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부터 방송될 <쇼 미 더 머니5>의 타이틀 화면. <쇼 미 더 머니>는 힙합 신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로그램이 됐다. 하지만...

오는 5월부터 방송될 < SHOW ME THE MONEY(쇼미더머니) 5 >의 타이틀 화면. <쇼미더머니>는 힙합 신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로그램이 됐다. 하지만... ⓒ Mnet


나는 중학생 때 반에서 좀 독특한 취향을 가졌었다. 당시 반 친구들 대부분은 발라드나 아이돌 가수를 좋아했다. 극히 몇 명은 록을 신봉하며 '록 근본주의자'의 행태를 보였지만, 어쨌든 힙합을 좋아하는 건 나뿐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에픽하이나 다이나믹 듀오의 1집을 상시 휴대할 정도였으니까.

힙합은 억눌린 감정을 뻥 뚫어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주는가 하면, 흔한 사랑 이야기에만 얽매이지 않고 폭넓고 풍부하게 삶의 철학을 리듬감 있게 풀어내는 점이 좋았다. 그들의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음악만으로도 그들은 내게 시인, 철학자, 또한 전사였다. 하지만 반에서 짝사랑했던 이성 친구 A는 유명한 아이돌 보이그룹의 멤버를 좋아했다.

그때 난 참 '지질'했다. 생면부지의 남자 아이돌이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깐족거리며 그 아이돌의 꼬투리를 잡았으니까. 내 열폭(열등감 폭발)에 혹시나 상처받았을지 모를 A와 아이돌(?)에게는 심심하고 미안한 추억이다. 물론 열폭은 단순한 지질함 이상의 무엇이었다. 당시 반 친구들이 아무도 내 '선구안'을 안 믿어줘 벌어진 일종의 '인정투쟁'이기도 했다.

대중화된 힙합 뮤지션, 그런데...

다이나믹듀오 8번째 정규 앨범, 게걸음 걷는 개코  17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다이나믹듀오(최자, 개코)의 8번째 정규 앨범 < 그랜드 카니발 (GRAND CARNIVAL) >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개코가 게걸음으로 다가오자 최자가 웃고 있다.

< 그랜드 카니발 (GRAND CARNIVAL) >은 2013년 발표된 정규 7집 앨범 이후 약 2년 4개월만에 선보이는 정규앨범으로 다이나믹듀오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상황 등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다이나믹듀오 8번째 정규 앨범, 게걸음 걷는 개코 지난 2015년 11월 17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다이나믹듀오(최자, 개코)의 8번째 정규 앨범 < 그랜드 카니발 (GRAND CARNIVAL) >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개코가 게걸음으로 다가오자 최자가 웃고 있다. ⓒ 이정민


나는 에픽하이와 다듀가 언젠가 꼭 흥할 뮤지션임에 틀림없음을, 반 친구들이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 주장은 '멍멍이 짖는 소리' 에픽하이와 다듀는 '웬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냐'고 취급을 당해 서러웠다. 물론 지금이야 둘 다 유명해진 뮤지션들이고, 커리어를 봐도 힙합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 통틀어 고루 인정받는다. 상도 여럿 탔고, 현재 각각 YG 산하 레이블 하이그라운드나 아메바컬쳐의 수장일 정도로 힙합 신에서 영향력도 크다.

그래서 혹시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를 옛 중학교 동창들에게 남기고픈 말로는 'ㅇㄱㄹㅇ ㅂㅂㅂㄱ ㅇㅈ?(이게 리얼. 반박 불가. 인정?)'이 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힙합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친구가 최신 제품으로 바꾸며 팔아넘긴 저용량 MP3에 저음질(128kbps)로 여러 곡을 욱여넣었다. 가리온, 버벌진트, 피타입, 더블K, 스토니스컹크, TBNY, 배치기, MC스나이퍼, 제리케이, 더 콰이엇…. 찾아 듣는 음악가의 폭도 넓어졌고, 등·하교를 하며 플로우를 느끼고 라임을 이해했다. 또한, 고등학생 때는 주변에 힙합을 좋아하는 녀석들 몇몇과 교류를 했다.

그러다 덜컥 20대가 됐고 군대에 갔고, 거기서는 힙합을 틀어주지 않았다. 2년의 세월은 참으로 무서웠다.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고는 기상나팔, 걸그룹 최신곡, 10대 군가밖에 없었으니까. 플로우의 감을 떨어뜨리고 정신세계를 바꿔놓는 환경 속에서, 힙합에 관한 관심은 점점 멀어져만 갔고 혀끝도 이미 절어버렸다. 전역 후, 다시 우연히 접한 힙합 신의 풍경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령 에픽하이와 다이나믹 듀오의 음악과 위상은 전혀 달라졌다. 대중성을 지향했고, 힙합 신뿐 아니라 국내 음악 시장 전체로 봐도 이미 영향력 있는 뮤지션이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내가 힙합 신에 대한 감이 떨어진 탓인가 생각도 해봤지만, 2013년 래퍼들 사이에 벌어져 SNS상에서 논란이었던 '컨트롤 비트 대란'을 보며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래퍼끼리 벌어지는 연이은 폭로, 계약관계, 돈 이야기, 싸움…. '어휴, 힙합 왜 이렇게 됐냐?' 거부감만 커졌다. 물론 사람들이 같은 현상을 모두 똑같이 보는 건 아니다. 힙합의 잠재적 파급력을 알아챈 거대 자본과 미디어는, 힙합을 문화콘텐츠라 쓰고 상품이라 읽었다. 이들은 돈벌이와 지배 이데올로기 선전 수단으로 재가공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충격과 공포였던 <쇼미더머니>의 등장

 < SHOW ME THE MONEY 2 > 당시 본선 경연 무대 전광판. 군대에 다녀와 처음 저 프로그램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SHOW ME THE MONEY 2 > 당시 본선 경연 무대 전광판. 군대에 다녀와 처음 저 프로그램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Mnet


2013년 어느 날, 노량진의 한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다가 식당 TV를 통해 우연히 엠넷의 < SHOW ME THE MONEY(쇼 미 더 머니) 2 >(아래 <쇼미>)를 접했다. 쇼 미 더 '힙합'도 아니고 무려 쇼 미 더 '머니'씩이나 되는 이 프로그램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언더와 오버에서 내로라하는 래퍼들이 몰려들어 광대처럼 랩을 했다. 대중은 여기에 호응해 버튼을 눌렀고 래퍼들의 '값어치'가 실시간으로 결정됐다.

해당 래퍼가 평소에 어떤 철학을 가사에 담아냈고 음악 인생을 살아왔는지, 관객이 해당 무대에서 말초적 감성 이상의 무엇을 얻었는지는 물어지지 않았다. 단지 순간의 이목을 끄는 스펙터클의 무대! 그 한 번으로 누군가는 영웅이 됐고, 또 누군가는 '이십사이더(아웃사이더가 최저 상금 20만 원을 기록한 걸 비꼬는 말)'이라는 굴욕적 별명을 얻었다.

사행성 경쟁을 부추기며, 래퍼들의 개성과 음악의 가치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저 단가를 후려쳐 대중들에게 주입하는 이게 힙합이 맞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힙합인데, 이제까지 비주류의 영역에 남아서, 자본주의가 대중문화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압력을 버텨낸 게 언더그라운드였는데…. 당시에는 <쇼미>가 얼마 못 가리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웬걸. 많은 래퍼가 자본주의에 길들지 않으려고 버텼던 게 아니라, 길들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이제 <쇼미>는 시즌5까지 접어들어 5월 방영을 앞두고 있고, 연일 흥행몰이에도 성공 중이다. 래퍼들도 역대 최다인 9000명이 예선에 지원했다. 지난 시즌부터 래퍼들은 이목을 끌려고 점점 선정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바지를 까 내리고 상습적인 욕설을 했으며, 또 누군가는 여성 혐오성 발언을 했다. <쇼미> 밖에서도 자기과시를 하는가 하면 사회적 약자를 멸시하면서 "솔직한 것"이라고 포장했다.

그 사이 힙합에 대한 대중의 편견 역시 커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힙합 관련 기사들에는 "힙합? 허구한 날 돈 자랑, 욕설 디스, 약자 혐오, '똥폼'만 잡는 힙찔이(힙합+지질이)들" 같은 댓글들이 달리게 됐다. 힙합은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이런 문제의식과, 그래도 내 청소년기를 버티게 해준 힙합에 대한 애정 때문에 '쇼 미 더 힙합' 연재를 시작해보려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아직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이름만으로도 '리스펙트'를 부르는 한국 힙합 1세대 가리온, 그 사이 부지런히 한국 힙합 신 관련 리뷰와 논문들을 쏟아낸 평론가와 전문 연구자들, 힙합을 사랑하는 래퍼들과 리스너들. 이들 중 몇몇 생각을 글과 목소리로 들어보고, 직접 힙합 신의 음악과 공연을 지속해서 경험해보기로 했다. 또한, 독자들이 힙합 신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관계망 분석 프로그램을 활용해 '연결고리'와 같은 자료도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현재 힙합 신의 문제는 래퍼 개개인보다는, 불공정하고 극소수 래퍼들에게만 대중의 관심과 자원이 집중되는 불균형적인 '구조'의 문제였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 물론 힙합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생각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것만큼은 웬만하면 다들 'ㅇㅈ(인정)'하지 않을까. 쇼 미 더 '머니'가 아니라 쇼 미 더 '힙합'이 본질이라는 것을. 'ㅇㄱㄹㅇ ㅂㅂㅂㄱ(이게 리얼. 반박불가)'라는 것을.

 쇼 미 더 머니를 넘어서, 쇼 미 더 힙합으로 가자. 그게 진짜 '힙합'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쇼 미 더 머니를 넘어서, 쇼 미 더 힙합으로 가자. 그게 진짜 '힙합'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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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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