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카트리나와 살리에르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현장에서 카트리나(채송화)와 살리에르(최수형)가 황제의 대관식을 준비하는 장면. 살리에르는 카트리나를 다그치고 다독이며 음악을 계속 할 수 있게끔 이끈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그저 노래하고 싶을 뿐이었다. 살리에르에게 뮤즈였던 카트리나가 모차르트를 선택한 순간, 살리에르는 평생을 사랑한 음악 자체에게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을 터이다. ⓒ 곽우신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악장 살리에르. 그는 황제의 즉위식에 어울릴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애쓰고 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살리에르.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그는 신의 영광을 노래하며, 자신의 음악이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테레지아, 뮤즈이자 애제자인 카트리나가 곁에 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모차르트,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모차르트의 등장 지난 2월 24일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현장에서 모차르트(박유덕)가 대중 앞에 나서 자신의 음악을 뽐내고 있다.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고 선율 위에서 음표를 가지고 노는 모차르트. 전통과 규격을 무시한 자유로운 그의 음악, 그의 재능에 대중은 환호한다. 그리고 살리에르의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 곽우신


"이렇게 하면 어때. 재밌게 할 수 있지. 이런 게 더 낫잖아. 리듬에 모든 걸 다 맡겨. 이게 낫잖아. 여기 모인 사람들, 억세게 운이 좋다지. 완벽한 내 음악을 들을 수 있네. 나의 음표, 멜로디 자유롭게 날아가. 이제 준비는 끝났어. 시작이야." - 뮤지컬 <살리에르> 1막 No.08 '오! 모차르트' 중에서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음악을 변주하는 모차르트. 과거로부터 이어온 전통이나 정형화된 기술적 틀을 뛰어넘어 선율을 가지고 노는 모차르트를 보며, 그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난다. 살리에르가 처음 보는 이 남자, 젤라스.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한다.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라고, 그 악보를 훔치라고. 애써 무시하던 목소리가 점차 마음속에서 증폭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살리에르의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크고 화려해진 무대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질투의 속삭임 지난 2월 24일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무대에 오른 배우 김찬호(젤라스)와 정상윤(살리에르). 젤라스는 살리에르의 감정이 의인화된 캐릭터이지만 점차 살리에르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모차르트를 향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살리에르는 처절하게 부서진다. ⓒ 곽우신


2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궁정악장이 다시 이별을 준비 중이다. 2014년 초연 이후 2015년 리멤버 콘서트(관련 기사 : 살리에리는 정말 모차르트를 질투했을까)를 거치며 여러 팬을 앓게 만들었던 뮤지컬 <살리에르>. 지난 2월 18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재연의 막을 올렸던 <살리에르>가 오는 13일, 음표들과의 짧은 만남을 끝낸다.

뮤지컬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와 동시대 실존인물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다룬 창작극이다. 대중문화에서 살리에리는 흔히 '질투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이와 같은 이미지가 대중에게 깊이 각인됐다. 뮤지컬 <살리에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살리에리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살리에'르'(발음상 편의의 문제로 살리에르로 표기했다고 한다)라는 인물을 만들어 전면에 내세운다.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완벽한 음악 지난 2월 24일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현장에서 살리에르(최수형)가 황제의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다. 당대 음악가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살리에르. 그가 얼마나 높이 올라 있었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뮤지컬 <살리에르>도 대극장으로 옮겨져 규모를 키웠다. 살리에르가 높이 올라간 만큼, 그가 파멸할 때의 낙차 역시 훨씬 커 보인다. ⓒ 곽우신


뮤지컬 <살리에르>는 초연에 비해 외형적 성장이 두드러진다. 프레스콜 현장에서 한승원 HJ컬쳐 대표는, 궁정악장으로서 영광을 누렸던 살리에르가 "얼마나 위대한 악장이었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대극장 버전으로의 탈바꿈을 꾀했다고 밝혔다. 일단 보는 맛이 더해졌다. 샹들리에가 추가되는 등 무대 자체가 화려해졌다. 특히 의상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다소 어색했던 초연 의상에 비해 훨씬 세련되면서도 고전적인 미를 더했다.

수많은 앙상블이 추가되면서 노래 자체도 풍성해졌다. 본래 음악의 힘이 강했던 작품인데, 재연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매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 대극장에서 40여 명의 앙상블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선율은 관객을 압도할 정도다. 드라마도 강해졌다. 살리에르의 음악적 신념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지고, 모차르트의 등장 뒤에 깔린 권력의 암투도 묘사된다. 카트리나가 결국 왜 살리에르가 아니라 모차르트를 선택했는지도 초연 때 비해 설득력을 지닌다. 다만 군데군데 보강한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매조지어지지는 않는 느낌은 있다.

재연 <살리에르>의 가장 아쉬운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초연 당시 <살리에르>만의 오묘한 매력이 약해졌다는 것.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내 창작뮤지컬 중 <살리에르>가 '대체불가' 입지를 다졌던 이유는 중극장 특유의 공간적 매력을 활용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기괴하면서도 신비로운 아우라를 풍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매력이 대극장으로 오면서 다소 희미해졌다. 다음 공연 때는 규모와 화려함을 유지하면서도 과거의 독특한 느낌을 되찾는 게 가장 큰 숙제가 될 듯하다.

죽여도 죽지 않는 질투라는 놈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질투에게 잡아먹히다 지난 2월 24일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 김찬호와 정상윤이 열연하고 있다. 젤라스(김찬호)는 신을 찾는 살리에르(정상윤)를 비웃으며, "신은 널 버렸다"고 선언한다. 신의 영광을 노래하던 살리에르는 이제 질투에게 지배당해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 곽우신


뮤지컬 <살리에르>의 부제는 '질투의 속삭임'이다. 젤라스는 질투라는 감정이 의인화된 캐릭터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재능을 정확하게 알아본 건 바로 살리에르였다. 젤라스가 나타난 것도 바로 그때. 살리에르는 애써 젤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젤라스는 점차 괴물로 성장한다. 어느 순간, 젤라스는 더 이상 살리에르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되어버리고 만다.

젤라스의 외침에 잡아먹힌 살리에르는 훔친 모차르트의 악보를 불길 속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모차르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도 가질 수 없게 하리라! 하지만 모차르트를 찾아간 살리에르의 마음은 다시 흔들린다.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모차르트를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사랑하니까.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악장의 자살 지난 2월 24일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현장에서 살리에르(최수형)가 자신의 목에 깃펜을 꽂아 넣고 있다. 살리에르는 젤라스를 죽이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질투는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 곽우신


결국 살리에르는 자신을 지배하는 젤라스를 없애기로 결심한다. 젤라스는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살리에르는 깃펜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쏟아지는 조명빛 아래로 살리에르와 젤라스가 같이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다. 하지만 잠시 후, 젤라스는 유유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죽음조차 넘어선 감정….

질투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젤라스의 웃음 지난 2월 24일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현장에서 열연하고 있는 배우 조형균과 정상윤. 살리에르(정상윤)를 비웃는 젤라스(조형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살리에르의 마음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질투는 살리에르의 오랜 친구였다. ⓒ 곽우신


"우린 이미 오랜 친구. 전 늘 편지를 썼죠. 답장 없는 편지를 매일 밤. 당신의 음악들은 나의 모든 것들을 키우고 있었죠. 당신이 작곡한 음악들을 날마다 들으며 자라났죠." - 뮤지컬 <살리에르> 1막 No.14 '미친 음악' 중에서

젤라스가 살리에르를 처음 만났을 때 부른 노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젤라스는 오로지 살리에르의 눈에만 보인다. 아니,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질투의 속삭임은 살리에르의 귓가에만 들린 것일까? 흑색과 백색으로 명백하게 대비되는 이미지의 살리에르와 모차르트. (비록 프리뷰 기간 이후로 바뀌었지만) 젤라스는 검은 옷에 흰 가발을 쓰고 그 사이에 등장한다. 질투는 살리에르만의 것이 아니었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그 이상으로, 모차르트 역시 살리에르를 질투하고 있었다.

모차르트 역을 맡은 박유덕 배우는 프레스콜 현장에서 "(관객들이) 모차르트 안에 있는 젤라스도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차르트의 눈에는 분명 젤라스의 그림자가 보였고, 그 귀에는 젤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 모차르트와 카트리나 지난 2월 24일 뮤지컬 <살리에르> 프레스콜 현장에서 모차르트(허규)를 카트리나(이하나)가 위로하고 있다. 젤라스는 살리에르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이상으로, 모차르트도 살리에르를 질투하고 있었다. ⓒ 곽우신


살리에르는 사실 질투의 힘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질투가 순기능으로 작동할 때, 인간은 상대를 뛰어넘기 위해 스스로를 연마하고 세공한다. 살리에르가 궁정악장 자리에 오를 수 있던 것도, 이 질투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살리에르 자신만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질투는 '나쁜' 감정이니까, 그저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쉽게 예단했다.

우리도 살리에르처럼 흔히 감정을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으로 나누지만, 정말 그럴까? <인사이드 아웃> 라일리의 머릿속에 조이(기쁨)만 있고 새드니스(슬픔)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질투는 없앨 수도 없고, 질투 자체에 선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인간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감정. 죽어서도 없앨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이 우리의 귓가에 속삭이는 순간 역시 분명 있다.

질투가 다가와 속삭일 때, 살리에르는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젤라스를 괴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젤라스와 함께 무엇을 만들 것인가.

젤라스는 지금도 당신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다.

 뮤지컬 <살리에르> 포스터

▲ 뮤지컬 <살리에르> 포스터 지난 2월 18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한 뮤지컬 <살리에르>가 오는 13일 막을 내린다. 영원히 기억되고 싶었지만, 결국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리고 만 한 인간의 추락. 질투에 잡아먹힌 위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자. ⓒ HJ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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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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