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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폭염주의보가 발효되고, 전국이 찜통더위로 가마솥처럼 펄펄 끓고 있는데 제주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고 말하니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올레길을?"

이어 매우 걱정하는 투로 말린다.

"봄이나 가을에 가, 이 더위에 죽는다. 죽어."

그런데, 어쩌랴, 비행기표는 이미 예약을 해 놨고, 게스트하우스 예약도 다 마쳤는데. 게다가 입추인 8월 7일부터 걷겠다고 예약을 했는데 날씨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취소를 할 수도 있지만 살아보니 그렇게 시간과 돈과 상황이 모두 다 딱 맞아 떨어지는 때는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떠나기로 했다. 중2 아들과 함께.

아침 7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린 것이 7시 45분, 그런데 어제 저녁 어디선지도 모르게 찔린 손가락에서 피가 나면서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공항약국에서 연고와 밴드를 사서 바르고 안내 데스크로 가서 올레 5코스 남원포구 가는 방법을 물으니 100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730번 버스로 갈아타라고 한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창구로 가서 남원으로 가는 표를 달라고 하니 표를 끊지 말고 그냥 교통카드로 730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그럼 왜 일반 승차장에서 버스를 갈아타지 않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라고 하지? 뭍사람은 도통 적응이 안 되는구만."

그동안 제주도를 여러 번 왔지만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처음이다. 남원포구까지는 1시간 정도를 가야한다고 하는데, 정작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별로 없다. 아마 폭염 때문에 사람들의 외출이 줄어든 모양이다. 그래도 차는 바쁠 것도 없이 천천히 간다. 북제주에서 서귀포방향을 향해 가는데 버스에서 안내하는 제주 방언으로 된 동네 이름들이 너무 재밌다.

"다음 정거장은 디삘레입니다. 다음 정거장은 올리수입니다. 불미터입니다. 돈몰교입니다."

"이건 뭐 거의 외계어 수준이야" 하며 아들과 웃었다. 행여 버스로 이동하는 여행에 불편해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에어컨 나오지, 운전 안 해도 되지, 몸도 마음도 편해서 좋고 아들도 버스 여행을 재밌어한다.

3박 4일 일정으로 온 이번에는 20코스의 올레길 중 가장 유명한 5, 6,7번 길을 걷기로 했다. 드디어 비행기를 탄 시간보다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려 남원포구에 도착했다. 올레길 여행안내소에 들러 올레 여행도장을 찍을 수 있는 패스트포트를 샀더니 안내원이 걱정을 한다. 요즘엔 너무 더워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잘 없다는 것이다. 내심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태연한 척 5번 코스 출발 지점에 첫 번째 올레길 출발도장을 찍고 사진도 찍었다. 아들은 앞으로 틈틈이 와서 패스에 도장을 다 채울 거라고 다짐을 했다.

"20코스를 아들과 함께 다 걸을 수 있을까?"

배낭을 메고 올레길을 걷고 있는 아들
 배낭을 메고 올레길을 걷고 있는 아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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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집을 떠난 지 4시간 만에 드디어 올레길에 들어섰다.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바닷물을 가둬 풀장을 만든 남원 포구 용암해수풀장은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5코스 한쪽으로는 푸른 바다와 검은 돌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절경을 선사하는데 정작 우리는 아스팔트를 따라 걸어야 한다. 아스팔트는 신발이 바닥에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뜨겁다. 바닥이 뜨겁다보니 정말 가마솥 위를 걷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게다가 3박 4일 짐을 챙겨 멘 배낭의 무게는 갈수록 무거워지고 땀은 흘러내려 등을 뜨겁게 한다. 길을 나선 지 30분 만에 온 몸은 이미 땀에 완전히 젖었다.

해안 길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서자 우거진 숲이 만들어주는 그늘 덕분에 걷기가 한결 편한다. 1시간쯤을 걷다 숲길 끝에 기다리던 풍경이 나타난다. 바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한반도 지도 모양의 풍경이다. 안타깝게도 나무가 너무 자라 한반도 모양의 아랫부분이 좀 가려져 안타까웠다.

숲이 만든 지도
▲ 5코스 한반도 지도 숲이 만든 지도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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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로 내려꽂히는 햇살이 점점 강렬해지니 사실 풍경이 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입에서도 더운 입김이 풀풀 나오는 것 같다. 게다가 한창 절정으로 자란 풀들 때문에 양쪽 다리는 쓸려 따갑고, 극성스런 숲모기들에 양 다리는 집중폭격을 당했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정말 한 명도 볼 수가 없다.  

나는 중2인 아들이 함께 올레길을 걷지 않겠다고 하면 혼자라도 올 계획이었다. 그때는 올레길을 걸으면 여러 순례꾼들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었다면 만약 혼자 왔다면 진작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새삼 물밀 듯 밀려든다 .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 그러나 우리가 내딛는 걸음은 망설임이 없다. 파도모양의 올레표지판이 우리의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파란 화살표는 정방향을 걷는 사람들이, 노란화살표는 역방향을 걷는 사람들이 지표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갈림길마다 멈춰 서서 파란 화살표를 찾았다. 제주의 조랑말을 형상화한 간세가 예쁘게 서 있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간세의 머리 방향을 보고 걸어야 한다.

파란화살표는 정방향을 걷는 순례꾼이 노란화살표는 역방향을 걷는 순례꾼들이 보는 것이다
▲ 올레길 파란 화살표 파란화살표는 정방향을 걷는 순례꾼이 노란화살표는 역방향을 걷는 순례꾼들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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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이 너무 나오지 않자 길바닥에서 지도를 확인중인 아들.
 식당이 너무 나오지 않자 길바닥에서 지도를 확인중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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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한 지 2시간, 우리는 제대로 된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왔고 등산길에 꼭 필요하다는 사탕 하나 챙겨오지 않았는데 식당은 고사하고 구멍가게 하나 나오지 않는다. 올레길 안내원에게 물었을 때는 분명히 가는 중간에 식당들이 있다고 했는데 한 곳도 찾을 수가 없다.

다행히 생명수나 다름없는 물병은 챙겨 왔지만 허기가 져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다. 나는 슬슬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집에서 같으면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칠 텐데 그런 투정도 없이 걷고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대견하다. 거기다가 밴드를 감은 손가락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앓는 소리를 내니 되려 나를 계속 걱정해준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대견했나 ?" 말을 하지는 않고 혼자 속으로 생각을 한다.

둘 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에야 드디어 위미라는 작은 동네가 나타났다. 동백나무로 유명한 이 마을은 겨울에 만나면 온 동네가 동백꽃에 뒤덮여 절경을 이룬다고 하는데 지금은 짙푸르게 자란 동백나무들만 빽빽하다. 혹시 식당이 없을지 간절하게 찾고 있는데 드디어 식당이 하나 나타났다. 다짜고짜 보이는 첫 번째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도 뭐고 일단 에어컨이 빵빵 나오니 더위를 좀 식히고, 무엇으로든 허기를 면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들어가 보니 정식을 파는 식당이다. 돼지갈비에 꽁치구이까지 나오니 아주 맛있게 점심을 해결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점점 통증이 심해져 젓가락질을 잘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식당에서 허기를 해결하고 풀었던 배낭을 다시 메니 배낭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길을 나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사람이라곤 여전히 하나도 없다. 아들이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노래를 튼다. 요즘 아들이 빠져 있는 랩의 향연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사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데 흥겹기는 하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진다. 누구냐고 물으니 비와이, 슈퍼비, 씨잼... 어쨌든 이들이 고된 걸음에 위로가 되니 고마울 뿐이다. 

좁은 산길을 벗어나 또 작은 동네를 만났다. 동네어귀 그늘에 나와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는 우리를 손으로 불렀다. 가까이 갔더니 옆에 앉으라고 한다. 그리고는 완전 제주 사투리로 말씀을 하셔서 반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 더위에 무슨 짓이냐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제주에 살아도 이렇게 더운 날씨는 처음 보는데 어떻게 걷는냐는 거다. 할머니 옆에 앉았더니 또 다른 할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셨다. 이 곳이 마을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바람이 거의 에어컨 수준으로 분다. 5코스 구간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할머니 옆에 앉아 30분쯤을 더위를 피하다 다시 길은 나섰다 .

우리를 불려앉혀 쉬어가라고 한 제주 할머니.
 우리를 불려앉혀 쉬어가라고 한 제주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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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안내서에 보면 5코스의 총길이는 14.4km,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4시간에서 5시간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4시간이 지났건만 전체 코스의 절반밖에 못 왔다. 더위에 중간 중간 쉬다보니 속도가 한없이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떠랴, 삶이 그러하듯 올레길도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올레길 표지판을 따라 잘 가고 있다. 조금 늦을 뿐 .

길을 걷다보니 그런 생각도 든다. 누가 시켰으면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했으랴, 만약 어쩔 수 없이 했어야 한다고 해도 얼마나 불평을 했으랴, 그런데 모두가 말리는데 시작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랴, 탓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오로지 감당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시켜서 하는 고생은 어떤 고생이든지 감당할 수 있다.

다행인 것은 나 때문에 길을 나선 아들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며 아들이 자신의 인생에서도 이렇게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손가락 통증이 너무 심해져 올레길을 벗어나기도 했다. 간단한 약을 구비한 편의점이 없어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그래도 아들이 불평 한 마디없이 사람만 만나면 편의점을 묻고 다니는 모습에 감동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결국 편의점 한 곳을 찾아 진통제를 먹고 나니 통증이 좀 가라앉았다. 손가락 때문에 허비한 시간이 1시간은 족히 될 듯하다.

올레 패스포트에 찍힌 5코스 완주도장
 올레 패스포트에 찍힌 5코스 완주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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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5코스 목적지인 쇠소깍에 도착한 것이 오후 6시, 오전 10시에 출발을 했으니 무려 8시간 만이다. 올레길 코스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더니 이 곳에 다 모여 있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먼저 올레 완주종점을 찾아 도장을 찍었다. 올레길 순례도장은 시작과 중간, 끝점에 찍는 곳이 있다. 드디어 5코스 도장 3개를 완성하니 이게 뭐라고 한없이 뿌듯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간다. 제주 현무암 지하를 흐르던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쇠소깍물이 너무 차고 시원하다. 하루 동안의 피로가 파도에 싹 씻겨 내려가는 듯 하다.

"아, 드디어 완주했다. 그런데, 내일은 과연 걸을 수 있을까?"

첫째 날의 깨달음 : 마음이 시키는 일은 아무리 어려워도 해낸다.


태그:#올레길 5코스, #한반도 지도, #폭염, #쇠소깍, #올례길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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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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