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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새벽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황망하게 죽은 여성에 대한 추모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 사회는 '과연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뜨거웠던 논쟁은 어느새 다른 이슈에 밀려났지만, 월간 <참여사회>는 여성들이 왜 이렇게 이 죽음에 공감하고 분노하는지, 이 사건 이후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다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강남역 10번 출구>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기자말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5월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5월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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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며칠 새 보도된 기사의 제목이다.

"강남아파트 60대 여성 살인… 성폭행 뒤 돈 뺏으려다 살해"
"헤어진 여친 얼굴에 빙초산… 경찰의 신변보호도 무용지물"
"50대 남편이 아내 알고 지내던 여성 살해하고 자살"
"목 졸려 숨진 50대 여성 시신…용의자는 '아내 살해' 자살 남성"
"모텔서 여성 살해한 40대 검거"
"한밤 중 30대 여성 무차별 폭행 30대 남성 검거"
"또래 10대 여성에게 감금·폭행도 모자라 성매매까지"


여성들은 다 다르다. 나이, 직업, 재산, 동거형태, 외모, 성적 지향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열거한 기사로만 한정하더라도 범행 장소, 나이, 관계 등 여성마다 차이를 지우고 보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이 사는 세상, 여성들 간의 차이가 뭐 그리 대단하냐 싶게 만드는 여성에게 폭력적인 세상, '그런 여성'만 피해를 당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는 세상, 결국 '그런 여성'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우연히 살아남은 것"임을 아리게 인식하게 되는 세상.

2016년 한국 사회는, 한국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가 결코 타자화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본인의 경험을 통해 되살리고, 상대의 경험에 공감하며 끔찍하게 체화하는 중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얼마나 발생하는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 ⓒat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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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사 모든 영역에서 여성에게 신체적, 성적 또는 심리적 손상이나 괴로움을 주거나 줄 수 있는 성별에 기반한gender-based 폭력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하겠다는 협박, 강제, 임의적인 자유박탈"로 정의하면서(여성폭력철폐선언, 1993) 여성폭력의 범주를 가족 내 폭력, 일반사회에서의 폭력,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남녀 간의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고착시키며, 여성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여성차별철폐협약이 제시한 여성차별에 해당함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아내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으로 드러난 폭력의 문제는 모두 여성에 대한 차별의 극단적인 표현이며 여성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인권 침해인 동시에 사회적 범죄행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정의된 바 없다. 여성에 대한 대표적인 범죄인 가정폭력, 성폭력/성희롱, 성매매 등 그 폭력 유형(?)에 따른 개별 법률이 있기는 하지만 정의가 명확하게 명시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여성폭력에 대한 기본적 정의와 국가적 책무가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는 전 생애에 걸쳐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범죄를 사각지대 없이 처벌하거나 피해자를 보호·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데이트폭력'처럼 최근 들어 그 심각성이 널리 인식되는 범죄의 경우, 피해자를 지원할 마땅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기존에 해왔던 대로 데이트폭력 관련 법을 입법하는 형식으로 여성폭력 범죄를 근절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대책을 수립하려면 여성폭력의 실태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진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여성폭력의 실태 전반을 알 수 있는 통계자료가 없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 폭력 유형에 따라 3년마다 실태조사를 하고 있을 뿐이며, 범죄통계의 경우 단순 성별분리통계에 그치고 있어 여성폭력 실태를 파악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평생 신체적 성폭력을 경험한 비율 10.2%, 지난 1년간 부부폭력 발생율 45.5%, 평생 동안 한 번 이상 성매수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남성 56.7%(여성가족부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실태조사, 2013)가 시사하는 바는 자명하다. 이것이 최소치이고, 성별화된 범죄임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평생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사회의 문화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력범죄(흉악-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 피해자의 약 90%가 여성(대검찰청 2015 범죄분석)이라는 통계 외에 여성살해 사건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분석이 부재한 상황에서 한국여성의전화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을 집계해 2009년부터 여성살해 실태를 보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5년까지 7년간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던 자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657명, 미수 포함 1051명이다. 최소 2.4일에 여성 한 명이 살해됐거나 살인미수 범죄를 경험한 셈이다.

'살아남는 것' 외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세상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5월 25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살해된 여성의 추모집회에 참석해 차별과 폭력을 말한 여성들의 사진이나 신상정보가 노출되고 이에 대한 악성 댓글 등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장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5월 25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살해된 여성의 추모집회에 참석해 차별과 폭력을 말한 여성들의 사진이나 신상정보가 노출되고 이에 대한 악성 댓글 등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장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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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이후 쏟아지는 정부 대책에 대해 "문제는 화장실에 있지 않다"는 논평을 낸 바 있다. 분리화장실이나 CCTV 추가 설치, '정신질환자' 집중 관리와 같이 여성폭력의 원인을 부분적이고 표면적인 것에서 찾고 있는 대책은 여성폭력의 본질에 닿아있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 기인한다. 가부장적 권력관계, 차별적인 문화규범,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이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고 폭력을 유발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이러한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와 차별적 상황을 지속시키고 여성을 통제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성적 불평등에서 기인할 뿐 아니라, 성적 불평등을 유지·강화시키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평등 지수가 전 세계 145개국 중 115위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모든 정책은 성평등을 지향해야 하며, 성평등 정책은 당연히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을 담보해야 한다.

우리는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 여성폭력 실태에 대한 증언이자, 여성폭력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범죄이며, 그렇기에 우리사회가 함께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폭력은 천재지변이나 개인적 불운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힘으로 근절할 수 있는 문제임을 역설하는 분노가 담긴 주장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모든 국민'에 여성이 포함되는가. 2016년 현재, 한국 사회를 사는 여성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 관련 기사
[강남역 10번 출구 특집 ①] 그날 밤 살인사건, 경찰은 잘못 짚고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특집 ②] 그럼에도 여성혐오를 말해야 하는 이유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송란희님은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강남역살인사건, #강남역10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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