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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어느날 처음들은 20대 개새끼론

필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2007년 겨울, 20대 개새끼론을 처음 들었다. 그때 20대 중 90%는 이제 30대가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개새끼가 아니다.
▲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 개표방송 필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2007년 겨울, 20대 개새끼론을 처음 들었다. 그때 20대 중 90%는 이제 30대가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개새끼가 아니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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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입학하여 학회 활동 정도를 하던 내가 본격적으로 '운동권'을 만난 건 2007년부터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던 그날 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동권 출신 아저씨들(386 세대였다)과 술을 마시며 사회운동에 대한 사업구상을 함께 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 '20대 개새끼론'을 처음 들었다. 내 나이 27세가 된 어느 날이었다.

처음에 '20대 개새끼론'을 들었을 때,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대학의 학생운동이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 집회를 하는 운동권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거세어진 시기, 신자유주의의 가치를 내건 학생회가 여기저기에서 당선 소식을 알리던 시기. 운동권은 뭐랄까.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가치를 움켜 쥔 체 사회 변화를 거부하는 집단으로 보였다.

운동권의 실패지, 세대의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 진단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 밖 현장에서 목소리 센 아저씨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직접적인 대화를 시작했을 때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네가 잘 모르는 세계가 있어.' '그래도 생업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20대들이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하는 386 세대들의 목소리는 강하고 단호했다. 아직 사회 경험이 없었던 당시의 나는 내가 잘 모르는 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며 뒤돌아섰다.

포스트 IMF 세대는 학생운동을 할 수 없다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기득권이 될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아온 386 세대는, 데모가 없는 날이면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며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학점과 토익 점수와 자격증을 따내기 위해 도서관으로 강의실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포스트 IMF 세대'의 강박을 이해할 수 없다. 386 세대와 같은 운동권 정서를 유지하고 있던 대학의 학생운동은 IMF 이후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87년 체제'를 만든 한국의 학생운동은 서서히 소멸했다. 하지만 사회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때도, 20대는 개새끼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386 세대의 자녀인 당시 중학생들은 촛불소녀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촛불소녀였던 이들은 20대가 된 지금 개새끼가 되었다.
▲ 2008년 쇠고기 집회 때 모인 촛불소녀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때도, 20대는 개새끼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386 세대의 자녀인 당시 중학생들은 촛불소녀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촛불소녀였던 이들은 20대가 된 지금 개새끼가 되었다.
ⓒ 박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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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발달 이후, 사람들은 웹 사이트에서 보다 유연한 방식으로 모였다. 웹에 응집된 힘은 촛불집회를 불렀는데, 이는 2000년대 이후 생겨난 가장 눈에 띄는 시민참여였다.

2002년, 미군장갑차에 희생당한 두 여중생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기 위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광장에 모이는 것만으로도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시기는 노무현 정부까지였다.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피어난 2008년,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생겨난 촛불집회는 평화적인 시위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결국 한미FTA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한 2011년의 겨울날에도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지만, 광우병 촛불집회를 겪은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진화되어 있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전경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에 시위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해산되어야 했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경찰력이 투입된 2014년 1월에도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였지만, 전과 같은 영향력은 없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진 2014년 4월 16일. 이제 우리는 모두 동의한 것 같다. 나라는 헬조선이 되어 버렸고, 우리의 운동은 실패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2000년대 생겨난 촛불집회는 분명 386 세대의 조직력이 일부 뒷받침되긴 했지만, 분명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생겨난 집회였으며 이 집회 문화를 주도한 것은 당시를 살아가던 20대였다. 2008년 광우병 사건은 당시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각종 패러디와 집단 지성, 집단 창작이 결집되어 만들어낸 아름다운 축제 같은 집회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촛불집회는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386들은 20대를 개새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 일까?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든 386 세대는 스스로를 사회를 변화 시켜낸 주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지금의 20대들은 자신들이 했던 것을 하지 못하느냐고 윽박지른다. 40대가 되고, 50대가 된 386들은 생활 전선에 뛰어 들었기 때문에 잘하지 못하는데, 그러니까 20대들이더 열심히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투표율은 좋은 먹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386들은 20대를 다그친다. 하지만 20대 개새끼론은 386 세대의 착각이다. 20대 개새끼론의 핵심은 20대가 아니다.

20대 개새끼론은 학생운동에 투영된 386 세대의 욕망과 알리바이일 뿐

이제 36살이 되는 나 역시 20대 후반에 20대 개새끼론에 시달렸다. 나보다 많게는 16살이나 어린,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청년들 또한 개새끼론에 시달린다. 16년의 나이 차이를 내 위로 적용시키면 84학번이 호출된다. 10년 가까이 개새끼 소리를 들어온 많은 20대는 이제 20대가 아니다.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는데, 과연 우리 세대의 정치 의식은 내가 20대 때와 크게 달라졌을까.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일베' 같은 극우 사이트가 인기를 끌면서, 과거에는 좀 조용했던 친구들도 극성맞게 극우적 성향을 띠는 등 더 안 좋아진 상황은 체감한다. 우리 세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30대 개새끼론은 없을까? 답은 20대 개새끼론이 세대의 문제가 아니며, 386도 자신들이 왜 늘 현재의 20대만 증오하는지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20대 개새끼론의 실체는 386 세대가 학생운동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이다. 자신들이 나라를 바꿔낸 학생운동이 망가진 게 보기 싫다는 거다. 20대가, 아니 대학생이 조금 더 조직적으로 열심히 해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짜증이 난다는 거다. 이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성찰의 방향을 잃고, 새로이 성인이 되는 20대가 386 세대를 꼰대로 여기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학생운동이 소멸된 책임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대학생, 2000년대 초중반의 대학생에게 있다.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던 대학의 학생운동이, 취직을 준비하는 이들의 커리어 패스로 돌변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학생운동은 완전히 소멸했다. IMF 이후 급변한 사회 환경은 학생운동부터 무력화 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대에게 학생운동 소멸의 책임을 온전히 묻는 것은 타당할까? 당연히 옳지 않다. IMF 이후의 변화는 당시의 대학생들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새롭게 대학을 들어가는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이 무엇인지, 학원 괴담 수준의 아련한 전설로만 기억할 뿐이다. 1960년대의 신성일 영화를 90년대의 대학생이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의 대학생들이 1980년대의 학생운동을 바라보는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언제나 새롭게 20대가 되는 대학생들은 겪어보지도 못한 옛 시절의 운동을 지켜내지 못해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 하나.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만약 내가 다시 2008년의 어느 날로 돌아가서 20대 개새끼론을 다시 듣는다면, 나는 그들과 논쟁을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정치운동의 소멸, 새로운 정치 문화의 등장, 시민사회의 위기 등등. 토론을 하고 설득을 할 것 같다.

그리고 실제 나는 학생운동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대학을 보낸 사람이기에, 그 운동 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 또한 누군가 지적을 한다면, 적극적으로 대화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아무도 개새끼론을 꺼내들지 않는다. 지금과 그때의 우리 세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시간이 지나니 저절로 20대 개새끼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모순적이다.

증오의 정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새로운 정치 세대에 환대 필요

20대 개새끼론은 386 세대의 좌절된 정치가 그들을 좌절 시킨 정부 여당 및 기득권 층에게 흐른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져 약자를 괴롭히는 방식을 띈다.
▲ 수평폭력 20대 개새끼론은 386 세대의 좌절된 정치가 그들을 좌절 시킨 정부 여당 및 기득권 층에게 흐른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져 약자를 괴롭히는 방식을 띈다.
ⓒ 박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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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지금의 대학생들'을 개새끼로 만드는 386의 정서는 깊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요약하자면, 20대 개새끼론은 386 세대가 자신들의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던 젊은 날을 미화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들은 20대가 정말 개새끼인지 아닌지 관심 없다. 다만 자기들 아래 학번을 갖는 모든 대학생들이 자신들처럼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불만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의로웠던 20대를 돌이켜보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IMF 이후의 20대에게 언제나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 욕망은 변절과 야합과 무능력으로 점철된 386 세대 사회 지도자들이, 헬조선으로 변한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20대의 정치참여로 돌리며 교묘하게 피해가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전성기를 맞이한 386 세대는 학생운동의 성과를 보다 넓은 차원의 사회공공성으로 확장시켜내지 못했다.

이제 인정하자. 당신들의 운동은 실패했다. 아니 우리들의 운동은 실패했다. 우리의 실패를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생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비겁하다. 20대 개새끼론은 사회악이다. 20대 개새끼론을 접한 젊은이들은 당연히 그 말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386의 꼰대질을 본능적으로 느껴 적대감을 갖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적대감은 생각보다 강하며, 그것을 해소하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세대와 친구가 되는 것 까진 바라지 않겠다. 제발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는 말자. 부탁이다.


태그:#20대 개새끼론, #약자폭력 , #386세대,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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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를 통한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글로써 많은 교류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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