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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유배였던 청령포를 찾아 이곳에서 생활이 어떠했을까를 더듬다.
▲ 청령포 단종의 유배였던 청령포를 찾아 이곳에서 생활이 어떠했을까를 더듬다.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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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들어서자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차에서 내려 역사관을 돌자 강 건너 청령포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 그늘에 앉아 간간이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청령포를 바라본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분주히 오간다. 노 젓는 뱃사공의 노랫소리는 간 곳 없고 고성능 엔진 소리만 요란하다. 유유히 흐르는 물들의 질서를 흔들어 놓는다. 소용돌이를 만난 물길은 물보라 일으키는 파도를 만들며 나룻배를 밀어낸다.

나룻배가 청령포에 닫자 우르르 관광객들이 내린다. 반짝이는 모래와 조약돌의 마중을 받으며 600여 그루로 이뤄진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산을 휘감고 돌아 물돌이에 둘러싸인 청령포는 푸른 솔숲을 이루고 있다. 그늘이 드리워진 오솔길은 당시의 아픔은 잊은 채 한가로움이 묻어난다. 여기가 비운의 왕 단종이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다. 한 맺힌 절규의 애틋함을 푸른 소나무들은 알고 있을까.

단종의 어소인 기와집 한 채와 시중을 들었던 궁인들이 거쳐했던 초가집 한 채가 있다. 유배지 어소는 외로움과 한스러웠던 생활의 현장이다. 권력에 짓이겨 왕좌에서 내려졌다고 하지만 형님이었던 문종의 아들이었고, 권력을 찬탈한 수양대군에게는 조카가 아니었던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과 금력 앞에서는 부모 형제간의 천륜도 저버리게 된다. 권력과 돈, 명예를 가지면 인간의 존엄성을 뛰어넘는 그 어떠한 것에 사로잡히게 되는가 하는 생각에 잠시 젖어든다.

단종이 기거했던 유배지 어소는 기와집으로 5칸이다. 중앙 3칸은 대청마루와 바깥 마루로 만들어졌다. 한양을 바라보는 서쪽 1칸은 단종이 침소로 사용했던 곳이고, 동 1칸은 글공부를 하며 지내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침소와 공부방은 앞뒤로 작은 방이 3칸으로 구성되어있다. 뒤쪽에 있는 방이 단종이 공부를 하는 방이고, 중간 방이 단종을 알현하는 선비의 방이다. 그리고 앞쪽의 방은 마루청으로 되어 있어 글공부에 지친 단종이 이 작은 마루에서 휴식을 취했다.

담장 바깥은 단종의 시중을 들던 시종(궁인)의 처소인 5칸 초가집이 있다. 북쪽 3칸은 방이고, 1칸이 부엌(재래식 아궁이 부엌)이다. 그 옆은 곳간이다. 곳간은 고방이라고 불리는 창고로 곡식을 쌓아두는 곳이다. 바깥 처마 밑은 멍석과 곡식을 담던 키 등 농기구들이 쌓여 있다. 이것을 볼 때 단종이 시종들이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가 있다. 비는 1457년 6월 22일 조선왕조(朝鮮王朝)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 생활을 하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유배지의 흔적이 불타 없던 것을 영조임금이 고증을 통해 단종의 어소를 축조했다고 적혀있다. 어소가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하여는 설명이 없어 아쉽다.

어소의 출입문은 3곳이다. 정면에 두 곳은 단종과 선비들이 출입하는 문이고, 동쪽문은 초가집과 연결되어 있다. 출입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정면 출입문은 한곳인데 중앙에 담을 쌓아 갈라놓은 것이 신분에 따라 출입하는 문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현대판 권력자의 집인 국회의사당에도 국회의원과 일반 국민들이 이용하는 승강기가 따로 있다는 보도를 떠올리면 옛날이나 요즘이나 권력의 벽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면 출입문을 기대선 소나무가 담장을 넘어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이 소나무는 단종 임금을 지키지 못한 사육신의 넋이 경계의 눈을 피해 담장을 넘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또한 주변의 소나무들 모두가 가지를 어소를 향해 뻗어있다. 소나무들도 단종임금 향해 문안 인사를 드리는 형상이다.

어소 동쪽에는 600여 년의 풍상을 겪어온 관음송(觀音松)이 하늘을 찌를 듯한 위상을 자랑하며 서있다. 관음송은 단종이 갈라진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영월의 대표적인 소나무다. 둘레가 5m이며, 높이는 아파트 10층을 훌쩍 넘어서는 30m가량이다. 소나무를 관음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종의 비참했던 모습을 훤히 알고 위로와 슬픔을 함께 했을 것이라고 보아 볼관(觀)과 애달픔의 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음(音)자를 써 관음송이라 전한다. 나무의 나이를 상징이라도 하듯 가지의 생김새가 여느 나무와는 다른 고목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단종이 나무가지에 올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관음송 단종이 나무가지에 올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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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남몰래 산책을 했다는 길을 따라 오른다. 강물이 휘감아 돌아 깎인 절벽위에 망향탑이 있다. 작은 돌멩이로 만들어진 탑은 규모가 작다. 탑은 "청령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六六峯)과 노산대(魯山臺)사이에 있는 돌탑으로 어린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이곳에 올라 한양 땅을 그리며 쌓았다는 탑으로 그 당시 애절했던 단종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고뇌는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잃은 단종은 무엇을 꿈꾸며 소원을 빌었을까, 지난날의 권력이었을까, 자신이 보살펴야 할 (정순왕후[定順王后]) 여인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는 자신의 근황을 작은 돌멩이에 담아 바람결에 날려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필자는 절벽을 넘어 아득히 먼 한양이 보이는 듯, 한참을 멍하니 있다.

망향탑 아래 또 다른 절벽이 있다. 노산대(魯山臺)다. 이곳은 단종이 해질 무렵이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고 하여 노산대라고 불렸다. 노산대를 내려오자 평지에 금표비(禁標碑)가 있다. 금표비는 만고의 풍상을 이겨낸 듯 비석 지붕이 허물어졌다. 영조임금이 유배지 훼손을 막기위해 백성의 출입은 금한다는 표석을 세운 것이 금표비다.


태그:#청령포 , #관음송, #영월 , #단종, #망향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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