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 서재응(39)·최희섭(37)이 15일 합동 은퇴식을 가지고 프로선수 생활을 공식적으로 마감했다. 두 선수는 이날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리는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 앞서 구단이 마련해 준 화려한 은퇴식을 함께 치르며 홈팬들 앞에서 작별을 신고했다.

서재응과 최희섭은 각각 투수와 타자로 포지션은 다르지만 비슷한 야구인생을 걸어왔다. 2년 선후배로 광주 충장중-광주제일고를 함께 다녔고, 이후 미국으로 진출하여 꿈의 무대 메이저리그를 누비기도 했다. 이후 고향팀으로 돌아와 2009년 소속팀의 한국시리즈 V10을 이끌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 번이나 같은 소속팀에서(메이저리그 LA 다저스-템파베이, KBO 기아 타이거즈) 한솥밥을 먹었고, 국가대표팀(2006년 WBC)에서도 함께 활약하는 등 남다른 인연을 이어왔다. 그리고 결국은 은퇴식까지 합동으로 치르게 됐다. 이쯤되면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끈끈한 인연이다.

다만 선수생활의 영광도 비슷했지만 아쉬운 부분도 닮은 부분이 많았다. 서재응과 최희섭의 선수생활은 겉보기에 늘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항상 묘한 갈증과 회한의 연속이었다.

주목 받았던 메이저리거 1세대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서재응·최희섭이 15일 오후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진행된 자신들의 은퇴식에 참석하며 서로 마주보고 있다.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서재응·최희섭이 15일 오후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진행된 자신들의 은퇴식에 참석하며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연합뉴스


메이저리그에서 두 선수 모두 한때 최고의 유망주 대접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서재응은 2002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뒤, 2003년(뉴욕메츠)에서는 한 시즌 최다 9승을 올리며 메이저리그 풀타임 선발투수로 자리잡았다. 최희섭도 플로리다 말린스와 LA 다저스에서 두 번이나 15홈런을 기록했을 만큼 차세대 거포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메이저리그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박찬호나 추신수처럼 오래 장수하지 못했다. 서재응은 2007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면서 통산 118경기에서 28승 40패 평균자책점 4.60을 기록했으며, 최희섭은 통산 5시즌 동안 363경기에서. 타율 0.240에 홈런 40개, 120타점을 올렸다. 유망주 시절의 기대치에 비하면 아쉬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꿈의 무대에 도전했다가 마이너리그도 넘지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무수한 선수도 많다. 적어도 메이저리그에서 수년간 활약하며 한때 풀타임 주전급까지 올라섰던 서재응과 최희섭의 성취는 결코 실패라고 보기 어렵다.

최희섭이 2007년 한국행을 결심하고 이듬해 서재응도 그 뒤를 따르면서 두 선수는 운명처럼 고향팀 기아에서 다시 재회했다. 이후 두 선수는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투타의 주축 선수로서 활약했다.

기아 팬들에게도 서재응과 최희섭의 시대는 '애증의 연속'이었다. 최희섭은 2009년 홈런 33개에 100타점을 올려 전성기를 보냈고, 서재응은 2012년 44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으로 선동열이 보유했던 37이닝 기록을 뛰어넘기도 했다. 두 선수는 2009년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이기도 했다.

2009년 우승 이끈 서재응·최희섭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화려한 시절은 짧았고 시련은 길었다. 서재응은 메이저리그 시절부터 계속된 '아홉수 징크스'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다. 서재응은 커리어 내내 명성과는 달리 정작 한 시즌도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하지 못했다. 9승을 기록한 시즌만 세 번이나(2003년 뉴욕 메츠- 2010, 2012년 기아)된다.

당시 모두 자책점도 3점대 이하를 기록할 만큼 투구 내용이 좋았지만, 타선 지원 부족이나 불펜 난조로 날린 승리가 유독 많았다. 2010년에는 양현종의 다승왕 지원을 위하여 막판 등판 일정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고, 2012년에는 퀄리티스타트만 16번을 기록하고도 또 다시 10승 달성에 실패하며 지독한 아홉수에 눈물을 삼켰다.

기아에서 통산 성적은 8시즌 간 164경기 745.1이닝 42승 48패 2세이브 4홀드 자책점 4.30. 그나마 타이거즈에서 활약한 ML 출신 광주일고 3인방(최희섭, 김병현) 중에서는 가장 꾸준한 팀 공헌도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름값에 비하여 성적 복은 없었던 선수였다.

최희섭은 더 안타깝다.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2009년을 제외하면 사실상 제몫을 해준 시즌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 최근 5년간은 매년 80경기 이상을 출장한 시즌이 한 번도 없다. 부활을 노렸던 2015년도 고작 42경기에 나서서 타율 2할5푼6리 6홈런 20타점을 기록하며 결국 마지막 시즌이 됐다. 기아에서 통산 성적은 9시즌 동안 634경기 출전 2할8푼1리 100홈런 393타점이다.

마침 서재응과 최희섭이 KBO에서 활약하던 시기는 기아가 80·90년대 해태 시절의 영광을 지나 쇠락해가던 과도기였다. 해태 왕조 세대의 마지막 적자였던 이종범 이후 기아는 이적생들의 증가와 젊은 선수들의 등장으로 팀 분위기와 야구스타일도 예전과는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서재응과 최희섭은 이러한 팀의 중심이자 세대교체의 가교 역할로 기대를 모았지만 해외파 출신으로 팀에 뒤늦게 합류하며 KBO에 적응하기에도 바빴던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메이저리거 출신'이라는 화려한 이름값에 쏟아진 높은 기대치는 부담으로 돌아왔다. 팀이 부진할 때마다 이들은 더 집중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팬들의 애증이 녹아있는 서재응·최희섭의 별명

그라운드 떠나는 서재응·최희섭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서재응·최희섭이 15일 오후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진행된 자신들의 은퇴식에 참석하고 있다.

▲ 그라운드 떠나는 서재응·최희섭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서재응·최희섭이 15일 오후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진행된 자신들의 은퇴식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두 선수 모두 최근 타이거즈 출신 선수들 중, 유독 별명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별명 속에 팬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애증이 오롯이 녹아있다.

최희섭의 가장 널리 알려진 별명은 '형저메'(형, 저 메이저리거에요)다. 국가대표팀 훈련당시 선배 이승엽과 나눈 소소한 대화가 와전되어 별명으로까지 굳어져버린 형저메는, 최희섭이 메이저리그 출신이라는 이름값에 비하여 기대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을 비꼬는 의미로 자주 소환됐다.

이후 최희섭이 비시즌마다 등산을 즐기는 것을 두고 야구장보다 산에서 더 자주 볼 수있다는 뜻으로 '산악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며, 이름은 등록되어 있는데 1군경기에는 출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유령', '사이버 메이저리거'등으로 불렸다.

2011년 주장직을 수행하다가 동료들과의 불화로 중도에 하차하는가 하면, 부상으로 병원에서 재활하고 있던 시절에는 소속팀 기아가 아닌 다른 팀의 경기를 챙겨본다는 오해를 받고 비난에 시달리는 등 유난히 소소한 사건사고가 많아서 덩치가 안맞게 '소녀 멘탈'로 불리기도 했다. 최희섭은 보기보다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주변의 작은 비판에도 누구보다 힘겨워했던 것으로 알려진 선수였다.

서재응은 전성기에는 '아트 피처', '컨트롤 아티스트', '서덕스'(그레그 매덕스를 빗댄 표현)같은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KBO 입단 이후에는 잘던지고도 승운이 따르지 않거나 본인이 부진해도 벤치에서 항상 앞장서서 동료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빗대어 '서재응원단장', '서캔디', '멘탈왕', '나이스가이' 같은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물론 성적이 안좋을 때는 비아냥거리는 의미도 쓰였던 별명들이다.

2009년 한국시리즈 한정으로 SK 정근우와의 신경전이 도마에 올랐을 때는 '욕쟁이', '서갑질'로 불리기도 했다. 때로는 오버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서재응의 강한 승부욕과 리더십, 팀에 대한 헌신성을 보여주는 일화들이이다. 

박수 받기에 충분한 그들의 도전

그만큼 기대도 컸기에 아쉬움도 많았던 두 선수의 야구인생이었지만, 그들 역시 누구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들이 비록 KBO에서 달성한 기록을 감안할 때 타이거즈의 레전드라고 불리기에는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들은 타이거즈를 넘어서 2000년대 한국야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수들이다.

박찬호, 추신수, 김병현과 마찬가지로 한국야구의 '메이저리거 1세대'를 형성했던 그들의 도전과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향후 더 많은 후배들이 그들을 거울삼아 더 큰 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서재응과 최희섭이 기여한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었다면 타이거즈는 2000년대 무관으로 남았을 것이고, 대표팀에서도 WBC 4강 등의 업적을 남긴 사실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항상 최고는 아니었어도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그들의 도전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서재응과 최희섭은 이제 유니폼을 벗고 방송해설자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고 있다. 환경이 달라졌어도 그들이 야구의 세계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현역 시절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 인생을 살았던 그들이기에, 시간이 흘러 그들의 경험이 한국야구 발전을 위하여 더욱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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