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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멋을 중시하지만 보이는 상태 그대로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 크고 거창한 것보다 작고 소담한 절집이 더 정이 가고,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예배당보다 산촌의 흙벽으로 된 작은 예배당이 더 큰 복을 받을 것 같단 생각은 나만 그럴까.

남강이 흘러들어 낙동강과 합치는 두물머리는 함안에서 보면 정면으로 가장 넓게 창녕군이 자리하고, 왼쪽으로 조금 빗겨 의령군이 자리하고 있다.
▲ 두물머리 남강이 흘러들어 낙동강과 합치는 두물머리는 함안에서 보면 정면으로 가장 넓게 창녕군이 자리하고, 왼쪽으로 조금 빗겨 의령군이 자리하고 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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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아라가야에 대해 그 연원이 궁금해 국립국어원의 자료까지 찾아봤다. 그곳에서 '일부 자료에서 淵(연)을 아라로 표기한 것을 보아 연못이나 강의 순우리말로 보기도 한다'고 확인했다.

창녕과 의령, 함안을 강줄기가 나누는 지점에 위치했던 함안지역이 아라가야로 통했던 것은 바로 그 강에 기대어 문화를 꽃피운 이들이란 의미는 아니었을까. 또 다른 의미로는 보다 더 오랜 역사를 거슬러 가장 기본적인 언어의 형성과정에서 수메르인들이 이주를 해야되었던 시대에 주로 이야기되는 건국설화들을 바탕으로 '아'는 그대로 '알'을 의미하고, '라'는 '태양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만큼 태양과 가장 가깝게 소통하는 왕이 다스리던 나라라는 의미로 쓰였을 수도 있다.

마침 7월 29일과 30일 이틀간 함안을 둘러 볼 기회가 생겨 흔쾌히 응답하고 나섰다.

27일 서울 인사동에서 중복을 맞아 양양에서 특별히 준비한 미꾸라지와 송이버섯으로 좋은 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1시가 넘은 시간 다음 날 일정을 시작하기 좋은 장소로 자리를 옮기려고 나선 것이 화근이라 카메라를 분실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정을 조금 넘겨 정신을 차린 뒤 이리저리 확인했으나 이미 사라진 카메라를 찾을 길이 없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러나 경찰도 형식적으로 "이곳엔 CCTV가 없어 찾기 어렵습니다"란 말만 하고 떠났다.

카메라는 잃어버렸어도 약속한 일정은 어쩌겠는가. 스마트폰으로라도 일정을 소화할 생각으로 마산으로 갔다.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촬영을 하는 중간에도 누군가에게 도난을 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한다는 걸 알기에 시간을 허비하여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사찰에 들면 가끔 만날 수 있는 아주 작은 불상을 돌위나 바위틈에 놓은 풍경이다.
▲ 작은 불상 사찰에 들면 가끔 만날 수 있는 아주 작은 불상을 돌위나 바위틈에 놓은 풍경이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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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 9시 30분 약속시간을 맞추기 좋은 곳에 숙소를 정했다. 어쨌든 어찌 마음 아리고 답답하다 아니 하겠는가. 분신과 같은 카메라, 그것도 이제 2달 사용한 카메라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좋은 분들 함께 나눈 기록을 잃었음에야…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운 기억이 거의 없는 내가 이렇게 묵직한 돌덩이 하나 가슴에 얹을 줄 몰랐다.

거리표시도 없이 그저 방향만 안내하는 장춘사 가는 길의 이정표
▲ 장춘사 이정표 거리표시도 없이 그저 방향만 안내하는 장춘사 가는 길의 이정표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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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30분, 마산역에서 25인승 버스는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안군 칠북면 북원로 110-1 내 위치한 장춘사에 도착했다. 장춘사 대웅전은 1979년에 신축한 건물로 팔작기와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이른다.

대웅전 뒤편에는 맞배지붕으로 정면1칸, 측면1칸의 조그마한 약사전이 있는데 이곳에 안치된 불상이 지정문화재로 보관되고 있는 약사여래좌상이다.

가파른 비탈에 핀 장춘사의 상사화는 짙은 녹음과 함께 또 다른 즐거움을 선물했다.
▲ 장춘사 상사화 가파른 비탈에 핀 장춘사의 상사화는 짙은 녹음과 함께 또 다른 즐거움을 선물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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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의 무릉산 자락 장춘사로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제법 가파른 비탈에 무리지어 핀 상사화였다. 武陵山中 四時長春(무릉산중 사시장춘)이란 말로 이 산과 절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 김훤주 해딴에 대표가 한 말을 풀면 '무릉산 가운데 늘 봄이네' 정도가 될까. 그곳의 7월 하순, 양양에서는 여름 끝자락에나 만나는 상사화가 피어 있으니 장춘이 아니라 盛夏(성하) 아닌가.

상사화는 나팔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몇 종류 안 되는 남자와 관련이 있는 전설을 간직한 꽃이다.

꽃에 얽힌 전설로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어느 마을에  정말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살았는데 그들에겐 그토록 바라는 아이가 없었다. 간절히 바라던 중 늦게 태어난 아이가 딸이었다.

고명딸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님께 지극한 효성을 하는데 그 깊은 효심만큼이나 절세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는데 극락왕생하시길 기원하며 절에 올라가 백일동안 탑돌이를 하였다. 그 절의 큰스님을 지키던 상좌가 그만 그런 어여쁜 처녀를 바라보다 저 홀로 짝사랑을 하게 된다. 중이 사랑을 한다면 욕을 먹을 일이라 누가 볼까 두렵고, 마음이라도 행여 들킬까싶어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어느덧 100일이 다 되어 불공을 마친 처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처녀가 떠나던 날 그 상좌는 절 뒷산에 혼자 올라가 몰래 처녀의 뒷모습만 훔쳐본다.

그길로 상좌는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는데 이듬해 절집 담장아래 이름 모를 꽃이 피어났는데 풀이 먼저 나고 모두 시들자 꽃대가 올라왔다고 한다.

꽃과 풀이 영원히 함께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는 그래서 애틋한 짝사랑을 빗대어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짝사랑으로 앓게 되면 상사병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상사병이 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풀 죽은 모습으로 멍한 눈빛을 한 채 먼 산을 마냥 바라본다. 누군가 그만큼 애타게 그립다는 이야기겠다.

기왕 사랑을 하려면 비익조나, 연리목, 비목어와 같이 둘이 돼 한 몸으로 나누어야 할 것을 그러지 못하는 처지인 경우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결국 운명까지 달리하는 경우도 있으니, '사랑'이란 대관절 무엇이기에 형상도 없는 것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아프고 힘겹게 하는 것일까?

하기야 카메라 하나 잃어버렸다고 이렇게 마음 둘 데 없는 허망함을 품고 있으니 상사화를 만난 감정이 필요할 때 없는 이를 그리듯 미묘하다.

무더위와 높은 습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나뭇잎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곳에 핀 상사화는 고왔다.
▲ 상사화 무더위와 높은 습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나뭇잎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곳에 핀 상사화는 고왔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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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상사화를 보고 또 다른 이름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석산이나 꽃무릇으로도 불리는 개상사화를 말하는 것이라 짐작된다. 개상사화는 색도 붉고 꽃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바짝 치켜든 반면 상사화는 다소곳하다.

정말 가슴에 묻어 둔 사랑을 고백조차 해 보질 못한 사내의 모습처럼 안타까운 모습이고 꽃빛도 숨겨둔 사랑처럼 애잔하다.

또 하나의 전설
-봄볕 포근한 마을에도 그늘진 곳은 있지 않은가

어느 따사로운 봄날
마을의 태 고운 처녀들이
산밭 양짓녘으로
뾰족이 고개 내민 청춘을 찾아
독사눈을 뜨고 휘돌 때
허물어져 가는 욕정의 끄트머리를 잡고
젊었던 날을 추억하는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이 서글픈 것이라
나는 술을 마시는 것이다.

먼 기다림으로
무성하던 풀이 시들고
애 마른 낯빛으로
상사화 꽃이 피는 밤
술 취해 흔들리는 동공 속으로
마지막 너를 담는다

'먼 후세에 또 다른 전설로
네가 풀이 되고
내가 꽃이 되어
피 말라보기를…'

가슴 속 깊은 증오를
어둑한 불빛에 감추고
너를 위한 거짓 기원을
진실인 양 신에게 드린다

"부디 행복하기를
부디 평안하기를"

20대에 쓴 시다. 벌써 30년 세월이 흘렀다.

솔직하게 밝히지만 나 보다 잘난 놈 만나 가겠다는 여자, 욕 안 하고 뺨 한 대 못 때려 준 거 두고두고 후회한다. 결국 그 덕에 늦게야 장가를 들었으면서 당시엔 오히려 그러는 게 더 현명할 거 같다는 생각으로 이별을 말하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 잔 하고 헤어지자고 했으니…

솔직히 잘 살라던 말도, 행복하라던 말도 다 거짓말이다. 신발 거꾸로 신고 가는 사람 뭐가 예뻐 잘살라고, 행복하라고 하겠는가. 가다 그냥 자빠져 다리나 부러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자들이라면 남자가 그러고 가는데 울며불며 잡기만 할까? 더구나 너 없으면 못 산다는 말로 마음을 흔들던 사람이 이젠 싫다고 간다는데 말이다.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없는 소박한 장춘사의 출입문은 큰 문은 사립짝에 내어주고 오른쪽으로 자그마하게 자리했다.
▲ 장춘사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없는 소박한 장춘사의 출입문은 큰 문은 사립짝에 내어주고 오른쪽으로 자그마하게 자리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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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사 큰 출입구는 일주문도 아니고 그저 남녘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짝이다.

큰 문 온전히 사립짝에 내어주고 사천왕상도 없이 '武陵山長春寺(무릉산장춘사)'란 참으로 소박한 현판 하나 걸고 고개 숙여 들고 나는 문 하나 세워져 있다.

작고 소박하다고 어찌 허투루 대할 것인가.

사람이나 산이나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장춘사의 대웅전 단청은 채색의 미가 깊고 좋다.
▲ 장춘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장춘사의 대웅전 단청은 채색의 미가 깊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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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사는 소박하나 강건한 아름다움을 지닌 절집이다.

덩치 큰 절간을 보면 탐욕스러움부터 느껴지는데 장춘사는 그런 부담 없이 편하게 들고 날 수 있는 절집이다. 대형버스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포장인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까지 만만하다.

불사를 하느라 좀 산만하여 사진 촬영이 망설여졌다.

몇 번의 재건축을 한 탓에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은 대웅전과 곁달린 건축물들을 가로질러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약사전과 산신각이 있는 대웅전 뒤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여름 햇볕에 장의 깊은 맛을 들이고 있는 장춘사의 장독대는 사찰의 규모를 닮아 작고 소박하여 정겹다.
▲ 장춘사 장독대 여름 햇볕에 장의 깊은 맛을 들이고 있는 장춘사의 장독대는 사찰의 규모를 닮아 작고 소박하여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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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찰들은 어디랄 거 없이 모두 '동양최대'라느니 '세계최대'를 외치며 불사를 한다. 먼 후세에 이런 일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모른다.

역시 동양최대와 세계최대의 불상을 내세워 국보급 문화제로 지정이 될 수도 있고, 물욕에 눈멀어 불법으로 사방대중의 해탈을 이끌지 못한 후안무치의 작태라 기록될지 누가 지금 알겠는가.

그에 비하면 장춘사의 불사는 대단하달 것은 없다. 다만 불사가 한창일 때 찾아가다보니 몇 곳 촬영에 방해되는 안전장치들이 있어 불편했다. 그러나 어찌 그것조차 말릴 수 있겠는가.

산신각에서 굽어보는 장춘사는 커다란 감나무와 함께 가을이면 참으로 아름답게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 장춘사 산신각에서 굽어보는 장춘사는 커다란 감나무와 함께 가을이면 참으로 아름답게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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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에서 바라보는 장춘사는 고즈넉하다.

계단 몇 칸 올라섰을 뿐인데 이미 대웅전 지붕이 발아래 놓이고, "역시 산사의 아름다움은 이와 같은 정경"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장춘사엔 약사전과 산신각, 기도처가 각 1칸 크기로 세워져 있다.
▲ 산신각과 기도처 장춘사엔 약사전과 산신각, 기도처가 각 1칸 크기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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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 사는 고장의 설악산(雪嶽山)을 한자음이 가리키는 그대로 눈과 바위의 산으로 풀어버리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해석할 필요성을 늘 느낀다.

3국 시대에 이곳은 신라의 최북방 경계지점이다. 신라의 수도가 서라벌이었듯, 신라의 주요 경계점인 이곳의 산도 서라산이었던 것이 한자음으로 표기하다보니 설악산이 된 것이라고 말이다. 또는 사라산(새로운 해의 산)이었을 수도 있다.

무릉산 또한 어쩌면 그러한 언어의 전달과정에서 굳혀진 이름일 수 있다.

약사여래를 모신 장춘사의 약사전, 바로 그 옆엔 바위틈에서 솟는 샘이 있다.
▲ 약사전 약사여래를 모신 장춘사의 약사전, 바로 그 옆엔 바위틈에서 솟는 샘이 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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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리 높지는 않으나 들고나기에 적합한 길이 거의 유일한 이곳의 지형적 조건으로 무릉산중은 동양 문화권의 이상향인 '도원향'에 기대어, 전쟁과 수탈을 피해 평안한 삶을 누리기에 적합한 산이란 의미로 그리 이름 지었을 법도 하다.

무릉도원의 산중이니 의당 사철 봄이길 소원하는 바, 절집 하나 이름을 장춘사라 지어 그 맥을 유지하고 갈망하지 않았으랴.

덧붙이는 글 | 정덕수의 개인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동시에 개재합니다.



태그:#함안군, #아라가야, #무릉산, #장춘사, #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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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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