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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경기도 평촌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난생 처음 살아본 아파트지만 별을 보고 등교하고 달빛을 맞으며 하교하던 시절인지라 잠자는 곳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당시 가족을 제외하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일면이 있는 사람은 경비 어르신 두 분이었습니다. 등교를 위해 나서는 새벽 시간이 두 분의 교대시간과 엇비슷했고 자정 즈음 아파트에 들어설 때 홀로 경비실을 지키는 어르신을 경유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중 한분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다소 마른 얼굴에 깐깐해 보이는 인상 때문에 제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분인데 말입니다.

우리 세대 마지막 학력고사를 끝내고 나서야 지금까지 흰색이라고 생각했던 아파트가 사실 노란색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별빛과 달빛만으로 보았던 아파트와 햇빛에 비친 아파트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분명 우리 집이건만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 아파트에 이질감을 느끼던 그 즈음, 어색한 인사를 나누던 꼬장꼬장한 경비원 어르신도 사라졌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항상 자리를 지키고 계시던 분이 사라졌지만 저에게 큰 관심을 끌 일은 아니었습니다.

25년 전 아파트에서 본 놀라운 광경

25년 전 아파트로 이사한 후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는 자료사진.
 25년 전 아파트로 이사한 후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는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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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일입니다. 제가 사는 동의 주민들, 특히 젊은 주부들이 동 앞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층에 8세대가 사는 15층 아파트였는데 120세대 입주민들이 거의 나왔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저 무슨 반상회 비슷한 회의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집결한 입주민들이 근처 동으로 한꺼번에 몰려갔습니다. 직감적으로 이건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한 집단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웃 동과 무슨 분쟁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저씨! 어르신! 빨리 돌아오세요. 저희들이 모시고 갈테니 걱정 말고 같이 가세요."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카랑카랑한 젊은 주부들의 목소리가 향한 곳은 이웃 동의 경비실이었고, 그곳에는 몇 개월 동안 저와 함께 새벽과 자정을 맞이했던 경비원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어르신은 딸 같은 입주민들의 부름에 경비실 밖으로 나와 연신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깐깐하게만 느껴졌던 어르신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당시 제 어머니로부터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들었습니다. 경비원 어르신이 꼬장꼬장해 보이기는 했지만 주민들을 자기 가족처럼 잘 돌봐 주셨다고 합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보행을 돕고, 물건도 잘 들어 주시고, 어린 아이들 잘 챙겨주고, 아파트 입구를 깔끔하게 청소하시고,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의 출입을 철저하게 잘 관리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의 동대표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 옆 동으로 쫓겨 갔다는 것입니다. 경비 어르신이 내몰린 이유가 하도 어이가 없는 일인지라 젊은 주부들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하고 집단행동을 통해 어르신을 다시 모셔오기 위한 실력행사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경비 어르신은 다시 주민들 품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집단적 실력행사가 그렇게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경험은 다시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마음을 뒤 흔들었던 그 날의 먹먹한 감동은 실로 잊기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젊은 주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눈물을 훔치던 어르신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최근 90년대 초반, 제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리게 만든 사건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올해 2월 말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의 A아파트 입주자대표모임은 '통합전자보안시스템' 도입을 이유로 경비원 44명 중 35명에게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통합전자보안시스템' 도입으로 가구당 관리비 부담은 다소 경감되었을 것입니다. 이익과 손해를 화폐가치로 판단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경비원 감축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일지 모릅니다.

이와는 달리 서울 강서구 가양동 B아파트와 영등포구 양평동 C아파트의 입주민들은 최근 경비원 감축안을 주민투표에 부쳐 압도적인 표차로 그들의 해고를 막았다고 합니다. 이들 주민들은 관리비 절감 대신 '경비원과 함께 사는 아파트'를 택하였습니다. <경향신문>은 이들 아파트의 연속적인 선택을 두고 '공동체 바이러스'의 '따뜻한 전염'이라고 표현했습니다(2016.03.01 기사).

경기도 고양시 D아파트 입주민 한 분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이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아파트 경비원 감축안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천 원짜리 지폐 4장과 '저 4000원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엘리베이터에 부착했다고 합니다. 이 아파트 역시 주민투표 결과 경비원 해고 안건이 부결되었습니다. 차가운 계산 능력을 가진 합리적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세 아파트의 주민들은 경비원을 해고하여 월 몇 천 원의 금전적 이득을 챙길 기회를 날려버린 셈입니다.

앞의 A아파트의 경우 경비원 해고 절차가 단행되기는 했지만, 많은 주민들이 주민투표 과정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하고 경비원 해고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총 660가구 중 150여 가구로 구성된 'A아파트 주민모임'은 2월 15일 "대표회의의 통합보안시스템 설치 결의를 무효로 해달라"며 입주자대표회의와 회장을 상대로 서울남부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주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해고 통보를 받은 경비원들은 계속 출근 투쟁을 벌이고 있고, 주민들은 경비원들이 쫓겨나지 않도록 정문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입주자대표회의와 달리 A아파트의 주민들 역시 금전적 이득을 팽개치고 경비원과 함께 사는 아파트를 택하려 하고 있습니다. 경비원을 해고하여 관리비를 절감하려는 안건을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시킨 아파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해고통보를 받은 경비원들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주민들도 비합리적 선택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 대신 공동체가 경비원을 지킨다

고양시에 거주하는 김남훈씨가 아파트 경비원 해고에 반대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인쇄물을 게시한 사진. 김남훈씨 페이스북에서 퍼옴.
▲ 김남훈씨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 고양시에 거주하는 김남훈씨가 아파트 경비원 해고에 반대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인쇄물을 게시한 사진. 김남훈씨 페이스북에서 퍼옴.
ⓒ 김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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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파트 경비원 수는 2007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해부터 아파트 경비원과 같은 감시·단속근로자에 대해 최저임금의 70%를 적용하는 법적 보호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2007년에는 최저임금의 70%, 2008∼2011년 80%, 2012∼2014년 90%, 2015년부터 100%가 적용되어 왔습니다. 시간당 법정 임금이 단기간에 크게 상승했기 때문에 단순한 논리로는 아파트 경비원의 처우가 크게 개선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역설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경비원 임금과 관리비는 정비례 관계입니다. 경비원 임금이 오르면 그대로 관리비에 반영되므로 아파트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최저임금 적용에 다소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추세로 보면 경비원들은 임금 상승 국면마다 해고의 위협에 직면해 왔고, 실제로 많은 경비원들이 대량 해고되었습니다.

원래 2012년부터 최저임금 100%를 적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2011년 겨울 대량 해고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경비원들이 스스로 임금인상 폭을 낮춰달라고 요구한 결과 2014년까지 90%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한국경비협회는 2012년 최저임금의 90%가 적용될 당시 경비노동자의 15% 정도가 해고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한겨레> 2014.10.20 기사). 경비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개혁 입법이 역으로 경비원의 대량 해고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운 역설입니다.

경비원들의 업무를 CCTV로 대체하고 대기업 경비업체의 기계적 관리 시스템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비원 해고를 반대하는 아파트 주민들이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격 경쟁력으로 밀어 붙이는 시장의 압력과 법정 최저 임금을 보장해 주고 뒷짐만 지고 있는 정부의 방관이 노년 어르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경비원들을 악마의 맷돌로 무자비하게 갈아 내자 사회의 반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구획된 아파트가 하나의 마을 공동체로 연결되는 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급여를 나눠 부담하는 고용인의 입장이 아니라 마을 입구를 지켜주는 사람과 함께 하려는 이웃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아파트 경비원은 감시적 근로자입니다. 감시적 근로자란 비교적 피로가 적고 힘들지 않은 감시업무를 주된 업무로 하는 아파트·건물 경비원, 회사 수위, 물품 감시원 등을 말합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아파트 경비원은 방범 및 안전점검이 고유 업무입니다. 택배 대신 받아주기, 이중 주차된 차량 밀어주기, 쓰레기 분리수거, 화단 가꾸기, 낙엽 쓸기, 눈 치우기, 무거운 물건 들어주기는 엄밀히 말해 경비원의 고유 업무가 아닙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경비원이 해야만 하는 고유 업무라면 "비교적 피로가 적고 힘들지 않은 감시업무를 주된 업무로 하는 감시적 근로자"의 범주에 아파트 경비원은 포함될 수 없습니다. 엄밀한 법적 기준으로 본다면 아파트 경비원들은 부당 노동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파트 경비원들은 격일제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비원들의 근무 기준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점심이나 저녁 식사 시간에 2시간씩 자리를 비우고, 야간에 취침을 청하는 모습을 보고 근무태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간혹 인터넷 상에 경비원들이 제대로 근무하지 않는다며 격정적인 글을 올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때때로 내가 주는 월급 받고 근무 태도가 왜 그러냐면서 지적을 하는 분들도 있을 법합니다.

법적으로 아파트 경비원들의 근로시간과 휴게시간은 엄밀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엄밀한 구별은 경비원의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조치라기보다는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한 방편의 일환입니다. 최저임금을 100% 적용한다고 해서 경비원의 임금이 그 비율대로 상승하지 않는 이유는 휴게시간을 늘리는 꼼수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용노동부에서 감사 및 단속적 근로자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을 설명한 안내장
▲ 고용노동부의 아파트 경비원 관련 안내장(2013년) 고용노동부에서 감사 및 단속적 근로자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을 설명한 안내장
ⓒ 고용노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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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은 자신에게 보장된 휴게시간에 경비실이나 초소를 떠나 자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별도의 휴게시설이 없거나 휴게시간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경우 주민들과 마찰이 생길 개연성이 높아집니다. 대부분 자유롭게 쉴 수 있는 휴게시간을 반납하고 경비실을 지키거나 별도의 추가 업무를 수행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정법의 기준으로 보면 아파트 경비원들은 다양한 불법적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불법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상황 개선을 명목으로 법적 잣대를 적용해서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들을 법적 보호의 테두리로 묶어 내는 일은 당연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근로 시간당 최저임금 100%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대량 해고라는 불미스럽고 역설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관리비 인상을 막기 위해 경비원을 해고하려는 안건을 압도적인 반대로 막아낸 사례를 다시 돌아봅시다. 시장의 압박과 국가의 방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아파트가 공동체로 결집되었습니다. 입주민과 경비원이 사용자와 근로자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회의 반격이라 진단하기에는 다소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움직임의 단초가 분명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 주민들과 경비원들이 상생하는 움직임이 점차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중요합니다. 고유 업무 이외 택배, 주차, 분리수거, 청소 등의 부가 업무 강요를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휴게시간 보장을 법적으로 통제하기보다는 아파트 공동체의 자율적 노력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주민과 경비원의 상생은 사회혁신의 중요한 실마리

경비원 해고를 막아낸 몇몇 아파트 주민들의 개별적, 미시적 사례들은 분명 권장하고 자랑할 만한 미담입니다. 아파트 공동체 형성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혁신의 단초라 할 만합니다. 공동체 바이러스의 따뜻한 전염이 자율적으로 확산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의식적인 노력이 결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선도적인 정책 개입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사례로 충남 아산시는 지난해부터 "고령 아파트 경비원 고용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아산시 의회는 2015년 3월 16일 "아산시 아파트경비원의 고용 유지 및 창출 촉진을 위한 특별지원 조례"를 제정한 바 있습니다. 이 조례의 핵심은 고령자경비원의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해고회피 노력을 통한 고용유지, 근로여건 개선을 하는 아파트에 고용보조금을 지원하는 데 있습니다.

서울시를 비롯한 대도시 아파트도 이러한 지원 사업의 실행이 가능하고, 또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세부 실행 방안은 다양하게 구상할 수 있습니다. 몇몇 아파트를 거점 공동체로 선정하고 몇 가지 상생 실험을 선도적으로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공동체의 자율적 상생 노력 및 성과와 연동된 보조금 지급 방식으로 적극적인 활성화를 도모하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간접 고용을 직접 고용으로 전환한다든지, 고유 업무 이외 추가 업무를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든지, 휴게시간 보장을 위한 전향적 조치를 취하는 등 경비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장려할 수 있도록 지원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파트 입주민들과 경비원들의 상생 협력은 사회혁신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대도시 아파트에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불가능하다는 선입견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 마을을 함께 꾸미는 이웃 관념이 퍼져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속 세대에 대한 교육 효과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무려 25년 전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젊은 주부들의 집단행동의 감동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똘레랑스 기자는 서울혁신센터 산하 '사회혁신리서치 랩'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이 기사는 리서치랩의 <사회혁신 포커스>로 작성한 것을 재수정 한것이다. 또한 이 기사는 사회혁신리서치랩 블로그에도 동시 게재되었다.



태그:#아파트 공동체, #아파트, #경비원, #공동체, #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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