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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전 국군에 학살된 희생자를 위로하는 배상 특별법을 2004년 국회가 제정했지만,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10년 넘게 유족들 간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7일부터 2월 11일까지 경남 산청과 함양, 거창군 등지에서 1368명의 민간인이 '통비분자'로 몰려 국군(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참극을 말한다. 

거창사건은 당시 지역 국회의원의 폭로로 큰 파문을 낳으면서 책임자가 재판을 통해 처벌까지 받았지만, 산청·함양 사건은 전시체제로 인해 알려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파묻히고 말았다.

산청·함양 사건은 4.19혁명 직후 국회에 의해 사건 실체가 드러났지만,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88년에야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후 사건발생 45년이 지난 1996년 거창과 산청·함양 사건을 아우르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15대 국회에서 통과되어 거창과 산청에 각각 추모공원이 건립됐다.

그러나 희생자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은 2004년 만장일치에 가깝게 국회를 통과 했으나, 정부가 국가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폐기되고, 그때부터 유족들 간에 지루한 공방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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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산청추모공원에서 열린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위령제
 지난해 11월 산청추모공원에서 열린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위령제
ⓒ 산청군청 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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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거부권은 산청·함양 때문, 단독 배상법 만들겠다"

거창 민간인학살사건 유족회는 정부가 2004년 '보상 특별법'을 거부한 이유가 산청·함양 사건이 포함된 것이라 보고, 이후부터 거창사건만을 배상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창사건 유족회는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한 1951년, 그해 말 열린 군사재판에서 거창사건만을 대상으로 책임자들이 처벌 받았기 때문에, 거창사건 희생자만이 배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김길영 거창사건 유족회장은 "거창사건은 가해자가 형을 받았다, (재판으로) 국가가 책임을 졌으면 배상을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산청·함양 사건은 동일한 부대만 맞는 것이고 가해자가 형을 산 적이 없으며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당시 산청·함양 지역구 국회의원인) 권익현 의원이 민정당 대표의원으로 끼워 넣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또 2004년 보상 특별법을 정부가 거부한 이유로 "거창사건 등으로 (특별법에 명시하면) 전국에 있는 (유사)사건 보상 요구가 이어질 것(을 우려해 거부권을 했다)"이라고 단정 짓고, "(거창사건 명예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해 온 만큼 우리는 무조건 (거창사건) 단독으로 (법안 발의를)하겠다"라고 잘라 말했다.

"산청·함양사건 은폐, 거창사건 축소한 재판, 정당성 상실"

반면 산청·함양 사건 유족회는 지난 1996년 발효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산청·함양사건이 포함된 만큼 두 사건을 동일 사건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산청·함양사건 유족회 정재원 회장은 "당시 군사재판은 산청·함양 사건은 은폐한 채 거창사건만을 대상으로 했고, 피해자도 150여명으로 축소했다"라며 "문민정부 때인 1996년 발효한 '특별조치법'이 시대적으로나 내용면에서도 정당성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산청·함양 사건 유족회는 '희생자 배상법'은 모법이랄 수 있는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에 준용해 "거창사건 희생자뿐만 아니라 산청·함양 사건 희생자도 포함해서 제정해야 한다"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8년 민주당 우윤근 의원(전남 광양, 현 국회 사무총장)이 거창사건만을 배상하는 '특별조치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같은 당 김충조 의원(전남 여수)의 산청·함양사건을 포함한 수정법안이 본 회의에 동시 상정되면서 양 법안 모두 부결됐다.

오락가락 배상법안, 국회 본회의 통과 못하고 폐기

이어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김재경 의원(경남 진주을)이 거창과 산청·함양 사건 모두를 포함하는 배상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본 회의에 오르지도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이 과정에서 두 유족회는 각각 법안 통과와 부결을 위해 치열한 물밑작전을 펼쳤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6일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박범계 의원(대전 서구을)이 '거창사건 관련자의 배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 등 11명과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 등 4명, 새누리당 원유철 의원과 무소속 서영교 의원 등 전체 17명이 동참했다.

법안에는 '거창사건은 다른 사건과는 달리 주민들을 즉결 처분하도록 명령을 하달한 명령권자가 ~중간 생략~ 1951년 12월 16일 대구고등법원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유기징역에 각각 처한 사건으로서 국군의 위법행위를 인정한 사건인 바,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과 그 유족에게 배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라고 제안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산청·함양 사건 포함 법안 발의하면 병합 심사할 것"

이러한 법안 발의가 알려지자 산청·함양 민간인학살사건 유족회는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산청·함양사건 유족회는 "거창사건은 1951년 2월 산청·함양사건 발생 이틀 뒤에 같은 국군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동일한 사건으로 배상법안 역시 같은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반발했다.

또 유족회는 "정부에서조차도 거창과 산청·함양 사건은 같은 사건으로 다루고 있으며, 동일 법률안으로 발의되는 것이 맞는다고 보고 있는데, 거창유족회만 개별 법률안을 고수하고 있다"라며, "2004년처럼 정부가 또 재정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할까봐 지레 겁을 먹고 산청·함양 유족들을 저버리고 있다"라고 아쉬워했다

이번 법안을 대표 발의한 박범계 의원실 보좌관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거창사건 유족회가 '19대 국회 때부터 추진해 왔던 (우윤근 의원) 법안을 재 발의해 주었으면 좋겠다'해서 대표 발의했다"라고 밝히고 "(법안에는) 산청·함양 유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경과조치까지 부칙에 포함시켰다"라고 설명했다.

이 보좌관은 "해당 지역구 의원이 (산청·함양 사건을 포함하는) 비슷한 법안을 발의하면 병합 심사해 법안 제명도 변경할 수 있다"라고 유연한 입장을 나타냈다.

"국회·정부 조정자로 나서 논란 종지부 찍어야"

이에 대해 지역구 강석진 의원(새누리당 거창·함양·산청·합천)은 "거창사건 유족회가 산청·함양 사건을 법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고 밝히고 "두 유족회가 합의해 같은 사건이라는 데 의견을 조율한다면 법안 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한편, 배상법안 발의에 관여했었다는 익명의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산청·함양 사건은 1988년 이후에야 진실 규명이 됐으며, 1996년 두 사건을 한데 묶은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이 제정됐다"고 소개하고 "이미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에서 두 사건을 동일 사건으로 인정한 만큼 개별 배상법도 이를 준용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며 의견을 피력했다.

또 이 보좌관은 "국회의원이 이미 골이 패인 두 유족회에게 합의를 종용할 것이 아니라, 정부와 함께 조정에 나서 분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라고 해법을 제시했다.

거창과 산청·함양 민간인학살사건은?
희생자 유족이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희생자 유족이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 산청군청 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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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설 다음날인 2월 7일에 경남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과 유림면 서주마을 등 네 마을에서 양민 705명이 국군(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유는 '공비들과 내통했다'는 이른바 '통비분자'라는 것이다.

이들 국군부대는 이틀 뒤인 2월 9일 거창군 신원면 내탄마을 골짜기에서 주민 136명을, 11일 박산계곡에서 527명의 주민을 같은 이유로 학살했다.

그해 3월 29일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의 폭로로 알려진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5월 8일 국회 결의로 진상이 공개됐으며, 12월 16일까지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학살책임자 재판에서 9연대장과 3대대장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하지만 재판은 거창사건 희생자가 150여명으로 축소되고, 산청·함양사건은 은폐된 채 진행됐으며, 이 판결이 최근 들어 발의되고 있는 두 학살사건 개별 배상법안 제정에 논란의 단초가 된다.

4.19혁명 직후 국회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해 거창과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의 실체를 밝혀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또 반전됐다.

유족들은 이 사건과 관련해 명예회복은 고사하고 어떤 발언도 용납되지 않았다. 심지어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과 함께 연좌제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듬해인 1988년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며, 땅속 깊이 파묻혔던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어 사건발생 45년이 지난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15대 국회에서 통과돼 2004년 거창군 신원면에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2008년 산청군 금서면에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이와 함께 희생자 개별 배상에 대한 법안 제정도 국회에서 논의되면서 2004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되는 등 지금까지도 미완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태그:#거창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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