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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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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의 도시 라다크 레 ⓒ 양학용
아이들이 아프기 시작한 것은 레에 도착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흔한 산소라는 존재 때문에 이처럼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숨 쉬기가 힘들어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누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요!"

열여덟 살 유진이다. 스무 살 솔지도 마찬가지였다. 체한 것처럼 아프다고 해서 아내가 열 손가락을 다 따주었지만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질 못했다. 열다섯 살 '해남 촌놈' 남수도, 동갑내기 축구선수 정민이도, 막내인 열네 살 우현이도 속이 메스껍고 숨이 가쁘다고 고산병 증세를 연이어 호소했다.

사실은 아내와 나 역시 심장박동수가 정상범위를 벗어나 한껏 속도를 올리던 참이었다. 아프지 않은 사람보다 아픈 이가 더 많아져, 여행학교는 여행자 병동이 되어 있었다.

하루 동안 활동금지령을 내렸다. 우리들 몸이 산소가 적은 이곳 고산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산소 소비량을 최소화하라고 당부했으나, 아이들은 아이들이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누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요"
빵 굽는 냄새를 따라 레의 골목골목 돌아다니기 ⓒ 양학용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도시, 레 ⓒ 양학용
곧 떠나게 될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등산화, 선글라스, 장갑 등을 산다는 핑계로 낯선 도시의 골목골목을 야금야금 탐험하고 다녔다. 그러다 헤나 염색약을 사와서 숙소에서 직접 염색을 하기도 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나게 된 라다크 친구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처럼 고산병을 등에 지고도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에 한발씩 다가서고 있었던 셈이다.

'심장이 진짜 무지하게 아프다. 막 쿵쿵쿵 거리고 조금만 걸어도 심장이 찢어질 것 같고. 심장이 아프니까 뒷목도 당기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삼촌이 맥박을 짚고 가셨는데 106이란다. 뭐 1분인가 그 기준일 텐데, 내가 애들 중에 최고랬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유진)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모둠원들끼리 협의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학교에서처럼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아니어서 좋다. 다혜와 구석진 노점상이 있는 골목을 다녔다. 다혜는 100루피짜리 장갑 하나를 샀고, 나는 150루피 버선을 130루피에 깎아서 샀다. 다혜는 또 티셔츠를 230루피에서 200루피로 깎았다. 풋, 우리는 깎기 신이닷!! 아, 맞다! 헤나 염색약도 샀다. 붉은빛 갈색을 사서 숙소에서 다혜랑 생~쇼를 하며 염색했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민아)

'길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거닐었다. 한국에서 난 '길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무언가 두려워 새로운 길로 가지 않는다. 그러다 액세사리를 파는 노점상을 만났다. 팔찌에 관심을 가지자 자루에서 팔찌를 몽땅 꺼내 보여주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말렸는데 괜찮단다. 주인은 "Slowly, slowly. That's OK"라고 말했다. 내가 조급해 하고 있었구나, 그때 알았다.

그 말에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며 그냥 땅바닥에 앉아버렸다. 주인이 괜찮으냐고 물었고, 난 지금 이렇게 앉아있는 내 모습이 좋았다. 팔찌를 사고 나서, 이번에는 라다크 할머니와 두 손자를 만났다. 셋 모두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한국어로, 그들은 라다크어로 대화를 하였다.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대답 대신 자신의 과자를 건넸다. 자신의 과자를 건네던 여섯 살 남자 아이. 그 과자와 그 아이의 손을 잊지 못할 것 같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아라)
고산병을 등에 지고 레 시내를 돌아다니는 아이들 ⓒ 김정민
이튿날 아침. 하루를 꼬박 쉰 후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께서 교사로 계신 곳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루 사이에 아이들이 기운을 차리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 실수였다. 괜찮던 아이들까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고산을 여행해 본 이라면 알 것 같다. 고산병에는 고통보다 더 힘들고 무서운 것이 있다. 고통에 앞서 달려오는 두려움이다. 모든 고통이 호흡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호흡할 때마다 심장이 찌릿찌릿 아파오고, 불규칙한 호흡 끝에 내 몸이 땅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이러다 혹시 내 몸이... 내 심장이... 영원히... 숨 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그럴 때 아이들의 입 밖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흘러나온다.

"삼촌, 제가 이 여행을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요?"
"걷는 것조차 이렇게 숨이 가쁜데, 히말라야 트레킹을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될까요?"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그 순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도대체 나는 왜 이 힘든 여행에 따라나선 걸까?'

'머리는 띵하고 몸에서 열이 나는데 춥고... 제일 힘든 건 두통. 걷는 게 힘들어 모둠 아이들에게 자꾸 쉬어가자고 했다. 그럼에도 다시 걷기 시작하면 두통은 곧장 나를 따라와 힘들게 했다. 이번 여행... 이 고산증을 참아낼 수 있을까...?'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진실)

'이번 여행학교는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었나?'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도로를 넘어 라다크에서 인도 북부의 마날리로 가던 길 ⓒ 양학용
돌아보면 참으로 출발이 어려운 여행이었다. 6개월 전에 예약해둔 항공권을 겨우 여행 한 달 전에 내 손으로 취소하기도 했었다. 에어인디아 항공사 노조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델리-레' 노선이 무기한 운항정지된 것이다. '괜찮을 거야.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곧 타결소식이 들려오겠지.' 1주일이 가고, 보름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흘렀을 즈음, 아내와 나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인도 북부 지역을 여행한 뒤 버스를 타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도로를 넘어 라다크로 입성한 후 항공편으로 델리로 돌아오려던 여행루트를 항공편 예약 가능 상황에 맞추어 역방향으로 수정해야 했다. 다시 항공편을 알아보고 수정한 여행루트를 점검하느라 부산하던 그때, 우리 부부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들.

'우리들이 라다크로 무사히 떠날 수 있을까?'
'이번 여행학교 가능한 거 맞지?'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행 2주일 정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생 참가자인 아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여권 만료기간이 6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여권은 다시 신청하였으나, 비자를 새로 받을 시간이 없다고 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여권 두 개를 다 가져가는 것이다. 비자는 붙었으나 유효기간 미달인 여권과 유효기간은 문제없으나 비자가 없는 여권. 말하자면 불완전체인 두 개의 여권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존재 가치를 발휘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출입국사무소 관리 하나가 이를 문제 삼아 결단코 입국을 불허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나라가 인도였다.

이는, 반쪽짜리 여권 두 개를 들고 늘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곤 하는 인도라는 나라로 향하는 아라는, 그리고 나는,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를 모든 상황들에 대해 애써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음으로써만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우리 부부 머릿속을 괴롭히는 생각들.

'왜 이렇게 출발이 어렵지?'
'정말 이번 여행학교 가능한 거... 맞나?'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제주로 이사 온 이후 그만큼의 눈은 처음이었다. 전국적인 폭설이었다. 택시를 어렵게 잡아타고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활주로 여기저기 눈이 쌓여있었다.

아이들이 제 시간에 해남에서 대전에서 울산에서 제주에서 인천국제공항에 닿을 수 있을지, 인도행 항공기는 무사히 이륙해줄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날 공항에서 몇 시간의 기다림은 우리 부부를 조바심치게 했고, 또 다시 떠오른 방정맞을 생각들에 몸서리치게 했다.

'이번 여행학교는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었나?'
'누군가 우리의 출발을 막고 싶었던 걸까?'
하늘과 가까운 땅 라다크 레 ⓒ 양학용
참으로 출발이 어려운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느끼는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인도 라다크는 히말라야 자락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그 말은 라다크 대부분 지역이 해발 4000미터를 오르내리는 고산지역이라는 뜻이다.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고산병에 노출되는 곳이다. 만약 한 명이라도 고산병으로 위급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내와 나 둘 중 하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항공기 타고 다시 델리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의 여행학교는 반쪽씩 나누어져 결말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 것이 분명했다.

사실은 내 안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청소년 14명과 함께 이런 고산지역으로 험한 여행을 계획한 것 자체가 우리 부부의 욕심이었던가, 하는 반문 때문에 어떤 여행에서든 출발 전에 있어왔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더 크고 복잡하게 부각되는 것인지도. 그러니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아이들의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내 안에도 있었던 셈이다.

'나는 왜 누가 시키지도 않는 여행학교를 한답시고 마음고생 몸 고생을 하는 걸까?'

결국 그날 오후, 우리들은 도시 외곽에 있는 SNM 병원을 찾아가야 했다. 레에서 제일 큰 병원이라고 했지만 시설은 낡고 의료기기는 열악해 보였다. 병원은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오래된 미래'의 도시답게 방문자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해 운영된다고 했다. 의사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정성껏 진단해주었다. 그리곤, "외국인이라면 모두가 겪는 과정이니까, 다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해주었다. 모두 겪는 과정이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모두 다. 그 몇 마디의 말들이 그 어떤 치료와 약 처방보다도 고마웠다. 수줍은 듯 밝아지는 아이들 얼굴을 보며 의사의 그 부드러운 언어들이 그들을 낫게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길 위에 선 여행자에겐 따뜻한 말 한두 마디가 그처럼 소중한 법이다.

"외국인이라면 모두 겪는 과정이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의사선생님의 처방은 '산소 마시기 30분' ⓒ 박솔지
유진과 진실 두 녀석에게만 '산소 마시기 30분' 처방이 내려졌다. 아이들은 낡은 침대 몇 개가 놓인 치료실에 몰려들어 다함께 기다렸다. 잠시 후 간호사가 대형 포탄처럼 생긴 산소통을 끌고 들어왔을 때, 우리 부부도 아이들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국립병원 전문의가 내린 처방이 '산소 마시기'라는 것부터가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마셔야 할 산소통이 너무 크고 투박했던 탓이었다.

"누나~!! 산소 맛있어?"

정호랑 우현이다. 아이들은 산소 호흡기를 물고 조금 우스운 꼴이 된 유진이랑 진실이를 놀려먹느라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다. 언제 고산병 증세로 아팠는지, 또 언제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수 없을까 걱정했는지도 까맣게 잊은 얼굴들을 하고서는. 산소 호흡기를 물고 말하고 장난치느라 최종 흡입량이 모자랐던 유진은 나와 아내의 눈총을 받으며 30분을 더 마셔야 했다.

아이들이 이렇다. 고산병이든 산소 마시기 치료행위든 뭐든 다 놀이로 만들어낸다. 애태우는 입장에서는 야속하고 밉다가도, 그 대책 없는 낙관성이 또 부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다. 교사인 내가 너무 꼼꼼하게 준비하기보다 아이들을 믿고 내맡겨보면 일인 듯 놀이인 듯 어찌어찌 진행되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발랄함으로 나름의 꼴을 형성해간다.

미리 계산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지나간 일을 머리에 담아 후회하지도 않고, 그냥 현재 그 자체를 즐기는 그들만의 놀이 본능! 사실은 내가 길 위에서 여행자가 되어, 배우고 싶고 배우고자 애쓰지만 잘 체득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병원놀이'를 끝내고 레 시내로 돌아온 우리들은 곧장 '짝퉁' 한국식당 '아미고(Amigo, 스페인어로 친구)'로 향했다. 이른바 두 번째 치료처방인 셈이다. 당연히 아이들은 라면과 된장찌개 혹은 김치찌개 심지어 공기밥 한 그릇에도 열광했다.

정말이지, 먼 여행길에서 한국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닐 때가 있다. 특히 몸이 아플 때에는. 김치와 된장 냄새만으로도 처방약이 된다. 그것도 만병통치약. 고향에서 온 만병통치약 덕분인지, 의사선생님의 고마운 언술 때문인지, 1시간 동안 마신 산소의 효과인지 그날 밤 아이들은 레 하늘의 초승달만큼이나 밝게 웃고 있었다.

'살다 살다 산소를 튜브로 먹어봤다. 내 맥박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삼촌이 결국 아픈 우리들을 이끌고 레에서 가장 좋은 병원에 갔다. 솔직히 엄청 작고 무지 지저분했다. 그곳에 계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유진)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자마자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일어서서 숟가락 젓가락을 양손에 들고 달려들었다. 레에 와서 한 끼도 먹지 못한 아이들처럼 쉬지 않고 입속에 음식을 채워 넣었다. 라면이 나왔을 때는 '아!' 감탄 소리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먹기만 했다. 한국에 있는 식당이었으면 맛없다고 했을 텐데, 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별한 식당이 되었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진실)
라다크 하늘의 초승달처럼 고산병과 친구되기 ⓒ 박솔지

덧붙이는 글 | 본 연재기사는 2015년 3월~11월 제민일보에 게재되었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여행학교, #라다크, #레 , #고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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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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