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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 마지막인 셋째 날, 대영박물관만 구경한 후 게스트하우스에 들러 짐을 챙기기로 했다. 오후 4시 아일랜드로 가는 비행기가 있는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숙소 근처의 킹스크로스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게스트하우스의 체크아웃 시간은 오전 10시지만 짐을 꾸려 1층 입구에 놓아두는 건 괜찮다고 해 가벼운 몸으로 마지막 런던 여행에 나섰다.

버스 시간에 맞춰 오후 3시 30분께 숙소에 들렀다. 마침 한인 게스트하우스 매니저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김치찌개를 끓이려는지 물이 잔뜩 든 큰 솥에 김치를 뭉텅 썰어 넣었다. 김치의 유혹이 일행의 발목을 잡았지만 용케 다들 짐을 꾸려 나갔다.

킹스크로스역에서 스탠스테드(Stansted)공항까지 45분이라던 안내가 무색하게 예상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런던 시내를 빠져나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방통행로가 많았고 시내 한복판에도 왕복 2차선 도로가 많았으며 왕복 4차선이라 하더라도 도로 폭이 매우 좁았다. 추측컨대, 오래된 도시라 건물 신축이나 증축에 한계가 있고, 도로 확장도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 신도시가 잠시 그립기도 했지만 너무 쉽게 부수고 만드는 게 최선은 아니라는 생각이 꼬리처럼 이어졌다.

영국 스탠스테드공항은 이탈리아ㆍ핀란드ㆍ프랑스ㆍ독일 등, 유럽의 여러 나라로 가는 저가 비행기가 가장 많이 경유하는 공항이라고 한다. 유럽의 저가항공은 가격이 저렴한 만큼 수하물 규정이 엄격했다. 기내 수하물은 규격 22인치 이하, 무게 10kg 이하 한 개만 가능했다. 그 이외의 체크인 수하물은 16유로 이상의 비용이 별도로 들기에, 우리도 기준에 맞추느라 짐을 최소화했다.

달빛 아래 펼쳐진 무채색의 초원

아일랜드 코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는 라이언항공(ryanair)이었다. 아일랜드에서 파리로 가는 항공은 에어 링구스(Aer Lingus)를 예약했는데, 아일랜드의 항공사는 이 두 개다. 오후 8시 35분에 이륙하는 비행기가 안내방송 없이 30분이나 출국 수속이 지연됐다. 1시 30분 비행 후 오후 10시 30분에 두 번째 여행국인 아일랜드의 코크(Cork)공항에 도착했다.

한여름에도 쌀쌀한 날씨에 비가 많이 오는 나라로 알려진 영국에서 보낸 3일은 청명한 하늘에 줄곧 반팔을 입을 만큼 더웠다. 아일랜드가 영국보다 10도는 더 기온이 낮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별다른 채비를 하지 않은 나는 추위를 피하느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입국 수속을 하는 곳까지 뛰어갔다.

영어에 능통한 일행을 뒤로하고 제일 먼저 입국 수속을 하는 곳으로 갔더니, 그곳 직원이 내게 영어로 뭐라고 말했다. 속사포 랩을 하는 것 같아 머리는 하얘지고 웃음만 나왔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자, 그 직원은 당황해 귀가 빨개졌다. 자신을 무시한 것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사태가 의외로 심각해짐을 깨달은, 영어를 좀 하는 일행은 동행이라는 뜻으로(프렌드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에) 해명했고, 직원은 나보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어찌어찌 사태를 수습하고 공항을 나왔다. 내 행동은 여행기간 내내 말밥이 됐다. 함부로 웃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코크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이번 여행에 초대해준 '민'을 만났다. 아일랜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자동차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그러나 민은 프랑스에서 타던 왼쪽 운전석 차를 가져와 타고 있었다.

모든 도로가 오른쪽 운전석 자동차 시스템에 맞춰졌지만, 민은 씩씩하게 그녀의 집이 있는 코크(Cork)시 발리훌리(Ballyhooly)를 향해 북쪽으로 달렸다. 달빛 아래에 펼쳐진 무채색의 몽환적인 초원이 한 편의 그림 같았다.

자정에 도착한 민의 집은 영화에서 봤던 곳이었다. 철제 대문을 열고 차로 한참을 들어가야 200년 된 2층 집이 나온다. 집 안에는 카펫이 깔려있고 고풍스런 앤티크 가구가 있다. 또한 방마다 침대와 테이블은 물론이고 벽난로와 개수대도 있다. 20년간 지냈던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돈으로 지난해 구입한 저택과 부지 1만 평에 우리 일행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민은 자기가 키우던 돼지를 잡아 보관한 앞다리에 된장을 풀어 수육을 끓였다. 또한 '태평농법'으로 키운 오이와 깻잎, 쪽파를 따와 안주로 겉절이를 내왔다.

위스키의 원산지인 아일랜드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삶과 인생을 얘기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위스키의 원산지인 아일랜드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삶과 인생을 얘기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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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이 없는,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이라 동네 펍에서 사온 아일랜드 캔맥주와 집에 있는 위스키를 마셨다. 벽난로가 켜지고 촛불로 분위기를 낸 거실에서 위스키의 원산지인 아일랜드에서의 첫 술자리는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새로운 세계, 우프(WWOOF)

민의 셋째 딸인 '조안나'. 서구적 이목구비에 동양의 검은 눈동자가 매력적이다. 자연을 벗 삼아 거위와 놀고 있는 조안나 뒤에 가빈의 모습도 보인다.
 민의 셋째 딸인 '조안나'. 서구적 이목구비에 동양의 검은 눈동자가 매력적이다. 자연을 벗 삼아 거위와 놀고 있는 조안나 뒤에 가빈의 모습도 보인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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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돌이 갓 지난 민의 셋째 딸 '조안나'가 깨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이 맛있는 아이리쉬 블랙퍼스트(Irish Breakfast)를 사주겠다고 해, 일행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상점 앞에 꽤 큰 강이 흘렀다. 가까이 가 보니 물이 검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 이름이 '블랙워터'였다. 물색이 검은 건 더럽거나 환경오염으로 인한 것이 아닌 강바닥이 검거나 낙엽 등의 물질이 섞여서라고 했다.

 아이리쉬 블랙퍼스트와 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타서 마시는 밀크차.
 아이리쉬 블랙퍼스트와 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타서 마시는 밀크차.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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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쉬 블랙퍼스트로 훈제 삼겹살ㆍ수제 소시지ㆍ콩ㆍ버섯볶음ㆍ계란ㆍ빵 등이 나왔다. 아침이 너무 과하다 싶었는데, 옛날부터 척박한 아일랜드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아이리쉬가 많아 든든하게 먹었기 때문이란다. 홍차에 우유와 설탕도 나왔다. 밀크티라고도 하고 아이리쉬 블랙퍼스트 티라고도 하는데 해장되는 거 같아 몇 잔을 연거푸 마셨다.

민의 셋째 시동생네도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농약이나 비료를 쓰지 않는 유기농법은 물론 잡초도 뽑지 않는데 채소가 잘 자란다.
 민의 셋째 시동생네도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농약이나 비료를 쓰지 않는 유기농법은 물론 잡초도 뽑지 않는데 채소가 잘 자란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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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민이네로 돌아와 민이가 키우는 농작물들을 돌아봤다. 태평농법으로 키우는 여러 가지 채소가 이색적이었다. 태평농법이란 자연농법의 하나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주지 않으며 잡초를 제거하지 않는 농법을 말한다. 자연의 힘을 믿고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농법이란다. 씨를 뿌리고 방치해두면 알아서 자라는 놈들이 신기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무척 많이 열렸는데 알이 자잘했다. 우리였다면 큰 놈을 살리려고 작은 놈은 솎았을 텐데, 썩었든, 작든 그대로 두는 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민이네 밭 옆에도 블랙워터강이 흘렀고, 연어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이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 사진을 전공했다. 프랑스에서 심화과정을 공부하며 아이리쉬 남편인 '가빈'을 만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대기업에 취직해 출근을 앞둔 민에게 가빈은 청혼했고, 둘은 파리에서 사진작가로 자리를 잡았다.

가빈의 어머니이자 민의 시어머니는 그의 가족들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에 발생하는 문제는 공동체 파괴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족단위 또는 지역단위의 공동체 형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민이 부부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가빈의 고향인 이곳에 정착했다. 현재 회원 1000여 명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회원들이 생산한 믿을 만한 작물을 구입하며 자급자족을 꿈꾼다.

현재 민이 부부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저장기술 개발'이다. 민이의 시동생들은 수확한 농산물의 많은 양을 버린다고 한다. 그것들을 발효해 잼을 만들거나 숙성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배추를 심어 김치를 담그려고 우리나라 항아리를 구입했고, 김치를 저장하기 위해 지하벙커를 짓고 있다.

오후에는 가빈의 동생네를 방문하기로 했다. 삼형제 중 가빈이 맏형인데, 둘째가 살고 있는 곳은 코크시 도네레일(Doneraile)에 있는 Creagh Castle이다. 말 그대로 성(城)이었다. 민의 둘째 시동생의 친구가 과거 영주였던 가문의 저택과 부지 10만평을 몇 년 전 부동산 시장에 내놓았고, 화가인 민의 둘째 시동생이 구입했다. 시동생은 그곳에서 우퍼들, 수행자들과 생활하고 있다.

코크시 도네레일(Doneraile)에 있는 Creagh Castle에서 이 성의 주인인 가빈의 둘째 동생과 가빈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코크시 도네레일(Doneraile)에 있는 Creagh Castle에서 이 성의 주인인 가빈의 둘째 동생과 가빈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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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프(WWOOF)란 유기농법을 하는 농가와 자원봉사자를 연결하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다. 금전 교환 없이 신뢰를 바탕으로 문화 교류와 교육 기회를 넓히고 자연과 공존하며 지속가능한 글로벌 사회를 만드는 운동이다.(우프코리아 홈페이지에서 인용) 1971년 시작한 우프는 현재 약 102개국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그중 55개국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각국의 우프는 독립적으로 운영하지만, 공통된 목표와 이념을 따르고 있다.

우퍼(WWOOFer)란 호스트(Host, 유기농으로 운영하는 농장주로 일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 농가로 들어가 일손을 돕는 대신 숙식을 제공 받는 사람으로 우프 기관의 회원이 된 후 원하는 호스트 농가를 지원한다.

 Creagh Castle에서는 명상공동체인 플럼 빌리지(plum village) 아일랜드 지부가 운영되고 있다. 일행과 10분 명상시간을 가졌다.
 Creagh Castle에서는 명상공동체인 플럼 빌리지(plum village) 아일랜드 지부가 운영되고 있다. 일행과 10분 명상시간을 가졌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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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시동생은 틱낫한 스님이 설립한 명상공동체 플럼 빌리지(plum village) 아일랜드 지부도 운영하고 있다. 일행은 2층 강당에 올라가 명상을 했다. 강당에는 틱낫한 스님이 친필로 쓴 'wake up'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아일랜드 최고의 휴양도시 킨세일((Kinsale)

 아일랜드 남부의 휴양도시인 ‘킨세일’. 휴양도시답게 항구에는 수 많은 요트가 정박해있고, 숙소와 상가는 예쁘게 꾸며졌다.
 아일랜드 남부의 휴양도시인 ‘킨세일’. 휴양도시답게 항구에는 수 많은 요트가 정박해있고, 숙소와 상가는 예쁘게 꾸며졌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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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여행 마지막 날 오전, 숙식을 해결해준 것에 답례라도 하고 싶어 일행은 민이가 태평농법으로 지은 감자 캐는 일을 돕겠다고 했다. 주인장이 반대했지만 우리는 장화를 챙겨 신고 호미와 삽을 들고 너른 감자밭으로 향했다.

오후에는 민이 부부가 아일랜드 남부의 '킨세일'이라는 휴양도시로 우리를 안내했다. 궂은 날씨로 유명한 아일랜드에서 청명한 하늘은 기분을 맑게 했다. 한 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킨세일은 사진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바닷물이 거울처럼 사물을 반사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보였다. 휴양도시답게 항구에는 요트가 즐비했다. 여름 성수기에는 민박집 가격이 며칠에 우리 돈으로 100만원이 넘는데, 빈 곳이 없다.

아일랜드 휴양도시 킨세일에서 가장 유명한 ‘BULman’ Bar에서 마신 기네스 맥주. 흑맥주의 본고장에서 마신 기네스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촉촉했다.
 아일랜드 휴양도시 킨세일에서 가장 유명한 ‘BULman’ Bar에서 마신 기네스 맥주. 흑맥주의 본고장에서 마신 기네스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촉촉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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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소스에 칵테일과 굴을 넣어 만든 블러드메리 칵테일.
 토마토소스에 칵테일과 굴을 넣어 만든 블러드메리 칵테일.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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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세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BULman' Bar로 갔다. 그곳의 최고는 굴 요리였다. 사실 양식 굴이 넘쳐나는 우리나라에서 굵직한 석굴 몇 개 깔고 레몬조각을 얹혀 내온 요리는 좀 돈이 아까웠다. 그러나 토마토소스에 칵테일과 굴을 넣어 만든 술인 블러드메리 칵테일은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맛난 것은 기네스 흑맥주와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였다. 기네스의 본고장에서 마셔서 맛있는 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모르지만 부드러운 거품이 달콤했다.

BULman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1677년 찰스 2세 때 세운 찰스 요새(charles fort)에 갔다. 이곳은 킨세일 항구와 도시 보호 목적으로 건설된 아일랜드 내 가장 큰 군사기지 중 하나다. 17세기 아일랜드 전쟁과 20세기 초 아일랜드 내전을 거친 곳이기도 하며 1차 세계대전에 연루된 곳이기도 하다. 1973년 국가기념물로 지정됐다. 아쉽게도 관람시간이 끝나 외부만 볼 수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태그:#아일랜드, #코크공항, #빌리훌리우드빌, #플럼빌리지, #우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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