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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옥바라지골목 공사가 22일부터 재개돼 남아있는 한옥들이 철거되고 구본장여관 일부가 훼손돼있다.
 옥바라지골목 공사가 22일부터 재개돼 남아있는 한옥들이 철거되고 구본장여관 일부가 훼손돼있다.
ⓒ 보존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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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남은 건물 몇 채마저 사라질 위기

"어어, 저걸 어쩌나. 다 무너지네."

보존 여부를 놓고 지루하게 협상이 이뤄지고 있던 서울 종로구 무악2지구 재개발지구 내 일명 '옥바라지골목'이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조합 측은 22일 오전부터 공사를 재개해 남아있던 한옥 3채를 완전히 철거했으며, 보존운동의 상징처럼 돼있던 구본장 여관도 일부가 심각하게 훼손됐다. 공사 가림막 때문에 현장에 접근할 수 없는 대책위 관계자들은 무너진 건물들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조합 측은 "추이를 봐가며 하겠지만, 공사를 멈추지는 않겠다"는 태세다. 서울시도 이날 도시재생본부장, 국장 등 직원 10여명이 나와 조합 측을 설득했지만 공사는 23일 오전에도 계속됐다.

옥바리지골목은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의 길 건너 맞은편에 위치한 곳으로 이곳에 수감됐던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나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가들의 가족들이 옥바라지하던 여관이 밀집됐던 곳으로 알려졌다. 아직 이주하지 않은 주민과 시민운동가들로 이뤄진 보존대책위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재개발조합 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다.

무악2지구 재개발조합은 이곳에 아파트 195채를 짓기 위해 지난해 7월 종로구로부터 관리처분인가를 받고 명도소송에 이긴 후 철거에 들어가 대부분의 건물과 가옥을 철거했다.

그러나 지난 5월 17일 조합 측이 마지막 남은 여관인 구본장여관을 철거하는 현장에 갑자기 박원순 서울시장이 나타나 공사를 중지한 뒤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박 시장은 조합과 주민이 합의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강제철거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 분개, 현장에서 담당 서울시 국장을 질타하고 "오늘부터 공사는 없다, 내가 손해배상 당해도 좋다"고 말한 뒤 현장을 떠났다.

이후 박 시장은 조합과 대책위 관계자들을 직접 시장실로 불러 간담회를 가진 뒤 원만한 타협을 주문했다. 특히 대책위 관계자들에게는 이같은 상황이 빚어진 데 대해 사과하고, "방법이 찾아질 때까지 이 곳에서 더 이상의 강제집행은 없도록 조치 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철거가 시작되기 이전의 옥바라지골목 일부. 지금은 구본장여관만 남아있다.
 철거가 시작되기 이전의 옥바라지골목 일부. 지금은 구본장여관만 남아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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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장으로 있는 한...", 그러나 꼬여버린 협상

박 시장은 자신이 진행하는 페이스북 생방송에서 과거 용산참사 때 진상규명 작업에 참여했던 일을 회상하며, "앞으로 내가 시장으로 있는 동안 서울시에서 무참한 강제철거가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후 서울시는 담당부서와 정무라인을 동원해 조합 및 대책위와 수 없이 협상하고 중재하는 노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옥바라지골목의 역사적 가치를 주장하며 남아있는 건물이라도 최대한 보존하려는 대책위와 비용을 최소화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재개해야 하는 조합 측의 입장차를 좁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박 시장은 '서울시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공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했지만, 막상 재개발지역은 조합 측의 사유물이므로 법적으로 무한정 공사를 보류할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

시 자문위원들이 옥바라지골목의 역사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상황도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시는 지난 7월 아직 철거되지 않은 도로변 기존 상가 일부 및 한옥 등을 저층으로 남겨서 역사·생활문화유산 홍보관, 지역 커뮤니티 공간 등 청년 주도의 도시재생사업 실행공간으로 활용하고, 인근 근대 문화재들을 잇는 역사탐방로를 조성하겠다는 '최종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구본장여관은 새로 짓게 될 아파트와 일부 위치가 중첩돼 존치가 불가능하다고 통보해 대책위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대책위 관계자에 따르면, 시와 대책위는 최근 구본장여관과 주택을 철거하는 대신 주민을 임대주택으로 옮기는 등 입장차를 많이 좁힌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만간 조합 및 시공사와도 최종 협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협의 진행중에 공사를 강행해도 조합 측에 공사 중단을 호소하는 것 외에 아무런 대책이 없는 서울시를 이해할 수 없다"라며 "그럼 우리와 합의한 것은 뭐냐"고 분개했다.

조합 측은 그러나 "갑작스럽게 공사를 재개한 것이 아니고, 이미 3개월이나 기다려왔다"며 "그간 매달 대출금 이자가 2억원씩 발생했으며 일반분양 시기를 놓치는 등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고 항변했다.

또한 "그간 대책을 내놓겠다는 서울시와 협의를 할 만큼 했지만 마땅한 대안이 나오지 않았고, 공사가 미뤄지는데 대해 격분한 조합원들을 말릴 수가 없다"며 공사를 계속할 것을 시사했다. 실제 22일 공사 현장에는 10여 명의 조합원들이 나와 대책위를 비난하는 벽보를 붙이고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5월 17일 옥바라지골목 현장을 직접 방문해 담당 간부에게 공사 중단을 지시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5월 17일 옥바라지골목 현장을 직접 방문해 담당 간부에게 공사 중단을 지시하고 있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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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노력 헛수고? 다시 박원순을 바라보는 눈

박 시장의 공사 중단 지시 이후 조합은 매달 늘어나는 금융비용을 감수했으며, 대책위 관계자들은 거리에 천막을 쳐놓고 삼복더위를 고스란히 버텼다. 서울시 관계자들은 조합과 대책위를 오가며 합의안 마련을 위해 진땀을 뺐고, 직원들이 하루 종일 교대로 모기에 뜯기며 현장을 감시해왔다.

그러나 이제 3개월 넘는 노력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무산될 위기에 섰다. 나아가 양측 모두 물러설 곳 없이 벼랑에 선 마당에 철거현장에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담이 없다.

지난 5월 공사를 중단시킬 당시 박 시장은 상황이 이렇게 꼬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다시 박 시장의 정치적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태그:#옥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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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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