시작된 은행 줍기는 강진 무위사에서도 여전합니다. 담을 봉투가 부족한 게 한입니다. 있는 것마저 내려놓고 가야 할 마당에, 은행 가득합니다. 무엇인가 얻고 가려는 거려니 하고 맙니다. 무위사, 떠나면서도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가람이….

견공, 무위사 천왕문에서 일주문을 보고 있습니다.
 견공, 무위사 천왕문에서 일주문을 보고 있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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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 SN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월출산, #강진, #무위사, #일주문,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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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힐 수 있는 우리네 세상살이의 소소한 이야기와 목소리를 통해 삶의 향기와 방향을 찾았으면... 현재 소셜 디자이너 대표 및 프리랜서로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 여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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