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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해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수양손자 의성이와의 작별

수양손자 의성이와 함께 유치원에서.
 수양손자 의성이와 함께 유치원에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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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아침에 일어나 식당에 가니 박세희(가명) 교수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 오늘 나의 일정을 물으면서 마지막날이니 오후 시간을 함께하자고 한다. 흔쾌히 동의를 하고 식사를 마친 뒤 수양손자 의성이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향한다.

유치원에 도착하니 설경이가 의성이를 안고 마중 나와 있다. 유치원이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나다. 탁아소도 겸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침실도 갖춰져 있다. 의성이의 침대를 만져보고 놀이방으로 간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는 대부분 미국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옷을 사 입히는 엄마들의 취향이 북한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의성이를 장난감 말에 태우고 나도 함께 동심으로 돌아간다.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자 울상을 짓는 의성이.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자 울상을 짓는 의성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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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이 그리고 의성이 친구들과 1시간여 함께한 뒤 유치원을 나선다.

"의성아, 이 할마이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 의성이 보러 또 올게. 때때옷하구 맛있는 거 많이 사올게. 의성아, 그때까지 씩씩하게 유치원 잘 다니고 있어.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의성이가 이내 고개를 돌려 울상을 짓는다. 그새 의성이도 나와 정이 많이 들은 모양이다. 한동안 다독여줬다. 설경이가 "의성아, 의성이 보러 할머니 또 오실 거야"라면서 의성이를 위로한다. 그제서야 의성이는 손을 흔들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작별을 고한다. '내일 아침 호텔에서 뵙겠다'면서 인사를 건네는 설경이의 눈에는 어느새 슬픔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어머니의 모습

길거리의 북한 아이들. 북한 엄마들이라고 해서 취향이 특별히 다른 건 아닌 듯하다.
 길거리의 북한 아이들. 북한 엄마들이라고 해서 취향이 특별히 다른 건 아닌 듯하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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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박 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의 안내원인 송영혜 선생이 점심식사를 위해 한 식당을 추천한다. 자기의 친구 엄마가 일하시는 식당이란다.

식당까지 걷는 사이 유독 아이들이 눈에 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시간인가 보다. 목에는 모두들 하나같이 붉은 마후라(머플러)를 두르고 있다. 이 붉은 마후라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혁명의 상징'인가. 무슨 혁명이 아직도 진행 중인 걸까.

송영혜 안내원이 "식당이 바로 저기"라고 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뙤약볕이 내리쬔다. 길 건너에는 양산을 받쳐 든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 안 사람들이 부러운지 남편은 불평 섞인 말투로 "우리도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자"고 한다. 송영혜 선생은 여전히 "바로 저깁니다, 다 왔습니다"라며 웃음 짓는다. 북한의 동포들이 "바로 저기"라고 할 때는 족히 2~3km는 걸을 각오를 해야 한다.

맥주 안주로 나온 민물고기 튀김.
 맥주 안주로 나온 민물고기 튀김.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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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로 저기"에 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에 들어선 남편은 허겁지겁 맥주부터 찾는다. 나 역시도 한 컵 가득 맥주를 따랐다. 송영혜 선생에게 잔을 권하자 오늘은 사양하겠단다. 남편과 내가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킨다. 안주로 주문한, 작은 쏘가리 비슷하게 생긴 민물고기 튀김이 맥주의 유혹을 한 층 더해 준다. 남편이 송영혜 선생에게 또다시 맥주를 권해 본다. 그러자 송영혜 선생이 조용한 목소리로 거절한다.

"조국에서는 오늘하고 내일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위 손님들 중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남편이 묻는다.

"아니, 술 안마시는 날도 있나?"
"아, 그런 건 아니고…. 내일이 수령님(김일성 주석) 서거하신 날입니다. 기래서 우리 인민들은 오늘과 내일 술을 자제합니다."
"아~, 그래서…. 그럼 나도…."
"아닙니다. 두 분은 어서 드십시요."

남편과 나는 "우리도 이곳 동포들이 하는 대로 하겠다"라면서 술잔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우리의 테이블로 다가온다. 송영혜 선생이 일어나 인사한다. 송 선생 친구의 어머님이시란다. 주방에서 일하시다가 나온 어머니가 우리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문을 연다.

"음식이 입에 맞으실는지 걱정이 되어서리…. 아까 영혜가 전화 걸어 양딸들 찾아 미국에서 부터 먼 길 오신 분들이니 잘 부탁한다고 했어요. 맛이 어떨는지…."
"아주 맛있어요. 생선튀김요리는 정말 별미에요. 우리 입맛에 참 잘 맞아요."

"조국을 떠나 사니 그동안 입맛도 변했을 텐데…, 그래 양딸들은 다 만나 보셨어요?"
"네, 다 만나보고 내일 떠나요. 10월에 다시 올거에요. 둘째딸이 아이를 가져서…."
"그러시군요. 10월에 또 식당에 들르시라요. 에이구, 이제 또 먼길을 가야시네."

두 손으로 앞치마를 쥐고 대화를 나누다 주방으로 돌아가는 송 선생 친구 어머니로부터 내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송영혜 선생에게 이 분의 연세를 물으니…. 아! 나보다 한 살이나 어리다. 조용히 고개를 떨궈 나의 미숙함을 반성한다.

식당을 나서며... 왼쪽은 식당 지배인 그리고 오른쪽은 송영혜 안내원 친구의 어머니.
 식당을 나서며... 왼쪽은 식당 지배인 그리고 오른쪽은 송영혜 안내원 친구의 어머니.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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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잠 못드는 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자 식당의 지배인과 송 선생 친구의 어머니가 주방에서 나와 우리를 배웅한다. 북한에 올 때마다 꼭 들르고 싶다. 박 교수와 함께 오후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이번 여행은 두 수양딸들을 만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설경이는 아이 낳아 잘 키우고 있고 설향이 역시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느 덧 마지막 밤이다. 자는 둥 마는 둥 침대위에 누어 있다. 벌써 새벽 3시가 넘어 간다. 함께 뜬눈으로 지새우며 인터넷을 하던 남편이 놀라서 휴대전화를 건네주며 소식을 전한다.

"여보, 당신이 올해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고 페북에 뜨네."
"네? 제가 수상자라고요? 그 상은 통일운동 하시는 분들이 받는 거 아녜요?"
"응, 나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나는 통일운동가도 아니고, 또 통일을 위해 한 일도 없는데…."

나는 얼른 인터넷을 열어 '한겨레통일문화상'을 검색했다. 역대 수상자분들을 보니 겁이 덜컹 난다. 세계적인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고 리영희 교수님, 백낙청 교수님, 재미의학자 오인동 박사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님…. 북한을 여행 하고 돌아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쓴 나같은 아줌마가 받을 수 있는 그런 상이 아니다. 기쁨에 앞서 두렵고 어색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 거린다.

"안녕, 평양"

평양 순안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가운데가 첫째 수양딸 김설경.
 평양 순안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가운데가 첫째 수양딸 김설경.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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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 가방을 챙겨 로비로 내려가니 설경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둘째딸 설향이는 입덧이 너무 심해 오지 못했다면서 대신 인사를 전한다. 설경이와 함께 공항으로 향한다.

차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동상 앞을 다다르자 수많은 인파가 차창 밖으로 눈에 들어온다. 김일성 주석의 서거일을 맞아 추모를 하는 사람들이란다.

내가 북한의 불가사의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장면이다. 하나는 고난의 행군 당시 전 인민이 기아에 허덕이며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희생당했는데도 나라가 붕괴하지 않고 존립한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인민들이 이들의 지도자를 대하는 모습이다. 천황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들도 있고, 왕이 입원한 병원앞에서 밤샘을 하는 태국 국민들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다.

김일성 주석 서거일을 맞아 동상으로 향하는 평양시민들.
 김일성 주석 서거일을 맞아 동상으로 향하는 평양시민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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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새 공항청사의 모습이 들어온다. 내가 입국할 때까지만 해도 이용한 임시청사는 한창 철거 중이다. 새 공항은 최신식으로 고급스럽게 치장을 했다. 규모는 작아 보이나 이용객 숫자를 고려해 볼 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다.

설경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인사를 한다.

"오마니, 조심해 가십시요. 미국 가셔도 건강하게 잘 지내십시요."
"걱정마. 너야말로 건강 잘 챙겨.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의성이…, 엄마가 아프면 온 가정이 아프고 힘들어. 밥 잘 챙겨먹고 의성이 잘 키우고 있어, 또 올테니까. 그리고 설향이가 아이를 가져 몹시 힘들 텐데 언니인 네가 많이 돌봐줘. 10월에 출산 준비 좀 해서 다시 올게."


10월에 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출국수속장으로 들어간다. 뒤 돌아 설경이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제든 보고싶을 때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우리는 축복받았다. 순간 이산가족들의 처절한 모습이 떠오른다. 미안하고 슬픈 생각에 울컥 가슴과 목구멍이 조여온다.

우리를 태우고 갈 선양행 고려항공 JS156편 기내에 들어선다. 이륙 하자 창가를 타고 북한의 산하가 펼쳐 진다.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고려항공 JS156편.
 고려항공 JS156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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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통일문화상' 대리수상

미국의 집으로 돌아오니 상을 주관하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입국이 금지돼 있어 시상식에 참석을 못할 테니 남편이 대신 참석한다면 비행기표를 보내주겠다는 소식이다. 남편에게 대신 가겠냐고 물으니 거절한다. 훗날 나의 입국금지가 해제돼 함께 조국에 갈 수 있을 때까지 자신도 가지 않겠다고 한다.

나는 익산통일콘서트 폭탄테러사건 당시 몸을 던져 나를 구하고 대신 화상을 입은 곽성준 선생님께 대리수상 부탁을 드렸다. 흔쾌히 승낙해주신다. 사실은 이 분이야 말로 진정한 수상자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나는 대신 다음과 같은 수상소감을 동영상과 함께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한겨레통일문화상 특별상을 대리수상한 곽성준 선생. 그는 전북 익산 폭탄테러 당시 나를 구해준 은인이다.
 한겨레통일문화상 특별상을 대리수상한 곽성준 선생. 그는 전북 익산 폭탄테러 당시 나를 구해준 은인이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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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 저는 '두려움'과 함께 '과연 제가 이런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쓴 두권의 북한 기행문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 그리고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 –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행복한 여행>은 '통일 이야기'가 아닌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저의 간절한 염원은 북한을 여행하며 북녘의 동포들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 차례의 (북한) 여행으로 확인한 것은 오히려, '어쩌면 우리와 이토록 똑같을까' 라는 동질감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나, 유적지를 참관할 때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얘기할 때나…. 그 무엇 하나 제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동질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조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생각에 슬픔은 배가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으며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갖게된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녘동포들의 아픔과 힘겨움이 그들만의 아픔과 힘겨움이 아닌,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 우리 모두의 아픔이요, 힘겨움임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첫 북한여행 때 금강산에서 만난 북녘의 아이들을 품안에 안고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속으로 속삭였던 말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서로 총을 겨누지 마라. 손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행복의 노래만 부르거라.'

… 여행을 다녀온 후 사람들이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저는 북녘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분명히 확신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남과 북, 우리 겨레는 70년의 분단세월 동안, 생활의 양식만 달라졌을 뿐, 우리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그대로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북이 화해하고 서로 협력하여 통일조국으로 향하는 순간, 우리의 남과북은 더 이상 서로에게 위협이나 골칫거리 상대가 아닌,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민족의 분단으로 인해 잠시 중단된 찬란한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함께 써내려 가는 가슴 벅찬 상황이 실현될 것입니다.

통일조국에서 살아갈 다수의 주인공은 저같은 남과 북의 그리고 해외의 평범한 동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단 장벽을 허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쌓여있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 뜨리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이란 한낱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인 우리는 서로를 향해 눈을 뜨고, 마음을 열고, 두려워 말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 저는 비록 모국에서 강제출국 당했지만, 해외동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제가 사는 이곳 미국에서 해나갈 것입니다. 남과 북이 다시 예전처럼 좋아질때 까지 남과 북의 오작교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조국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해외동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수상 소감 부분 발췌)

(* 다음 연재기사는 2015년 10월 여행기로 이어집니다.)

한겨레통일문화상 상패.
 한겨레통일문화상 상패.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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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북한, #통일, #신은미, #재미동포,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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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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